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섭고도 그리운 아버지 2

by 김효숙

구한 말엽, 나라가 격동의 소용돌이를 지나며 서서히 쇠퇴해 가던 시절, 우리 할아버지의 집안 또한 이름만 양반의 후손일 뿐, 이미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형제들은 노름과 기생집을 드나들며 가산을 탕진했고, 집안의 위세는 허울만 남았다.


혼처가 마땅치 않던 할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동생들을 돌보다가 혼기를 놓쳐버린 처녀와 혼인을 하게 되었다. 몰락해 가는 양반가임을 알면서도 인연은 그렇게 맺어졌다. 할머니의 친정에서는 혼수로 논과 밭, 소 한 마리, 그리고 몸종 한 명을 딸려 보내며 딸의 앞날을 걱정했다.


1917년 결혼 후에도 할머니는 연이어 딸을 낳으셨지만, 큰딸과 둘째만 살아남고 몇몇 아이들은 백일을 넘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는 새벽마다 찬물로 목욕재계하고 용왕님께 아들을 점지해 달라며 간절히 기도했다. 마침내 1930년, 정성 어린 기도 끝에 얻은 아들이 바로 내 아버지였다. 본명은 천학이었지만, 집안에서는 용술이라 불렀다. 용왕님께 빌어 얻은 아들이라 ‘용(龍)’ 자를 넣어 아명을 지었다.


나의 아버지, 용술은 눈꼬리가 올라간 실눈에, 눈썹은 마치 갈매기 날개가 하늘을 가르듯 힘찼다. 그 얼굴에서는 초원의 바람을 정면으로 맞서 제국을 세운 징기스칸의 기상이 겹쳐 보였다.


아버지가 태어난 세 해 뒤, 할머니는 다시 아들을 낳으셨다. 탯줄을 감고 태어났다하여 그 삼촌의 아호는 태술이였다.


아들 둘을 연달아 낳은 할머니는 시름시름 아프기 시작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산후 우울로 시작되어 우울증이 지병이 되었다. 아들이 둘이 되자, 한량으로 지내던 할아버지는 정신을 차리고 가정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 했다. 양반 놀음만 해왔던 할아버지는 머슴도 없는 농사는 짓기 어려웠고, 논밭을 놀릴 수 없어 결국 남에게 맡기고 약간의 돈을 마련해 새로운 삶을 꿈꾸었다.


그 무렵 일본에는 농사가 아닌 다양한 일자리가 많다는 소문이 돌았다. 할아버지는 그 길을 살길로 여기고 가족을 데리고 일본으로 이주하기로 결심했다.

집안 살림을 맡아하는 17살 큰고모는 일본에 함께 데려갔지만, 15살이던 어린 둘째 딸을, 먹고살 만한 양반집 아들에게 서둘러 시집을 보내야 했다. 그렇게 5인 가족은 삶의 터전, 밀양을 떠나 낯선 일본 땅으로 향하게 되었다.


현해탄을 건너 도착한 일본 열도 오사카(대판)에서, 판잣집 단칸짜리 ‘하꼬방’에 자리를 잡았다. 바람만 불어도 삐걱대는 작은 한 칸 방에 다섯 식구가 몸을 누이기란 참으로 버거운 일이었다. 겨우 잠자리를 마련해도 숨소리조차 부딪히는 공간, 먹고 입고 살아내는 모든 것이 빠듯했다.


한입을 덜기 위해 큰고모의 혼사를 서둘렀다. 혼처 자리를 고를 수 없을 만큼 가난해 학벌만을 보고 급히 혼인을 맺어주었다. 그 결혼은 하나의 도피이자, 동시에 ‘조선인도 배움과 신분으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을 걸었던 선택이었다.


오사카에 도착하자마자 할아버지는 어디론가 일을 찾아 떠났고, 그 뒤로 몇 달 동안 소식조차 없었다고 한다. 남겨진 가족은 낯선 땅에서 불안과 두려움 속에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다. 아버지는 대리모 노릇을 하던 큰고모의 빈자리를 대신하며 할머니를 돌보고, 외출할 때는 통역까지 맡았다. 또래보다 키도 크고 체격이 좋아 씨름을 하면 당할 친구가 없었고, 일손도 야무져 힘을 보탰다. 할머니에게 아버지는 든든한 수호천사이자 삶을 버티게 하는 우상이 되어갔다.


한편, 할아버지는 체격이 작고 깡마른 덕에 중노동에서는 제외되어, 잡역이나 경비 같은 가벼운 일을 맡게 되었다. 그는 그것을 행운처럼 여겼고, 고용주에게 고마워하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조선인들은 불평이 많고 일을 끝까지 하지 못해 도망가 버리니, 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고향을 떠나 강제로 끌려와 땀과 눈물을 흘린 사람들의 절규를 ‘불성실’이라 치부하는 할아버지의 말은, 시대의 폭력과 왜곡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었으며, 의식이 다른 손녀인 내겐 참으로 불편하게 다가왔다.


당시 오사카의 조선인 노동자들은 항만과 공장, 건설 현장으로 내몰려 혹독한 노동을 감당해야 했다. 임금은 일본인보다 턱없이 적었고, 차별과 멸시가 일상이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불평을 할 수밖에 없었고, 목숨을 걸고 도망치는 이들도 있었다.


아버지는 오사카의 판자촌 곁 작은 공립 소학교에 입학했다. 조선 아이들은 일본 아이들과 같은 교문을 드나들었지만, 교실 안의 세계는 이미 나뉘어 있었다. 선생님은 일본인이었고, 학급의 권력은 철저히 일본인 아이들에게로 기울어 있었다. 아버지는 씩씩한 장부였고, 그 용기와 힘 때문에 선생님의 눈에 띄었다. 그러나 그 관심은 달콤한 칭찬이 아니라 감시와 시험의 대상이었다.


