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눈물 3

아버지의 눈물 3

by 김효숙


할머니는 병명도 없이 시름시름 앓았다. 그때 병을 고쳐준다며 찾아온 전도자의 말을 믿고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셨다. 언 몸을 녹이듯 위로를 얻기 위해, 할머니는 교회에 종일을 바쳤고, 아버지도 주일이면 따라 나가 예배에 앉았다. 잠시나마 신앙은 고단한 삶 속 작은 숨통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그 평안은 오래가지 못했다.


종전이 가까워오자 오사카 하늘은 연일 미군 B-29 폭격기로 뒤덮였다. 불길은 도심을 휘감아 순식간에 집들을 삼켰고, 도시는 거대한 불바다가 되었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하천과 방공호로 몸을 던졌으며, 판자촌에 모여 살던 조선인들의 삶 또한 단숨에 잿더미로 사라졌다.


폭격이 거세지자, 늘 집을 비우던 할아버지도 노동을 멈추고 가족 곁으로 돌아왔다. 피란을 준비하면서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제일 먼저 당부한 것은 다름 아닌 족보책이었다.

“이것만은 절대 잃지 마라.”

그리하여 어린 아버지는 날마다 족보책을 등에 지고 달아나야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은 달랐다.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전란 속에서, 족보책보다 차라리 쌀 한 줌을 더 짊어지고 싶었다.


도시는 불바다였고, 피난길은 혼돈 그 자체였다.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불길을 피해 달아나던 무리 속에서 비탄의 장면을 목격했다. 한 여인이 아이를 업고 나온 줄 알았는데, 그것은 아이가 아닌 베개였다. 아이를 잃어버린 줄도 모른 채 베개를 등에 업은 여인은 울부짖으며 불더미 속으로 달려 들어가려 했고, 주위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그녀를 붙잡아야 했다. 그 처절한 광경은 전쟁이 인간의 삶과 정신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보여주는 비극적 참상의 한 장면이었다.


여러 차례 투하되는 폭격을 피해 도망 다니다 보니, 끝내 아버지의 등에 있던 족보책도, 쌀자루도, 그 무엇도 남지 않았다. 목숨 하나 간신히 붙들고 살아남은 채, 전쟁은 종전을 맞았다.

종전 직후 일본 땅에는 히로시마 원폭 피해에 관한 무시무시한 소문이 퍼졌다. “순간의 섬광만 봤는데도 사람이 녹아내렸다”, “그 자리에서 그림자만 남고 흔적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들이 떠돌았다. 누구도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그 소문은 이미 황폐해진 사람들의 마음에 또 다른 공포를 더해주었다.


종전의 소식과 함께 해방이 되었다는 말이 들려왔지만, 아버지는 빈털터리의 몸으로 곧장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청춘에게 남은 것은 막막한 삶뿐이었다. 아버지는 다시 교회에 열심히 나가며 살 길을 찾아보려 애썼다.


그 무렵, 미국에서 온 선교사님이 아버지에게 손을 내밀었다. “함께 미국에 가자”는 권유는, 끝없이 닫혀 있던 현실 속에 새 희망처럼 다가왔다. 아버지의 가슴은 설렘으로 벅차올랐다. 부모님께 그 뜻을 말씀드렸을 때, 할머니는 대성통곡을 하며 매달리며 붙잡았다.

“나를 두고 어떻게 떠나겠느냐. 그럴 수는 없다, 그럴 수 없다”

결국 아버지는 또다시 가족을 선택했다. 그 선택으로 꿈을 접었다. 미국행의 희망은 그렇게 눈앞에서 사라졌지만, 아버지의 마음에는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와 책임이 더욱 깊이 새겨졌다.


1947년, 오사카항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귀환선을 탔다. 배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차 숨쉬기조차 어려웠지만, 모두가 고향 땅을 밟을 희망 하나로 버텼다. 그렇게 닿은 부산항, 기다리던 귀환동포 수용소에 들어서는 순간만큼은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러나 그마저도 오래 가지 못했다.


