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을 견디며 1

시련을 견디며 1

by 김효숙

'살아있음이 희망이다.'

외할머니는 열여섯 살 어린 나이에 결혼해 어머니를 낳았다. 그러나 어머니가 백일도 되기 전에 외할아버지는 장에 다녀오시다 길에서 갑자기 쓰러져 세상을 떠나셨다고 한다.

그때부터 외할머니는 청상과부가 되어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막막한 내일을 감당해야 했다. 슬픔과 두려움이 한꺼번에 몰려와 목에서 불덩이가 치밀어 오르는 듯한 고열과 통증에 시달리며, 자신도 곧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눈앞의 아기를 생각하니, “부모가 모두 떠나면 내 아이는 어떻게 살까?” 하는 절박한 마음이 솟구쳤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살아야 했다. 그래서 한약과 조약을 써보고, 무당굿까지 하며 백방으로 몸을 살리려 부단히 애썼다.


병세가 깊어져 희망이 꺼져가던 어느 날, 한 선교사가 찾아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을 전했단다. 그 말씀이 불덩이 같던 마음에 생명수처럼 스며들었고, 뜨거운 열이 가라앉으며 몸이 서서히 회복되었다고 한다.


기운을 차리신 외할머니는 어머니를 업고 10리 밖 교회까지 새벽예배에 빠짐없이 나가셨고, 그 길로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셨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말엽, 시골교회에도 신사참배 강요가 거세졌다. 거부하면 투옥당하고 교회는 탄압받았다. 어린 딸을 두고 감옥에 갈 수는 없었고, 생명을 구해주신 예수님을 배반할 수는 더욱 없었다. 결국 외할머니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어린 딸과 함께 만주로 떠났다.


만주에서 외할머니는 전도부인으로 헌신하며 복음을 전했고, 어머니는 소학교((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일제 강점기 만주 소학교(초등학교)에서도 학생들은 일본어만 쓰도록 강요받았다. 교실 안에서 조선말이나 중국어를 쓰면 체벌이나 벌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외할머니는 “공부를 잘해서 훌륭한 선생님이 되어 우리나라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집에서 일본말을 연습하면 “우리 민족을 핍박하는 일본인 말은 쓰지 말라”며 호되게 꾸짖었다.


학교에서는 일본어를 더듬거려 혼나고, 아이들에게 놀림받았습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아침마다 배가 심하게 아파 학교에 가지 못하겠다고 했지만, 외할머니는 꾀병이라며 야단치고 억지로 학교에 보냈다.


배도 아프고 집중도 안 되어 공부를 따라가지 못해 뒤처졌지만, 어머니는 운동회 달리기에서라도 인정받고 싶었다. 그러나 끝까지 따라오는 아이를 이길 수 없어 양팔을 벌려 진로를 막았다가, 선생님께 혼나고 벌을 받았다.


어머니는 학교 가기가 너무 힘들어 어느 날 강가로 발길을 돌렸다. 그곳에서 누군가 강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고, 옷을 벗어 두고 강바닥으로 잠수하듯 다가가 그 사람 발을 붙잡고 강밖으로 밀어내어 슬기롭게 사람을 살려냈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사람을 살리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부하며, 이후 아이들의 놀림이나 꾸중에도 굴하지 않고 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그러던 중 12살이던 그해, 만주에 장티푸스가 유행했다. 전도부인이셨던 외할머니는 병든 이들을 찾아가 문병 기도도 해주시고, 중환자 곁에서 밤을 새워 간병을 하셨다. 그 정성 덕분에 한 처녀 환자는 기적처럼 건강을 되찾았지만, 정작 할머니께서 병에 감염되어 상태가 악화되었고 끝내 회복하지 못하였다. 운명 직전, 교인들이 찾아와 예배를 드리던 중 한 성도가 눈물로 애원했다.

“언니, 딸을 혼자 두고 가면 어떡해요. 살아야 해요…”

외할머니는 마지막 힘을 다해 어머니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는 이제 하나님이 계시잖아. 하나님께 맡긴다…”

그 말을 남기고 1944년 2월, 만주의 한 오두막집에서 눈을 감으셨다. 할머니의 장례는 동토의 만주 벌판에 그냥 관을 놓고 떠나야 했던, 참으로 서러운 이별이었다.


