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어주고 비우는 계절
미루고 벼루다 어느 날 드디어 캐기로 작정하고 집 뒤쪽 사과나무사이로 한고랑 심어놓은 고구마 밭으로 나가 선뜻 시작은 못하고 우두커니 바라보고 서있었다
일기예보를 보니 오전오후 다 비소식이 있다. 한두 방울 후드득 떨어져도 비가 온다는 예보는 맞는 것이니까. 우중충한 하늘을 올려다보고 다시 집 앞 정원으로 내려와 잔디밭을 서성이며 또 망설였다. 캐다가 비가 쏟아지면 비 맞은 고구마는 금방 상할 텐데, 그러나 일단 캐기로 마음을 정하고 작년에 뒤 집 영자언니가 가르쳐 준 대로 일단 고구마줄기를 걷어 젖히기 시작했다. 낫을 찾아들고 조심조심 줄거리를 제쳐 잡아당겨 한쪽으로 무져 놓았다. 아직도 줄기와 잎은 싱싱했다. 고구마 순으로 만든 반찬을 좋아했던 남편은 고구마를 먹기보단 순을 먹기 위해 해마다 한 고랑씩 고구마를 심곤 했는데 나도 습관적으로 오월이면 고구마를 안 심으면 마음이 허전하고 꼭 무엇인가 놓친 것 같아서 그가 없어도 이태 째 이렇게 고구마를 심고 있다. 밑에 거름을 깔고 비닐을 씌운 후 정작 심어놓고는 자라는 모습을 바라만 볼 뿐이지 나 혼자서는 한 번도 고구마 순을 따서 반찬 같은 걸 해 먹지 않았다.
일머리가 서툴러 호미 날로 자꾸 고구마를 찍든가 흠집을 내면서 4시간이나 끙끙거린 끝에 수확을 마쳤다. 아침 겸 점심을 먹고 12시가 거의 되어 시작을 했었는데 수확한 고구마를 지금은 비어있는 차고에 차곡차곡 늘어놓고 들어오니 4시가 다 되어있었다.
오후 5시에 마을 부녀회에서 저녁식사모임이 있다고 했기에 서둘러 씻고 채비하고 집을 나서는데 벌써 이장님 차가 집 마당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일 년에 한 번씩 열리는 우리 마을 삼굿축제 때 부녀회 부인네들이 고생 많이 했다고 김삿갓 마을 계곡의 멋진 양식집에서 색다른 식사를 대접한다는 것이었다.
식사 후 디저트 티타임에 자연히 고구마 캐기 이야기가 나왔는데 저마다의 고구마 캐기와 겨울 동안 보관방법에 대해 겪었던 사소한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어떤 부인은 누군가가 아이스박스에 뚜껑까지 덮으면 잘 보관된다고 하여 그렇게 포장해서 현관에 놓아두었는데 어느 날부터 자꾸 썩은 내가 나고 해서 뚜껑을 열어보았더니 거의 썩어 물로 변했다고 했고, 또 어떤 부인은 보일러실에 박스에 잘 담아 보관했더니 봄까지도 생생했다는 얘기, 또 다른 부인은 연탄창고에 보온재를 잘 덮어 보관했는데 겨울에 얼어서 버렸다는 얘기, 나는 집 이층 끝 방에 종이박스에 신문지 몇 장씩 깔고 켜켜이 보관했었는데 3월이 되니 반은 썩고 반은 그대로 있었다고 부인들의 고구마얘기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또 이어졌다.
운전기사 겸 따라왔던 이장님은 고구마얘기 나오기 전 식사 마친 후 여인들끼리 편히 수다의 모임이 되라고 먼저 차에 가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부인네들은 이 사실을 깜빡하고 차와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에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최근에 마을에서 불의에 세상 떠난 분이 두 명이나 된다고 자연히 그쪽으로 이야기의 방향이 바뀌었는데 매일 술기운에 사는 여든셋쯤 된 한 노인이 어느 날밤 술에 만취하여 밖으로 나간 뒤 다음날 아침까지 돌아오지 않아 집의 노부인이 이장님께 얘기했고 이장님이 경찰에 실종신고를 해서 온 마을을 샅샅이 살핀 결과 마을길 옆 하천에서 발견된 노인은 이미 사망상태였다고 했다. 실족사로 처리된 것 같다고 이장님 부인이 얘기했다.
또 혼자서 살면서 매일 맨발로 신발은 손에 들고 마을길을 배회하던 어떤 사내는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 밤에 집 지붕에서 물이 새서 그것을 수리해 보려고 높은 곳에 올라갔다가 떨어져서 방으로 들어와 누웠는데 그대로 방치되어서 사망했다고 어떤 부인이 이야기했다.
