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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일만 Oct 08. 2022

1917 가장 어리석은 전쟁 9


홀로코스트     

 

1차 대전은 이전의 전쟁과 여러모로 다른 양상이었다. 20세기 첫 세계 대전에는 갖가지 신무기가 선을 보였다. 탱크와 잠수함, 전투기, 독가스 등 대량 살상무기들이 쏟아졌다. 그 중에도 참호와 철조망, 기관총은 악마의 3형제로 불리며 군인들을 괴롭혔다. 

군인들은 쥐와 악취로 가득 찬 참호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공격 명령이 떨어지면 적의 참호를 향해 달려 나갔다. 하지만 목적지에 이르기 전 대부분의 군인들은 기관총에 막혀 더 이상 전진을 할 수 없었다. 그로인해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다. 

운 좋게 상대의 참호까지 도달한다 해도 철조망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사이 죽긴 마찬가지였다. 그런 무모한 전투가 되풀이 되는 사이 ‘노 맨스 랜드’에는 점점 희생자만 쌓여갔다. 

독가스 역시 많은 사상자를 만들어냈다. 독가스를 처음으로 개발한 사람은 유대인 과학자 프리츠 하버다. 그의 삶은 20세기의 아이러니 중 하나다. 하버는 질소를 정제해 비료를 만들어냈다. 인류의 식량문제 해결에 크게 공을 세워 1918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조국 독일을 사랑했다. 기꺼이 자신의 이론을 응용해 살상무기 독가스를 제조했다. 그것이 자신과 인류에게 가져다 줄 비극에 대해선 전혀 짐작하지 못한 채. 자신이 만든 독가스는 곧 이어 벌어진 2차 대전서 600만 유대인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들은 다름 아닌 하버의 동족들이었다. 

2차 대전 유대인 학살은 홀로코스트(Holocaust)로 불린다. 어원은 그리스어 번제에서 나왔다. 희생 제물을 불에 태워 그 향기로 제사를 드리는 의식을 말한다. 유대인 학살을 번제라고 표현하기엔 끔찍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쇼아(Shoah)’라고 부른다. 히브리어로 ‘재앙’을 의미한다. 그 쪽이 나은 것 같다. 

하버는 2차 대전 유대인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했다. 그곳에서도 하버는 환영받지 못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손가락 짓을 받았고 결국 스위스에서 쓸쓸히 죽었다. 


그의 비극은 단두대의 발명가 조세프 기요틴과 자신이 만든 법에 의해 사형 당한 진나라 재상 상앙을 연상시킨다. 기요틴은 단두대의 희생자로 알려졌고, 이목지신(移木之信)의 상앙은 스스로 그 법의 피해자가 됐다.

상앙의 경우 절로 쓴 웃음이 난다. 상앙은 법을 신봉했다. 하지만 법을 만들어 봤자 백성들이 지키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었다. 상앙은 성의 남문 앞에 나무기둥 하나를 세워 놓고 “이것을 북문으로 옮기는 자에게 상금을 주겠다”고 공고했다. 

아무도 이 터무니없는 지시를 믿지 않았다. 그처럼 쉬운 일에 돈을 주다니. 하지만 상금을 대폭 올리자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을 한 사람이 이를 시행했다. 상앙은 공고대로 그에게 상금을 내렸다. 

이후 사람들은 너도 나도 법을 따르게 됐다. 10년이 지나자 길에 돈이 떨어져 있어도 아무도 줍지 않게 됐고, 도둑들이 사라졌다고 한다. 나무 옮기는 일(移木)을 믿게 만들었다 하여 이목지신이라 부른다.      

     

 전쟁의 결과     


302일 동안 치러진 베르뎅 전투는 무의미하게 끝났다. 억울한 희생자만 잔뜩 남겨두었을 뿐이다. 그런 중에도 세상은 변했다. 1차 대전과 함께 일어난 러시아 혁명도 그 가운데 하나다. 

