중학교 1학년! 처음으로 교복 입고 기분을 내는 대신 태희는 맘고생을 먼저 배웠다. 가장 큰 문제는 친구들이었다.
태희는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부터 분위기를 감지하고 친구들 한 명 한 명 얼굴을 살피며 하루를 시작했다.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안 좋아 보여서 걱정이 되네.”
“신경 쓰지 마! 그냥 나한테 말 걸지 마”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친구에게 다가갔다가 맘이 상해서 억울해했다.
“내가 뭘 잘못했어?”
집에 돌아와 하소연하는 태희가 안쓰러우면서도 ‘대체 왜 친하지도 않으면서 그런 걸 물은 거지? 정말 오지랖이다’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주위를 늘 살피며 관찰하고 상대방에게 촉을 곤두세우는 예민한 태희를 친구들은 부담스러워했다. 문제가 발생하면 바로 사과하고 풀고 싶어 하는 적극적인 태도도 회피형 친구들과는 맞지 않았다. 당연히 학교생활이 순조롭지 않았다.
‘남들한테 신경 쓰지 마!’라고 말하는 극도의 이성적인 엄마에게도 태희는 아무 위로를 받지 못했다. 힘든 마음으로 돌아오면 하루 종일 휴대전화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자기감정에 휩쓸려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날들이 연일 계속되었다,
“태희야, 이제 8시야. 오늘 해야 할 거 가지고 나와야지.”
“어. 나 중요한 일이 있어서 친구랑 통화 중이야. 잠시만….”
“희야! 학교에서 3시 30분에 끝나고 와서 너 휴대폰만 계속 보고 있잖아!”
“아니, 오늘 친구랑 학교에서 좀 다퉜는데 지금 이야기하는 중이라고!!”
“적당히 하고 5분 안에 나와!”
더 기다리지 못한 내 성격에 잠시 후회도 되었지만, 며칠째 반복되는 상황을 나도 더 이상 참는 게 힘이 들었다.
처음에는 안쓰러웠던 마음도 반복되니 엉뚱하게도 화로 분출되었다. 한번 시작하면 불꽃이 튈 정도로 싸웠다. 태희는 내 말꼬리를 잡고 한마디도 지지 않고 대들었다.
“엄마는 공부를 왜 해? 그런 거 말고 우리 시대와 소통하는 법을 배워야 할 거 같은데?”
“지금 엄마가 좋아하는 품격 완전히 떨어졌거든. 전혀 어른답지 않아!”
가시 돋친 말로 나를 초라하게 만들기 일쑤였고 나 또한 “진짜 돌았네. 완전히 미쳤어!” 같은 말로 아이 마음에 대못을 꽂았다. 좋게 포장하면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겠지만, 딸에게 나는 꼰대 엄마였고 나에게 딸은 말대꾸로 무장한 사춘기 십 대일뿐이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주기로 작정한 사람들 같았다. 어찌나 말을 잘하는지 1~2시간씩 진을 빼고 나서야 끝이 났다. 결국 마무리는 “이제 그만하자. 방으로 들어가” 하면 “엄마는 꼭 엄마가 시작해놓고 결국에는 나를 나쁜 애로 만들더라”로 끝이 났다. 퉁퉁거리며 들어가는 뒷모습에 한참을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너 이다음에 그 야무진 입으로 아나운서라도 돼라. 아니면 나 진짜 빡 칠 거 같다’라며 허공에 대고 주절거렸다.
안팎으로 받은 상처가 사춘기와 만났다. 비뚤어진 마음으로 뿜어내는 살기는 태희를 180도 바꿔 놓았다. 상처받은 아이는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칼날로 주변 사람들을 할퀴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낙천적인 성격 때문에 아무리 내가 “빨리빨리"를 외쳐도 느긋하던 아이.
‘그래, 태희처럼 저렇게 느긋해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구나’를 한 수 가르쳐 주었던 아이.
웃으면 양쪽 보조개가 깊이 패어 크고 가지런한 하얀 이빨이 다 드러나도록 크게 웃을 줄 알던 내 딸은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렸다. 말끝마다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며 시비를 걸고 자꾸만 혼자 고립되려고 했다.
나는 지인을 통해 상담 선생님을 찾았다. 1회에 10만 원이라는 가격이 부담스러웠지만 남편에게조차 비밀로 하고 상담을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 번 1시간. 아이의 눈높이에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일이었다. 나의 어리석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몇 달이 지나도 상담은 제자리걸음이었고 효과라면 받을 때 잠 깐 뿐이었다.
나는 천천히 다시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엉켜버린 실타래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내게는 가장 어려운 일 ‘들어주기’부터 해보자. 아이가 하교 후 돌아오면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간식을 준비하고 기다렸다. 고작 30분 남짓임에도 ‘참을 인’을 100번 더 새기며 들어야 했고 나로서는 전혀 공감되지 않는 일에도 맞장구를 쳐주며 태희 편에 서서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어느 순간부터 ‘전학’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고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하는 시간도 늘어갔다.
여전히 우리는 서로 이성을 잃고 싸우다 부둥켜안고 ‘못 되게 말해 미안하다’며 펑펑 운다. 친구들과 싸운 날에는 기분 전환을 위해 둘이서 코인노래방을 다녀오기도 하고 매운 떡볶이를 시켜 먹으며 욕을 한 사발 늘어놓기도 한다. 감성적인 태희는 더 많이 부딪치고 깨지며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었다.
어느 날 개학을 이틀 남겨두고 친구들 때문에 학교 가기가 싫다고 말하는 태희에게 쿨하게 “오케이”라고 말했다. 태희는 왜냐고 묻지 않는 나 때문에 오히려 당황해하며 “진짜 안 가도 돼?”라며 재차 확인했다. 나도 내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저 태희 편에서 아이가 혼자 마음 추스를 시간을 주고 싶었다.
담임 선생님과 긴 통화 후, 태희는 당분간 등교 대신 ‘가정학습’을 진행하기로 했다. 분주한 아침, 아이 셋을 학교에 보내고 나면 이제는 혼자가 아니라 둘이 남았다. 오전 3시간은 학습량을 채우고 점심을 먹은 이후부터는 자유 시간이었다. 태희는 ‘세븐틴 콘서트’를 가기 위해 당근마켓에 물건을 팔아 푯값을 모으기도 하고 마들렌을 구워 내가 공부하는 책상에 살며시 놓아주기도 했다. 어쩌면 재택학습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스쳤지만, 섣불리 결정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가정학습을 시작하고 열흘이 지났다. 우리는 점심으로 써브웨이 샌드위치를 하나씩 물고 눈부신 태양을 올려다보며 공원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희야, 오후에는 미술관에 가볼까?”
“나 이제 학교에 가도 될 거 같아”
샌드위치가 목에 걸려 기침하다가 눈물이 쏟아졌다. 혹시나 태희가 자퇴 이야기를 꺼낸다고 해도 당황하지 말고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해주자며 다짐하고 또 다짐했었는데 마음은 아니었나 보다. 나는 가만히 태희를 안아주었다.
‘태희야, 고마워. 잘 이겨내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