어느 날 밤에 불빛 번쩍거리며 그 집 옆 마을길에 주차 되어 있던 여러 대의 경찰차들이 그래서 왔었구나, 하며 한 번도 얘기에 끼지 않던 조용한 부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수다 떠는 바람에 밖에서 기다리는 이장님 생각을 못했다고 후다닥 다들 일어나 그만 나가자고 했는데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부인들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요즘 마을 아저씨들이 버섯을 캐러 간다며 산으로 다니는데 우리 동네 누군가가 뱀에 물려 치료받고 있다고 하는데 누군지 모르겠다는 이야기였다. 보통 뱀에 물렸다고 표현하는데 이 마을 부인들은 뱀에 깨물렸다는 표현을 썼다. 한 부인이 처음에 깨물렸다는 표현을 써서 그 부인만의 특이한 표현인 줄 알았는데 말을 받는 다른 부인들도 깨물렸다는 표현을 쓰고 있었다.
집들에서 고구마를 캘 때 걷어낸 고구마줄기들은 염소를 키우는 마을의 한 아저씨가 돌아다니며 트럭으로 수거해 가는데 한 부인이 제일 늦게 캔 우리 집의 고구마줄기는 고구마 순을 필요한 만큼 다듬은 후에 가져가게 하겠다고 했다.
나와 영자언니 자매가 셋이서 사과나무 밭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고구마 순을 다듬고 있는데 마을 어떤 아저씨가 부인들을 보며 인사하기에 어딜 가냐고 물으니 옆집아저씨와 함께 산에 버섯을 따러 간다고 했다. 요즘 산에 송이가 많이 나온다는데 많이 따오세요 하며 인사하는데 자연히 송이버섯에로 이야기가 옮아갔다. 같이 산행을 하는 사람들끼리도 송이버섯 있는 곳은 절대로 알려주지 않는다는데 산에 들어가서도 형님 몇 시까지 여기서 만나요 한 후 서로 헤어져서 버섯을 찾아다닌다고 했다.
1kg에 백만 원을 호가하던 송이가 최근에 많이 나오는지 30만 원선까지 가격이 하락했다고, 어느 산에 다니는 부부가 운영하는 닭집에서는 최근에 요리에 송이버섯도 쓱쓱 넣어준다고 하면서 목청 큰 영자언니 여동생이 그 닭집에 먹으러 한번 가야겠네 하면서 이야기판에 추임새를 넣는다.
잠깐 우리 집안으로 들어와 따뜻한 차 한 잔씩 마시며 부인들은 방방마다 걸려있는 내 남편의 그림을 보며 그쪽으로 대화를 이어나간다. 어쩌면 이렇게 사람을 똑같이 그릴 수가 있냐며 아저씨가 매일 침대에 누워서 마누라 초상을 바라보며 잠들었다는 둥, 아저씨가 마누라 고생 안 시키려고 어느 날 불쑥 가셨다는 둥, 나도 이제 언제 어떻게 죽을지 생각하면 슬프다는 둥 부인들의 수다는 끝이 없었다. 한 부인이 더 수다 떨 새가 없다고 노인회장님이 총각무김치를 담가 달라고 부탁했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냐고 하며 황급히 먼저 나간다.
모닥불을 피우진 않았지만 우리 부인들은 모이면 이렇게 할 이야기가 끝이 없는듯한데 잘난 사람의 이야기는 TV속 프로그램이나 어려운 책들에서 수없이 듣고 볼 수 있지만 마을 부인들과의 이야기는 그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꾸밈없이 소박하고 간결한 우리 모두의 살아가는 생동한 이야기여서 좋다.
인생은 연기 속에 재를 남기고 말없이 사라지는 모닥불 같은 것이라고 노래에도 있듯이 부인들과의 이야기 속에 나와 그들의 삶이 생생히 담겨 있고 그 이야기가 있어 우리는 서로 살아있음을 느끼고 먼저 떠난 사람을 맘 아픔 없이 추억하고 있어서 좋다.
봄부터 여름내 가으내 품어온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계절, 그래서 다 내어주고 비우고 서서히 헐벗으며 겨울을 마중하는 계절, 이 계절에 나도 수북이 쌓인 내 마음의 화(火) 한 것들을 내려놓고 비우며 부인들의 대화처럼 간결한 것들만 남겨놓으려 한다.
그네들이 저마다의 일로 자기 집으로 돌아간 뒤 나는 집 뒤쪽 밭을 서성이다 전지가위를 들고 와 이제는 누렇게 말라가고 있는 작약의 밑동아리를 잘라주었다.
2023년 10월 15일 신관복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