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적인 느낌
나는 내가 하려는 일이 도덕적으로 평가받았을 때 아쉬운 소리로 지적당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 더 쉽게 얘기하자면, 나쁜 일은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으레 관행처럼 '남들도 다 그러는데 '라는 말이 통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졸업을 앞둔 그 해에도 나는 아직 사회의 때가 덜 탄 상태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좀 때가 묻어도 좋았을 텐데, 이상한 곳에서 자존심을 부리곤 했다.
게다가 하필이면 그 자존심이 졸업논문에서 나와버렸다. 자존심은 세우고 싶고, 졸업논문은 작성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함이 몰려왔다.
하지만, 리포트 월드에서 단순히 돈을 주고 사서 제출하기에는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평소에 고민했던 왜 법학 수업은 뒤지게 재미가 없을까라는 것을 진지하게 파고들어보기로 했다.
법학과에서 법 공부를 하면서 즐거웠던 순간과 즐겁지 않았던 순간의 비율을 따져보면, 참담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법학이 흥미롭지 않은 학문은 아니었다.
굉장히 흥미가 있는 부분도 많고 실생활과 연관이 있기 때문에 즐겁게 배우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한 학문이었다.
그럼에도, 교수님들은 책에 있는 내용을 읽기만 하거나 판례들에 대한 감정 섞인 비판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수면제를 먹은듯한 상태로 수업을 듣거나 애초에 법을 배우고자 하는 의지는 증발해 버리니, 어떻게 하면 재밌게 배울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많이 했다.
거창하지도 않은 이 내용을 거창하게 보이려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애초에 논문을 쓸 지식과 학식도 없는 주제에 억지로 쓰려고 하니 쉽게 될 턱이 없었다.
과 사무실에 가서 논문 작성 요령을 받아 머리를 긁어가며 작성을 했다.
밤새도록 인터넷을 찾아가며 본문보다 거대한 각주들을 달아가며 글을 써젖혔고, 과 사무실로부터 각주와 서체, 구성 등을 지적받아 가며 약 11번에 퇴짜를 먹어가며 장장 26페이지에 달하는 논문 '민법 교육의 문제점과 민법 교육의 발전방향'이라는 것을 완성해냈다.
논문이 우여곡절 끝에 완성되었지만 임관시험이 남아있었다.
지방대학교에서 학군단이 인기가 많았던 시절과는 다르게 점점 하락세를 타고 있던 시절이었나 모르겠다만, 장기 복무를 시키기 위해서 인질극을 많이 했던 기억이 난다.
장기 복무를 한다면 무려 학비를 지원해 주겠다.
시험이나 가산점이 붙는 상황에서는 장기 복무자에게 양보해라라는 웃기지도 않는 소리들이 심심찮게 나왔던 터라 5만 촉광의 다이아몬드의 빛도 많이 바래져가고 있었다.
학군단 생활을 꽤나 적극적으로 하고 있었던 내 모습이 학군단 동기들에게는 당연히 장기 복무 희망자처럼 보였는지도 모르겠다만, 열심히 하는 이유는 딱히 큰 게 아니라
내 책임을 다하고 싶었다.
맡은 일은 최선을 다해서 하고, 2년간 멋진 장교로 생활하고 전역하는 게 내 꿈이었다.
비록 후보생 생활 오랜 목표였던 특급전사는 특등사수를 놓쳐서 되지 못했지만, 체력도 준수했고 임관 시험도 하찮게 볼 생각이 없었다.
성격상 객관식 시험에 불이 붙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자신은 없었지만 임관을 못 하게 되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기에 굉장히 열심히 공부를 했었다.
결과는 당연한 합격.
하지만 임관 일이 다가오자 군 생활 내도록 따라다닐 군번이 부여가 됐는데
....?
4천 명 가까이 되는 동기들 중에 거의 꼴등에 가까운 번호였다.
처음에는 그저 임관시험 잘 못 봤나?라는 생각이었지만, 굉장히 몹쓸 장난질이 있었다는 것은 꽤나 후에 알게 되었다.
자치 근무자 공로를 인정받아 임관식에서 받아야 할 표창도 장기복무자에게 양도된 사실을 알았을 때는 화가 났다기보다는 그래 다 가져가라 이런 생각뿐이었지만 알게 모르게 뒤가 구린 것들을 보고 나니 언짢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임관을 하기에 앞서 장교들은 병과를 부여받는다.
사실 내가 경찰이 되고 싶었던 탓에 헌병을 1순위로 지원하고 싶었지만, 육군의 꽃은 역시 전차를 모는 기갑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을 무렵이었다.
학군단 선배 중에 정말 잘 따르던 선배가 있었다.
엄격하기만 했던 선배들 중에서도 부드러우신 분이었고, 성실함이 기본에다가 학업적으로나 업무적으로도 우수했고 배울 점이 많았던 분이셨던지라 정말 좋아하고 잘 따랐던 선배였다.
나는 당연히 이 선배는 통신이나 탁월한 데스크 업무를 발휘할 정훈 같은 병과를 지원해서 갈 것 같았는데 정말 너무나 의외로 특전사에 지원을 해서 간 것이었다.
휴가를 나온 선배는 옛날과는 다르게 팔이 근육으로 커져있었고, 라식수술은 언제 하셨는지 푸근하게 끼고 계시던 안경은 증발한 채로 사나운
눈빛을 장착하고 나를 호출하셨다.
특전사 부대를 배치받기 전까지 여러 교육을 받았던 이야기를 듣는데, 듣다가 기절할
것 같은 이야기들이 몇 개나 있어서 차마 선배를 따라가겠단 말을 하지 못했다.
열기구에서 낙하산을 매고 뛰어내렸다느니
20kg 군장을 매고 20km를 뛰었다거나
기본 체력검정이 5km라는 둥
내가 알던 상식 밖의 얘기들이 오가서
원래도 정말 멋있단 생각을 많이 했던 선배였고,
이상하게 그 선배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가 않았다.
놀이동산 같은 곳에 가도 익스트림한 놀이 기구는
질색팔색을 하는 데다가, 잠이 많고 게을러서
특전사처럼 익스트림한 곳은 나와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여느 때처럼 단복을 입고 학군단을 오가는데
친하게 지내던 후배가 한마디 던지는데
선배님 당연히 특전사 지원하셨지 말입니다?
이 미친놈은 뭔 소리 하는 거냐
너나 많이 가라라고 분명히 말한 것
같았는데 내 입에선 이상한 네 글자가 튀어나가고 있었다.
당연하지
남자의 허세는 병인가 아닌가를 논하자면 끝이 없겠지만,이상하게도 그날은 특수전 교육을 받았다며 주말에 외박을 나왔던 그 선배가 공수 마크가 박힌 멋들어진 모자에 소위 계급장과 내 이름을 붙여서 나에게 선물을 해주셨다.
많은 의미가 깃든 것 같았지만 차마 외면할 수 없는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