어머니는 13~14살의 어린 나이에 홀로 남아, 1945년 8월 해방 후 송환 동포 무리에 섞여 고향 땅을 밟았다. 그때 어머니가 등에 지고 온 것은 외할머니가 남겨둔 비단 베 한 다발뿐이었습니다.


결혼 전까지 어머니는 큰집에서 지냈다. 외삼촌은 이미 장가를 들었고, 부엌일은 외숙모와 큰외할머니가 맡았기에, 밭일과 소먹이는 일을 도맡아 머슴아이처럼 억세게 자라났다.


18살이 되던 해, 일본에서 귀환한 한 청년―훗날 저희 아버지―과 어머니는 첫 선을 보게 되었다.

할머니는 어머니를 보자마자 눈빛이 초롱초롱하고 영민해 보인다며 한눈에 들어 마음에 두셨다. 파평윤씨 양반댁 며느리로 손색없다 생각하신 할머니는 서둘러 혼인을 밀어붙였다.


할머니는 “이 지상에서 최고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완벽한 배필이 될 것이라는 큰 기대를 품고 계셨다. 그러나 청소년기를 머슴아이처럼 거칠게 보내느라 집안일을 배울 기회가 없었던 어머니는, 시집와서 처음 해보는 설거지와 밥짓기를 서툴게 할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의 기대와는 달리 집안일이 제대로 되지 않자, 어머니의 시집살이는 혹독해졌다. 부모 없이 자랐다는 이유로 모멸감을 주며, 심지어는 함께 식사조차 하지 못하게 하고 굶기기도 했다.


어머니는 씩씩한 성격 덕분에 버텨보려 했었다. 부모 없는 친정으로 실패자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견디셨지만, 어린 나이에 겪는 설움은 너무도 깊었다. 결국 낙동강으로 향해 “차라리 모든 고통을 끝내자”는 생각으로 강물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눈물이 앞을 가려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본 순간,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그녀를 비추었고, 그때 외할머니의 마지막 말씀이 마음속 깊이 울려 퍼졌습니다.


“○○는 이제 하나님이 계시잖아. 하나님께 맡긴다…”

그 말씀이 생생히 들려오자, 어머니는 생각하셨습니다.

‘맞아, 우리 엄마가 나를 하나님께 맡겼는데… 내가 왜 죽으려 하지? 하나님이 도와주실 텐데.’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어머니는 물살을 헤치고 나와 주먹을 불끈 쥐며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배 속에서 작은 생명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아이가 바로 저희 첫째 오빠다.


시련은 멈추지 않았다.

1950년 4월, 어머니는 아버지와 결혼했지만 불과 두 달 뒤 6월 25일, 한반도를 집어삼킨 전쟁이 터졌습니다. 그해 7월, 아버지는 아내가 이미 새 생명을 품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징집되어 전장으로 향했습니다.


먹을 것도 변변치 않은 극심한 굶주림과 심한 마음고생 속에서, 어머니의 몸은 무너져 임신중독증에 걸렸다. 산모와 태아 모두가 사경을 헤매는 순간들이 이어졌고, 간신히 죽음의 문턱을 넘어 첫아들을 품에 안을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총성과 포화 속에 있을 때, 오빠는 그렇게 태어났다.


6·25 전쟁의 소용돌이 속, 그 시절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굶주림과 싸워야 했다. 가끔 군납용 트럭이 쌀가마니를 내릴 때, 흘린 쌀알을 주워 갈 기회가 찾아오면 모두가 생존을 위해 몸싸움을 벌였다.


그때 초췌한 얼굴에 갓난아기를 업은 새댁―어머니―을 안쓰럽게 본 사람들이 잠시 양보해 주었다.

어머니는 그 잠깐의 틈에 쌀알을 쓸어 담느라 정신이 팔려, 아기의 발이 포대기 밖으로 드러난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 작은 발은 매서운 추위에 꽁꽁 얼어붙었고, 결국 동상이 생겼다.

그 상처는 단순한 한 번의 사고로 끝나지 않았다. 해마다 동상이 재발하며, 시련과 고통이 대를 이어가는 아픈 흔적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