학급 간부는 선생님의 임명제였지만, 조선인이라면 결코 반장이 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부반장에 임명되어 반장의 그림자가 되었고, 학급 말썽꾸러기들의 명단을 적어 선생님께 바치는 일은 고스란히 그의 몫이었다.


선생님이 첫날 명단을 받아보더니, 일본 아이들은 제외하고 조선 아이들만 불러내어 얼굴을 세차게 내리쳤다. 수업이 끝나자 분노한 조선 아이들이 부반장에게 달려들었다. 아버지는 “떠든 일본아이 이름도 적어 드렸다”고 말해도 돌이킬 수 없었다.


다음 날, 아버지는 일부러 일본 아이들 이름만 적어냈다.

그러자 선생님은 교실 앞에서 아버지를 반항했다며 공개적으로 두들겨 팼다.


학교에 가는 나날이 지옥 같아 결국 선생님에게 몸이 아파, 부반장을 못하겠다고 간청했다.

어린 심장에 남은 수치와 공포는 오래도록 가시지 않았다.


체육 시간. 선생님은 아버지의 힘을 시험하려는 듯 씨름 대회를 벌였다.


처음엔 막중한 토너먼트였고, 아버지는 단번에 이겼다. 연달아 덩치 큰 일본 아이와 붙였다. 있는 힘을 다해 이겼다. 그러자 선생님은 교실에서 제일 작은 아이 셋을 불러 3대1로 붙여 보자고 했다. 승리의 여세에 체력이 소진된 것을 잊은 채 아버지는 당당하게 응했고, 결과는 굴욕적이었다.


꼬맹이 셋에게 포위되어 무참하게 져버린 그는, 학교 온 아이들 앞에서 망신을 당해야 했다. 그날의 패배는 단순한 경기의 패배를 넘어, 그의 용맹과 자존심을 짓밟는 공적 굴욕이었다.


그때 그날 일본인 교사의 만행으로 당한 모진 매질과 모멸감은 개인의 체험을 넘어 식민지 지배의 폭력적 흔적이다.


아버지는 차별과 고난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학업에 매진했다.

비록 이주 노동자의 집안, 가난에 찌들었지만 배움에 대한 갈망은 누구보다 뜨거웠다.

향학열(向學熱)에 불타던 아버지는 마침내 오사카에서 가장 명성이 높던 중·고등학교에 합격했다. 그러나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그 학교가 얼마나 수준 높은 곳인지조차 알지 못한 채, 학비 걱정부터 앞세우며 기뻐하지 못했다고 한다.


오히려 시집간 큰고모가 그 소식을 듣고는 정말 눈물까지 흘리며 자랑스러워하며 기뻐했고, 어렵게 마련한 돈으로 교복과 학비 전액을 지원해 주었다.

큰고모의 희생과 사랑 덕분에 아버지는 배움의 길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배움의 길은 오래 가지 못했다.

태평양전쟁이 격화되면서, 학교는 더 이상 학문의 전당이 아니라 전쟁을 위한 병영처럼 변해갔다. 교실마다 전쟁 선전이 가득했고, 어린 청소년 학생들에게 천황을 위해 바치는 목숨이야말로 위대한 영웅이며 숭고한 용기라며 감언이설로 포장한 강요가 반복되었다.


조선은 빛이 바래지고 나라가 없어져 조선인으로 정체성이 혼미했던 학생들이 죽어서라도 빛나는 영웅이 되고 싶어 자진해 손을 드는 학생들이 있었다.


체격이 좋은 중학교 1학년이던 아버지에게는 담임선생님으로부터 가미가제 특공대 차출 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아버지는 하나뿐인 목숨을 천황에게 바칠 수 없었다.

할머니와 가족을 지키는 작은 가장이었기 때문이다.


차출을 거부할 방법을 연구하며 고심했다. 전투기 조종사라 시력 검사에서 실격이 되면 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완벽한 연기로 약시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결과는 가혹했다. 아버지는 ‘불온한 장애 학생’이라는 낙인이 찍혔고, 학교는 그를 끝내 퇴학시켰다. 배움에 대한 뜨거운 열망으로 명문학교의 교문을 들어섰던 아버지는, 그렇게 하루아침에 학업의 길을 잃고 말았다.



퇴학 이후 아버지의 삶은 깊은 방황 속으로 빠져들었다.

학업의 길을 잃고 나니, 세상은 그에게 더 이상 갈 곳을 내어주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불온한 학생’이라는 낙인이 찍힌 아버지는 집 밖으로 나서기를 꺼렸다. 스스로 방 안에 틀어박혀 세월을 흘려보내는, 지금 말로 하면 히키코모리와 다르지 않은 생활이었다.


그러나 청춘의 불꽃은 억눌러도 쉽게 꺼지지 않았다. 학교에 다니던 여학생들이 몰래 아버지를 찾아와 함께 어울리곤 했다. 방 안은 곧 비밀스러운 놀이터가 되었고, 그 속에서 아버지는 허무와 방황을 달래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일탈이자 성적 탈선으로 이어졌다.

배움의 열정으로 불타던 시절과는 정반대의 길이었다.


아버지의 젊은 날은, 시대의 폭력에 의해 짓밟힌 꿈이 어떻게 표류하는지를 보여주는 한 장면이었다. 스스로 선택한 길이라기보다는, 강제로 닫힌 문 앞에서 방향을 잃은 청춘의 흔들림이었다.

이전 01화시련을 견디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