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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관복 Apr 04. 2024

綠山

6. 압록강 건너 고향 평양으로

  2006년 2월 남편과 아들 그리고 나는 북중철교를 넘은 지 약 2년 만에 베이징발 평양행 국제열차를 타고 평양으로 향했다. 일흔이 훌쩍 넘으신 시부모님의 칠순잔치를 차려드리고, 가족친지들과 회포도 나누고, 오랫동안 보지 못한 평양의 산천도 보고, 내 고향의 공기도 흠뻑 마셔보고 하는 것이 이번 평양으로 가는 우리 가족의 여행목적이었다. 여행목적이라고 하니 말이 좀 어긋나는 것 같은데, 고향으로 가는 이유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평양행 열차표가 끊어지자 나는 며칠 동안 단동시내를 분주히 다니며 집으로 갈 준비를 했다. 시간이 촉박했다. 우선 시부모님이 진갑잔치에 입으실 옷부터 맞추고, 잔치 상에 올릴 일체의 과일과 음료, 그리고 당과류들을 준비하느라 동분서주했다. 또 평양의 가족친지들의 선물도 마련해야 했다. 약 2년 만에 돌아오는 나와 남편의 손을 쳐다볼 사람들이 수다했고 아들의 담임선생님과 학급 친구들까지 신경을 써야 했다. 백화점과 대형마트, 한복집, 의류가게들에서 구입한 물건들을 모두 단동역 앞의 친숙한 과일가게로 집결시켜 가게주인더러 열차출발시간에 맞춰서 화물상차를 해달라고 부탁하고 우리 가족은 평양행 국제열차에 승차했다. 남편은 승차하면서 무슨 짐이 이렇게 많은 거냐고, 어디 피난이라도 가는 가고 나에게 화를 냈다. 나는 어디 평양에 가서 보자고, 거기 가면 이렇게 싱싱한 과일이나 당과류, 음료들이 있냐고, 있다면 어차피 이쪽에서 물 건너간 것들이겠는데 기왕 열차 타고 가는 거 다 끌고 가면 좋을 거라고 배짱으로 맞받았다. 

  

  분주하고 소란스러운 단동역을 출발해 열차가 북중철교를 건너 신의주역으로 들어섰다. 세관원들이 객실을 돌며 여권과 휴대하고 있는 짐들을 샅샅이 검사했다. 한 여성세관원이 나를 보고 잠깐 나와 달라고 했다. 이미 차대표부인에게 들은 것이 있는 터라 잠자코 그녀의 뒤를 따라 객실과 객실사이의 컴컴한 장소에 멈춰 서서 핸드백 속 지갑에서 100위안짜리 몇 장을 아무런 말없이 그녀에게 건넸다. 무표정으로 돈을 받아 넣은 그녀는 평양에 잘 다녀오라고 돌아올 때 뵙겠다고 말하고 다른 곳으로 갔고 나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내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네들은 부부가 같이 앉아있는데 꼭 여자만 따로 불러 이렇게 돈을 요구할까. 기적소리 울리며 기세 좋게 출발하는 열차 안에서 쓸쓸한 마을과 50년대에 머물러 있는 산촌을 차창 밖으로 바라보며 이 이유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으나 답은 없었다. 2월이라 해는 짧아 벌써 어둑어둑해오고 있는 차창 밖으로 달구지를 몰고 마을로 돌아가는 농부들과 꼬질꼬질한 머릿수건을 두르고 배낭을 짊어지고 황톳길을 걷는 초라한 여인들이 드문드문 보였고 멀리 황량한 야산들의 꼭대기에는 눈이 허옇게 덮여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갈수록 어두워졌고 차창 밖 온 세상이 불빛 하나 없는 캄캄한 세상으로 변했다. 평양으로 간다고 좋아라 차창 곁에 붙어 앉아서 밖을 내다보던 아들이 우리나라는 왜 이렇게 불빛이 없냐고 시무룩해서 말했다. 나는 아들을 그냥 안아주며 이제 평양에 도착하면 거기는 환할 것이라고 나직이 말했고 우리 셋 다 눈을 감고 어서 평양역에 도착하기만을 바라며 기차바퀴가 레일을 구르는 소리만 들으며 앉아있었다.

  

  저녁 7시가 넘어서 열차가 평양역에 도착했다. 분주한 안내방송과 사람들이 짐을 꾸려 객실에서 내리는 소리가 소란한 가운데 나는 아들과 차창 밖부터 내다보았다.  아, 평양으로 왔구나, 하는 안도의 마음을 느끼며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집 나갔던 나그네가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마음이 이런 것인가. 그래도 평양역은 형광등 불빛과 네온사인으로 부옇게 밝았다. 남편회사에서 미리 보내온 트럭에 화물들을 꾸역꾸역 실어 집으로 보내고 우리는 따로 보낸 승용차에 올랐다. 평양역까지 마중 나오신 시아버님이 맏며느리 목소리 2년 만에 들어본다고 제일로 반가워하시며 나를 안아주셨다. 사방 옥타브 높은 이국말소리만 들리던 단동을 벗어나 지금 평양에 와있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우리를 안산동 아파트 앞에 내려주고 남편은 총사장을 만나러 간다고 차를 돌려 회사로 향했다. 우리 집 아파트 경비실에는 저녁시간인데도 경비원이 있었는데 같은 아파트 주민인지 나를 아는 체했고 나는 목례를 하며 3층 우리 집으로 나는 듯 올라가 드디어 내 집 출입문을 열었다.  현관문 바로 앞에 서계시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왔니? 하시는 시어머니 손을 잡고 잘 계셨어요? 나도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형광등 밝은 불빛에 본 시부모님은 그사이 많이 늙으셨고 조카들은 폭풍성장을 해서 누이의 큰 조카가 대학생이 되어 있었다. 내 남편과 동갑인 누이 남편은 안쓰럽게 살이 빠져있어서 큰 형님처럼 보였고 쑥스럽게 형님! 하며 주방에서 나오는 동서도 하얀 얼굴이 많이 야위어 보였다. 아들은 사촌들과 신이 나 이방 저 방 왔다 갔다 큰 소리로 뛰어다녔고 어른들은 서로 손잡고 인사할래, 짐들을 베란다와 창고로 끌어들일래, 그야말로 온 집안이 경사스러웠다.

