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하지 마라
후회하는 삶을 살거나 하지는 않는다.
돌아보면 2011년은 다사다난해서 곱씹는 맛이 나는 한 해였다.
무려 14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재미있는 일들이 많았다.
20대 초반의 열정적인 삶을 살았던 것도 한몫했겠지만, 그것 말고도 많은 일들을 자처해서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기억에 남고 재밌는 한 해였다.
동아리 회장을 하면서 겪었던 일들은 앞으로 내가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행동력을 더하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지만, 반대로 내가 독선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지는 않는가 되묻는 아주 귀하고 소중한 경험이었다.
2011년으로 몇 번을 돌아가도 아마 똑같이 행동을 했을 것이다.
학생이라는 이름의 최후의 신분으로 살았던 마지막 해였고, 울타리를 나오기 전 마지막 한 해였기 때문이다.
반성을 하면서 그때를 곱씹곤 하지만 이제는 그 반성도 의미가 있는가 싶을 정도로 바래졌기도 하다.
내가 살아온 발자취는 발자국을 남길뿐이다.
후회하지 마라
2011년은 장교로 임관하기 전 장교 후보생의 마지막이기도 했다.
2년밖에 되지 않는 후보생 생활은 냉탕과 온탕과 같이 뒤집히는 생활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동아리 회장 생활로 정신이 없었던 1학기가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
뜨거운 여름이 찾아왔고, 나에게는 하계 입영훈련이라는 마지막 관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임관시험을 겸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여느 입영훈련과는 남다른 무게감이 있었다.
뭐랄까... 학생중앙군사학교장님이 장교에게 필요한 것은 체력이라고 계속 강조해서 그런가?
무게감이 더 남달랐을 수도 있다.
입영훈련은 1 달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하게 되었고, 한 달 동안은 사회와 격리된 생활을 했었다.
마지막 입영훈련이었던 만큼 기억에 많이 남는 시간이었고, 그만큼 하계입영훈련에서 만난 동기들과도 각별하게 친해졌다.
분대 단위 전투훈련을 지휘를 해야 하기도 했고, 병 기본 훈련을 마친 상태였기 때문에 훈련의 난이도 또한 대폭 상향되었다.
독도법 훈련은 머리를 아프게 했다.
이 독도법이야말로 나는 장교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생각해서 반드시 잘 배워야 했지만, 내가 훈련을 받으면서 느낀 것은
저... 사람 독도법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말이 안 되는 설명이 많았다. 군대의 상명하복식 교육은 말이 안 되는 것들이 많았다.
의문도 많았고 해소되지 않은 궁금증도 많았지만 결론은 지도 하나를 보며 산속에서 어떤 지점을 찾아내야만 했다.
중요 지형지물이 없는 산속에서는 등고선과 고산지대의 형태를 등고선과 대조하여 산봉우리를 중요 지형지물로 특정을 하고
내가 지정한 2개의 지형지물을 토대로 내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을 해야 했지만, 처음 산에 내던져진 나는 멘탈이 붕괴될 수밖에 없었다.
지도의 등고선도 이게 정말 올바른 지도가 맞는지 계속해서 의문이 떠올랐고, 소소하게 다른 변화들이 모두 내 머릿속 레이더에 잡히는 것들이 지도의 신뢰성을 극히 저하시켰다.
결국은 일일이 지도를 보면서 내가 눈으로 관측을 한 것과 대조를 하면서 지도의 신뢰성을 쌓아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어려운 독도법도 반복해서 하다 보니 상당히 흥미가 있었다.
신체적 괴로움은 둘째 치더라도, 내 어릴 적 모험심을 충족시켜 주기에는 이만한 훈련도 없었기 때문이다.
온종일 산을 누비고 다니면서 포인트 지점에 적힌 것들을 기재하여 교관에게 제출하는 방식이었는데
정답을 알려주지 않아서, 그때 내가 잘했는지 안 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다음 분대 방어 전술훈련 때, 비전술적 행위를 조심하라며 밥 먹을 때 은 엄폐를 하지 않고 밥을 먹는다며, 빙 둘러앉아 식사 중인 우리에게 최루탄을 투척한 교관도 상당히 인상 깊었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지만, 밥 먹다가 들이마신 가스는 잊을 수가 없는 맛이었다.
