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대학교 4년은 길고도 짧았다.
배워야 할 것들을 온몸으로 깎여가며 배웠고, 많은 변화를 초래하기도 했다.
학교를 떠나야 한다는 것을 실감하기는 쉽지 않았다.
대학을 다닐 때부터 집에서부터 독립을 한다고 생각을 했었지만, 경제적인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일을 하고 돈을 받는다는 개념은 가지고 있었다.
인력소 사무실, 경호업체 일 등 단기적으로 일을 하고 보수를 받는 일은 숱하게 경험했으니까 하지만, 이제 졸업을 하고 임관을 하면 국가를 위해 일을 하기 보수를 받는다.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이 떠오르긴 했지만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마지막 졸업을 앞둔 겨울방학은 길었다.
면허를 따야 했다.
많이 늦었다고 생각했지만 면허학원에는 돈이 든다는 이유로 면허를 따게 해주지 않았다.
그때 면허 취득이 쉬워진다는 소식이 있었고 3일 만에 취득이 가능한다는 이야기가 있어 면허시험을 볼 수가 있었다.
운전대를 잡는다는 것에서 정말 어른이 됐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처음 운전대를 잡았을 때는 이게 차의 떨림인지 나의 떨림인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았다.
친구와 함께해서 부담은 덜었지만 생소함에서 오는 어려움은 극복하기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클러치의 감각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고, 자동차의 운행의 느낌을 이론적으로 이해하려 드니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게 감각적 체화가 필요한 것이란 것을 깨닫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버지가 운전을 가르쳐 주는 것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어른으로 인정받는 과정 중 하나였고, 그 과정에서 아버지가 함께 한다는 것은 멋진 일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나와 함께하지 않았다.
성가셔함이 느껴질 때쯤, 아버지는 본인의 일이 아닌 것에는 의미를 두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렸을 때 배운 효도는 자식이 부모에게로 향하는 마음이 일방통행이었지만 나는 관계라는 것은 상호작용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버지와의 소통 가능성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나이가 가득 찬 아들의 신호에도 아버지는 응하지 않았다.
결국 운전에 대한 로망은 사라졌고 형식적인 면허 취득으로 끝나버렸다.
면허를 취득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클러치의 감각이 익숙해지기 시작하자 주행은 오히려 재미가 있었고 주차가 생각보다 많이 어려웠지만 평가가 그렇게 큰 것을 요구하지 않아서 어렵지 않게 면허를 취득할 수 있었다.
졸업을 하기 전에 자주 보지 못할 것 같은 친구들을 만나러 다니곤 했다.
의무적인 느낌이라기보다는, 모처럼 느껴지는 자유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은 좋았고, 그런 모습 속에서 나는 에너지를 얻었다.
하고 싶은 일들과, 해야 할 일들을 나눠가면서 사람들을 만났다.
사람들은 나에게 잘할 것이라며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동아리 회장을 하면서 짊어지고 있었던, 책임감과 학군단 자치근무자일을 하면서 가중됐던 무게감을 내려놓으면서 한 해를 정리를 해보았다.
아직 학교를 다니면서 하고 싶은 일들이 많이 남아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서운함이 밀려 들어왔다.
하지만 그 서운함을 만끽하기도 전에, 나에게는 새로운 시작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 돌아왔다.
약간의 여유가 생겼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친구들을 만나면서 함께 가지 못했던 여행을 가기도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푹 쉬어보기도 했지만 이미 시작이 예고된 다음 해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막연하게 후보생 생활을 하면서, 나는 야전의 소대장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서
내가 그리던 미래는 싸우는 전사의 이미지보다는, 병사들을 이끄는 리더의 모습이었지만
병과 지원에서 특전사를 지원을 했기 때문에 방향이 상당히 많이 틀어져 버렸다.
선배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특전사 장교는 장교라기보다는 그냥 침투작전에 특화된 스페셜리스트였다.
소규모 인원을 이끌고 극한의 상황을 극복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당장에 뭔가를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지 않았나라는 생각에 초조해졌다.
일단 당장에 극복해야 하는 것이 고소 공포증과 물에 대한 공포였다.