1917년 10월 25일 레닌의 볼셰비키는 소비에트(프롤레타리아 독재정권의 권력 기관) 혁명에 성공했다. 볼셰비키는 12월 독일과 휴전 협정을 맺고 전쟁에서 빠졌다. 대신 1922년 10월까지 적군과 백군으로 나누어져 치열한 내전을 벌였다.  

무너진 것은 러시아 제국뿐 아니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오스만 제국도 역사의 뒷무대로 사라졌다. 미국의 참전 이후 오스만과 오스트리아가 항복했다. 독일에는 노동자 파업이 일어나 온 나라가 혼란스러웠다. 

황제는 네덜란드로 달아났고, 독일은 마침내 공화정을 도입했다. 1918년 11월 11일 독일은 연합군과 휴전에 합의했다. 사실상 패전이었다. 연합국은 베르사이유 조약을 맺어 1320억 마르크라는 천문학적 배상금을 부과했다. 독일의 재무장을 막기 위해서다. 

독일은 알사스-로렌 지방을 비롯한 영토의 25%를 잃었다. 육군의 수는 10만 명으로 제한됐고, 전투기와 잠수함 보유 금지, 전함을 6척을 초과하지 못하는 등 굴욕적 제한은 나중에 히틀러라는 변종을 만들어냈다. 인류를 또 한 번의 세계 대전으로 이끄는 도화선이 됐다. 

히틀러는 땅에 떨어진 독일의 자존심과 치솟는 물가로 인한 고통에 시달리던 국민들의 마음을 교묘히 파고들어 집권에 성공했다. 독일을 궁지로 몰아넣으려던 프랑스의 과도한 압박은 2차 대전이라는 또 다른 비극을 초래했다.      


1차 대전은 국가 총력전이라는 새로운 전쟁 양상을 보여주었다. 이후로 전쟁은 기관총, 전투기, 독가스, 탱크, 잠수함 등 대량 살상 무기의 등장으로 더 많은 사상자를 내기 시작했다. 그 결정판이 2차 대전의 끝을 알린 원자폭탄의 개발이었다. 

종전 후 UN의 전신인 국제연맹이 만들어졌으나 2차 대전을 효과적으로 막아내진 못했다. 프랑스와 영국은 임의대로 중동을 나누어 가졌다. 프랑스는 신탁 통치 방식으로 시리아를 차지했다. 기독교도를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시리아에서 레바논을 별도로 떼어냈다. 

영국은 오스만 제국 영토의 한 부분에 이라크라는 나라를 만들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잘 알려진 영국군 장교 토마스 로렌스와 가까운 파이살을 왕으로 삼았다. 

시리아를 또 한 번 쪼개어 요르단이라는 이름으로 파이살의 형 압둘라에게 선물했다. 유럽 열강이 임의대로 나누다 보니 부족과 종파(특히 수니와 시아파)가 뒤섞여 잦은 내전의 원인을 제공했다. 

이븐 사우드가 메카를 공격해 사우디아라비아를 세우자 영국은 그를 지지했다. 영국은 이집트를 독립시켜주는 조건으로 군 병력의 상주와 수에즈 운하 운영권을 계속 보장받았다. 

정작 문제는 팔레스타인 지역이었다. 1차 대전 당시만 해도 이곳 주민의 90% 가량이 아랍인이었다. 2차 대전 동안 유럽에서 유대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유대인은 2천 년 전 자신의 땅에 이스라엘을 건국했다.  

1917년에 출생한 영국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1차 대전을 전후한 시기를 ‘파국의 시대’라고 정의했다. 영화 ‘1917’에서 한 영국군 장교는 “이 전쟁이 끝나려면 모든 사람이 죽어야 한다(Last man standing)”고 절규했다. 파국의 시대는 수많은 희생자를 만들어냈다. 

끝으로 1차 대전을 다룬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의 자막을 소개한다.     

 

이 이야기는 고발이나 자백이 아니다. 모험담은 더욱 아니다. 왜냐하면 죽음에 직면한 사람에게 죽음이란 모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포탄을 피하지 못하고 전쟁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그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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