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 하고도 넉 달 전이다. 예상치 못한 부당해고를 당한 후 각종 소송과 진정으로 상처투성이가 된 그가 급히 만나자고 한다. 연초이지만 어둠의 깊은 자락은 5시를 덮고도 남았다. 같은 지역에 사는 것도 아닌데 이 시간에 어디서 어떻게 만나자는 말인가…. 2021년 7월 해고된 당일 저녁,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직원들에게 마지막 저녁과 커피까지 대접하며 헤어졌던 그다. 냉철하다 못해 때론 인간미조차도 드러낼 수 없었던 그였던 것 같다.
오래도록 만나지 못했던 그가 만나자고 하니 가슴이 철렁했다. 또 사측으로부터 무슨 고소를 당한 것인가…. 2021년 1월 그와 나, 그리고 또 다른 동료가 중간 지점인 서안동 IC 어느 휴게소에서 만났다. 낯에 스며든 깊은 어두움이 그가 입은 흰색 셔츠 위로 도드라보였다.
“말을 안 하고 살아서인지 목소리가 나오질 않는군요”
또박또박 정확한 발음을 내뱉는다.
미움이 증오가 그 자신을, 그리고 우리 자신의 내면을 농밀하게 매우고 있었다. 갓 지은 돌솥밥에서 모락모락 김이 오르고, 윤기 자르르 구워진 고등어가 속없이 납작 누워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잠시간의 침묵 사이를 젓가락이 오간다. 나의 근황도 그의 안부도 돌솥에 딱 들러붙은 누룽밥처럼 물에 불어 터지기만 기다려야 했다.
“기타를 배우고 있어요. 어울리진 않지만 새로운 것을 도전해 보면 좋을 것 같아서요. 제가 취업을 못하니 세상에 경단녀인 제 아내가 취직을 했지 뭐예요”
“해고무효소송과 중앙노동위원회 부당해고 심리 결과는 나왔어요?”
“아니요. 소송은 진행 중이고, 노동위는 아직은요 그러나 제가 이겼어요. 당연히 부당한 해고니까요”
“승소했으면 해고가 무효가 되겠네요. 징계취소는 얼마나 걸리고요?”
“…………………”
그의 소송 상황과 중앙노동위원회 심리결과가 궁금했지만 말을 아끼는 그에게 적어도… 고통을 상기시켜 주고 싶진 않았다. 이 시간만이라도 그의 상황을 온전히 이해하는 우리 앞에서 그가 편히 쉴 수 있기를 바라는 우리의 작은 바람이었다.
“회사엔 별일 없어요? 늘 소문이 많고 말이 많은 곳이잖아요.”
“언제나 그렇죠. 색이 입혀지고 지워지고 재창조가 되는 그런 일상의 반복인데 새로울 게 있겠어요?”
나와 동료의 안부보다는 회사가 더 궁금한 것인지…. 왜 그리 급히 만나자고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밤이 깊어가니 눈치 빠른 B가 휴게소에서 간고등어 선물세트 2개를 사서 하나는 A에게 또 다른 하나는 내 손에 들려준다.
“명절도 다가오는데 아빠가 안동 다녀온 길에 간고등어 사가면 아이들이 좋아할 거 같아요. 작지만 받아주면 고맙겠어요”
별다른 대화도 없이 몇 시간 고속도로를 달려 우리는 목구멍에 침묵을 반찬삼아 뜨거운 밥을 밀어 넣기만 했다. 왜 만나자고 한 것인지…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알 수 없었다.
주차장에서 헤어지는 발걸음에 왜 그리 마음이 찡했는지… 사는 것이 참으로 야속하기만 했다.
자정이 넘고 몸은 천근만근이다. 무엇이 이토록 나를 삶의 극단으로 내모는 것인지…
입을 뗄 기운조차 옷을 갈아입을 힘조차 남아있지 않다.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 수없이 외쳐본다.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고백한다.
‘공의의 하나님, 의의 하나님이심을 제가 믿습니다..’
밤사이 긴 고통은 뒤로 내빼고 햇살이 쨍하고 올라온다.
고통 속에 행복이 묻어간다. 난 그 말을 믿는다. 행복은 아무에게나 가지 않으려 고통과 눈보라 속에 자신을 꽁꽁 감추며 온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그러니 끝까지 쉬지 않고 가야 한다. 사막을 횡단하는 낙타처럼 말이다.
밤사이 거하게 술을 푸고 해장하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밤새 번뇌 속에 몸부림치면서도 아침 해가 뜨면 또 군장을 하고 전장에 나서는 그런 인생처럼 말이다. 머리가 묵근한 게 묵직하다.
A를 만나고 10개월즘 지났을까.… 나는 맥락 없이 문자를 보냈다.
“그래도 그때 고등어 한 손 들려 보내길 참 잘했죠? 미련이라도 없게 말이죠”
나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더 이상 소식이 없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두렵게 만들었던 것인가. 정의를 외쳤던 그 패기는 어디로 가고, 현실을 존재해 내야만 하는 생활인의 번뇌가 그를 구속했다. 그렇다. 정의는 거래가 될 수 있는 좋은 매물이다. 값도 부르기 나름이라 시가도 없다. 나는 친구 하나를 잃었다. 이제 홀로 남은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