난민처럼 몰려든 동포들 사이, 질서와 보호는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다. 피난살이 속에서 어렵게 모아온 쌈지돈을, 귀환 첫날에 도둑맞았다. 목숨 걸고 지켜온 돈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이다. 해방의 환희는 눈물과 허무로 바뀌었다. 고향 땅을 밟았지만, 그 땅은 아직 굶주림과 불안, 그리고 인간의 이기심이 뒤엉킨 또 다른 전쟁터였다.


아버지는 그날을 두고 오래도록 말씀이 없으셨다. ‘살아 돌아왔음’에 감사해야 할지, ‘모든 것을 잃었음’에 절망해야 할지, 마음이 무너졌던 것이다. 부산항 귀환동포 수용소에서 흘린 눈물은, 단지 우리 가족사가 아니라 그 시대 모든 귀환 동포의 눈물이기도 했다.


일본에서 거지 몰골로 돌아와 고향길에 올랐다. 잠시 반겨주는 친척도 있었으나, 그 따뜻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 아버지 가족은 짐덩어리 신세로 전락했다. 하루라도 빨리 일거리를 구하려 했지만, 누구도 일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다시 일본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밀항을 해서라도 먹고살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배삯은 외가댁에서 빚을 내어 마련했다. 밀항하려는 사람은 많았고, 깊은 밤의 바닷길을 향해 배 밑바닥 짐칸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새벽녘, 배가 시모노세키 근처에 닿으면 물에 뛰어들어 헤엄쳐야 한다고 안내했다. 수영을 못하면 곧바로 목숨을 잃는 자리였다. 아버지는 소학교 다이빙 선수 출신이라 자신 있었다. 그래서 안심한 채 짐칸에서 잠들었는데, 새벽에 갑자기 기상 명령이 떨어졌다. “뛰어내려라!” 아수라장 같은 외침과 함께 모두가 바다로 몸을 던졌다.

아버지도 차가운 바닷물 속을 힘껏 헤엄쳐 해변에 도착했다. 그러나 여명이 밝아오고 아침 해가 떠오르자, 그곳은 시모노세키가 아니었다. 다대포 해안이었다. 이미 배는 자취도 없이 떠나 버렸고, 남은 것은 거짓과 허무뿐이었다.


아버지는 이를 앙다무는 습관이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다시 일어설 수 없었을 것이다. 수치와 모멸을 삼키며 그는 또다시 도전에 나섰다. 그가 얻은 일자리는 놋그릇 공장이었다.

아버지는 남들과 다른 제안을 했다. 월급을 현금으로 받지 않고, 같은 액수만큼 놋그릇으로 지급해 달라는 것이었다. 사장과 합의가 이루어졌고, 그날부터 아버지는 놋그릇을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할머니는 그것을 머리에 이고 다니며 시장을 돌았다. 현금으로 받았을 때보다 훨씬 많은 이익이 남았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아버지는 마침내 야간고등학교 등록금을 마련했다. 이번만은 반드시 학업을 이어가리라 결심했다. 그러나 할아버지와 상의하지 않고 혼자 낸 결단이었다. 등록을 마친 뒤에야 할아버지께 “야간학교에 다니겠다”고 말씀드렸는데, 돌아온 것은 차가운 뺨의 매질이었다. “집안을 책임져야 할 장남이 무슨 공부냐. 당장 등록금을 회수해 오너라.”

아버지는 또다시 가족 앞에 무릎을 꿇고 등록금을 돌려받았다. 그리고 그 순간, 학업에 대한 꿈을 완전히 접어야 했다. 배움의 길은 그렇게 닫혀버렸다. 아버지는 그 좌절 속에서도 이를 앙다물며 살아내야 했다. 그것이 삶의 방식이었다. 아버지의 눈물을 본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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