낙하산을 메고 뛰어내려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정말로 칠색 팔색 했던 기억이 났다.
당장 수영도 하지 못하는데, 수영을 잘해야 한다니..... 나는 육군 소속으로 들어가는 거 아닌가?
별의별 복잡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당장에 고소공포증은 병적일 정도가 아니길 기도했었고, 기본적으로 높은 장소는 모두 무서워하니까 나도 그런 거겠지라는 생각으로, 깊게 파고들지 않기로 정했다.
문제는 물인데, 이것도 어쩔 수 있나 그냥 다음날부터 집 앞에 있는 수영장을 다니기로 했다.
따로 수영을 배우기에는 뭔가 저항감이 심했고, 물속에서 수영을 하는 것을 독학하기로 했다.
무언가 발전을 위한 일이라기보다는 내가 안심하기 위해서 반복해서 했던 기억이 난다.
수영을 독학으로 잘하게 될 리는 없었지만, 막상 물에 들어가니 헤엄을 치는 건지 물장구를 치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았던 탓에 역으로 초조함만 늘어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시간은 다가왔고, 결국 자대 배치가 발표됐다.
특수전사령부에 발령 난 것을 축하드립니다. ^^
그토록 두렵고, 무서웠지만 발표가 된 그날에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
그냥 이것을 계기로 내가 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특별한 존재가 되어가는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친구들은 반 장난 삼아 이제 죽으러 가는 거냐?, 살아서 돌아와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했지만, 그날은 하루 종일 들뜬 채로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겨울의 끝자락
나는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그날의 기록
나는 평소에 감정의 변화가 매우 적은 사람이다.
2012년 02월 28일 육. 해. 공군 해병대 통합 임관식.
나는 원래 초등학교 때부터 내 꿈은 공군 장교 파일럿이었다.
정말로 바보같이 막연한 동경의 대상. 어떻게 보면 우상 아이돌과 같은 존재.
육해공군 해병대 통합 식인만큼 2012년 임관하는 모든 신임 소위들이 다 모이는 자리이다.
초록색의 제복 속에서 유난히 내 눈에 띄는 푸른색 제복들 마치 학군단 제복을 떠올리게 하지만 내가 꿈꾸고 바라던 제복이다.
막연히 바라만 보고 있다.
정말로 멋있다고 생각했고 정말로 동경했던 존재들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제복은 대한민국 육군 장교의 정복이다.
내가 느끼는 아쉬움이다. 늦게 움직인 내가 그래도 지금 이렇게 장교의 정복을 입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신기하지만 조금만, 정말 조금만이라도 단 1년 만이라도 빨리 움직였다면 나는 내가 바라던 우상이 될 수 있었을까?
추운 날씨 속에 8시간이 넘게 계룡대 연병장에서 서있었던 나는 계속 후회와 아쉬움이 넘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뭔가 이렇게 되어버린 이상 이것도 좋다고 생각해 왔지만 막상 동경의 대상이 눈앞에 있었고 내가 충분히 그 우상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만으로 이미 후회는 내 몸을 휘감는다.
길고 긴 임관 행사가 끝나고 갑자기 계룡대 하늘로 날아든 블랙이글스, 그 축하공연을 보는 순간 정말 가슴이 철렁이는 무언가를 느꼈다.
그저 눈앞에 펼쳐지는 화려한 광경에서 그런 건지 후회와 뭔가 모를 아쉬운 감정들이 요동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아마도 이런 감정을 감동이라고 하지 않을까.
비록 지금 다른 꿈을 가지고 다른 길을 걷지만, 첫사랑만큼이나 남자의 처음 가진 꿈이라 건 정말 이렇게 평생을 따라다닐 모양이다.
그래도 그 꿈을 그리다 보니 지금의 자리에도 못 올 못난 놈이 이렇게나마 따라붙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감사한다.
그래도 난 다른 식으로 하늘을 날아볼 듯하지만,
그래도 난 지금 그것마저 좋구나. 그래 오늘은 정말 좋은 날이구만.
학군사관후보생 강 00.
육군 소위로 명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