  

  이틀 후에 부모님 진갑잔치를 거행하기로 하고 나는 남편과 다시 준비에 몰두했다. 상에 놓을 과일이나 당과류, 음료들은 단동에서부터 다 가지고 와서 문제없는데(이 대목에서 나는 남편에게 그거 보라고, 이것들 다 끌고 오길 잘했지, 이러면서 으스댔다.) 떡이랑 나물반찬 등 잔치음식들, 그리고 손님접대용 주류들을 두루 마련해야 했다. 평양에서 제일 크다고 하는 락랑구역에 있는 통일시장으로 장 보러 갔는데 나는 너무 많은 사람들과 너무 분주하고 소란스러운 시장의 분위기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남편이 뒤에 있어서 소매치기는 걱정을 하지 않았는데 외화를 바꾸라고 달라붙는 여인들의 속살거림에 도대체 얼마를 어떻게 주고 바꿔야 하는지 통 계산이 되질 않아서 쩔쩔매다가 겨우 원화로 바꾸기를 마치고 장을 보기 시작했다. 그때 미국달러 100$ 당 원화 30만 원이었다. 내가 출국하기 전 한 달 월급이 3천 원이었던걸 생각하면서 나는 외화의 가치가 이렇게 올랐는가 속으로 깜짝 놀라며 이 30만 원으로 원하는 음식재료들을 다 살 수 있을까 하는 조바심을 가지고 와글와글 하는 시장 속을 누볐다. 아무리 사회주의계획경제가 시행되고 있는 북한이라고 했지만 이 시장은 자본주의 시장통이었다. 정말 사람들 말대로 고양이뿔 내놓고 다 있었다. 돈만 있으면 신선한 소고기와 채소들, 원하는 일등품의 식재료들을 마음껏 살 수 있었고 이런 특등품의 식자재들이 도대체 왜 이렇게 시장에서만 비싸게 유통되는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원하는 식재료들을 이것저것 다 사고 물건이 너무 많아 어떻게 이걸 가져가게 포장 좀 해달라는 나의 요청에 소고기 장수가 어떤 하얀 마대자루에 물건들을 담아주었는데 마대바깥쪽에 “대한민국”이라는 글씨가 커다랗게 찍혀있었다. 나는 놀라며 이런 마대 사용해도 되냐는 눈초리로 상인을 쳐다보았는데 그 남자가 걱정 말라며 남쪽에서 보내준 쌀이 이 시장에서도 야미가격으로 유통된다며 되려 그것도 모르는 당신은 어디서 왔냐는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평양의 중심은 좁아터져서 집으로 돌아가려고 내가 없는 사이 새로 생긴 듯 시장밖에 즐비한 택시를 신기하게 바라보다 잡은 택시의 기사가 대학교 동창이었다. 남편과 내가 그 동창의 얼굴을 마주 보며 허구프게 아니, 반갑게 손 맞잡으며 인사를 나누고 택시에 올라 남편은 통일시장 근처의 사옥으로,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택시에서 내리며 굳이 안 받겠다고 사양하는 택시비 3불을 강제로 그 남자동창의 운전석에 놓고 내렸다. 아파트를 오르며 허구픈 마음, 촉망받던 수재가 택시기사라니, 아니 그럴 수밖에, 3천 원 월급 받아서 도저히 생계를 이어나갈 수 없겠지, 수재가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 택시기사가 100배 낫다고 생각했다. 회사에서 돌아온 남편이 그날 저녁 온 가족에게 주의를 당부했다. 우리 가족이 기쁘고 행복하다고 너무 소란스러워 이웃들과 지인들에게 폐가 되지 않게 조심하자고. 지방만 그런 것이 아니었고 평양도 밤바다 툭하면 정전이어서 그런대로 우리 가족은 식탁 위에 촛불을 밝히고 미처 못 나눈 이야기로 밤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다. 그래도 좋았다. 캄캄한 세상이라도 가족들과 이렇게 밤새워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것이, 널찍한 주방에서 시누이 동서와 함께 식구들 식사를 준비하면서 옛날얘기 하다 와하고 웃음이 터지는 것이 너무 좋았다. 시부모님, 우리, 동서네, 시누이네 도합 12명 되는 온 집안 식구들이  각각 한방씩 차지하고 시누이네는 거실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평양에 도착한 다음날은 이렇게 지나갔다. 잠자리에 누워 엄마가 없는 친정을 생각했다. 오빠가 외국출장 중이어서 형님과 조카딸만이 덩그렇게 있을 통일거리의 오빠네 집을 생각하며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치락거렸다. 이번에 오빠를 만나지 못하면 언제 만날 수 있을까? 영영 못 만날 것 같은 이 섬뜩한 생각은 또 무엇인가?      


2024년 4월 4일 신관복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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