서서히 안개처럼 나타난 최루탄 가스는 목부터 극심한 고통을 주더니, 가스를 피해서 고지대로 열심히 뛰어 올라갔지만, 눈, 코, 입으로부터 수많은 액체를 흘리고 나서야 고통을 거두어 갔다.
말할 것도 없는 훈련들이 반복해서 이어졌다.
6시 이전에는 끝이 났던 훈련들도 야간까지 진행되는 훈련도 많았고, 툭하면 평가를 하겠다며 후보생들을 못살게 굴었다.
다른 사람을 관리를 해야 하는 장교가 되는 길이 쉽다면 그것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그때는 임관을 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다들 무언가에 홀린 듯이 열심히 했다.
힘이 들면 서로 다독이기도 했고, 더위를 이기고자 쉬는 시간에는 방탄 모를 두들기며 콧노래를 부르며 격리되어 보지 못했던 세상들을 상상하기도 했다.
남한산성을 가로지르는 60km 행군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행군은 자신 있었지만, 철야행군이었던 것도 한몫했고, 한 달 내도록 강도 높은 훈련을 받고 있었던 터라
체력 고갈 상태가 엄청났던 것 같다.
경기도 인근이었지만, 밤하늘의 별이 잘 보였기 때문에 기분은 좋았다.
전투복은 땀으로 흠뻑 젖었고, 팔다리 끝부분에는 소금기가 하얗게 서려있었다.
그래도 이것만 끝난다면 사실상 임관은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부푸는 기대감에 더 힘을 낼 수 있었다.
60km 행군을 완주하고, 퇴소식을 할 때는 한 달간의 여정을 정리해서 보여주는 동영상을 꼭 만들어주곤 했는데
어째서인지 그 영상을 보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집에 가서 콜라 마셔야지
다른 큰 감상이랄 것도 없었고, 그냥 집으로 가서 얼른 시원한 콜라나 마시고 싶었다.
으레 그렇듯 큰일이 끝나고 나면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하계 입영훈련이 끝나자마자, 참모단을 인수인계받았다.
사실상 하계 입영훈련이 끝났기 때문에 딱히 참모단이 해야 하는 일은 크게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개강과 동시에 이루어지는 안보 견학과, 문무제, 동기들과 후배들의 승단심사 정도를 남겨두고 있었다.
정보 작전장교 후보생이라는 뭔가 거창한 것을 달고 있었지만, 사실상 그냥 행사 기획 등을 준비하는 것이 다였고,
뭔가 거창한 것을 계획해서 가도 예산 때문에 반려만 당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지금에서야 생각해 보면 구색 갖추 기고, 보고서 한 장을 위한 행사들이었겠지만, 적어도 우리들에게는 지푸라기 같은 의미라도 있어야 된다고 생각을 해서, 의미 있고 기억에 남는 행사들을 진행하려고 밤이 새도록 기획을 했던 것 같다.
컴퓨터 화면을 멍하게 밤새도록 바라보면서, "뭘 어쩌란 거지?" 말을 수천 번 혼잣말을 했던 것 같다.
동아리 회장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짬을 내기가 쉽지 않았다.
인간이 활동하는 시간에는 동아리활동에 참여해야 했고, 인간이 잠을 자야 하는 시간에는 기획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루 이틀 밤을 새우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잠을 못 자고 기절을 했던 시절이었다.
힘든 만큼 내가 고생하고 있단 것을 알아줬다면 좋았겠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통제를 벗어난 동기들은 나에게 예외가 될 순 없겠냐고 물어보고,
훈육관들은 불가능한 일을 강요했다. 중간에 끼인 내 입장에서야 뭘 해도 아쉬운 소리였겠지만,
오도 가도 못하고, 동기들을 대변하는 이야기를 할 때면 훈육관님의 불호령이 날아들었다.
그 와중에 입바른 얘기를 하면,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마라며 쫓겨나기 일 수였던 생활이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행사들이 굴러가는 것을 보니 신기하기도 했고, 솔직히 말해서 내가 제일 도움을 받았던 것은 동기들의 도움과 관례라는 이름의 필살기였지만, 그래도 책임감이라는 이름 아래 완수하고 기절할 때면 세상이 참 평온했다.
하루하루 살아내는 그 하루들을 역시 몇 번을 생각해 봐도 후회로 물들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날들은 소중하게 아직 기억하고 있는 것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