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중년으로서 가지는 지혜

by SW짱

“커뮤니케이션에서 가장 중요한 건, 말하지 않은 것을 듣는 일이다.”“커뮤니케이션에서 가장 중요한 건, 말하지 않은 것을 듣는 일이다.”

버릴 것과 지킬 것


버릴것지킬것.JPG


예전 다니던 회사에 존경과 미움이 반반이었던 상사가 있었다. 내가 대리였을 때 부장이었고, 차장으로 퇴사할 무렵에는 연구소장 전무가 되어 있었다. 그 분은 임원이면서도 현장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설비가 안 되면 엔지니어들 사이에 끼어 함께 고민했고, 전시회와 컨퍼런스가 있으면 빠지지 않았고 참석했다. 기술 회의에서는 화려한 언변으로 참석자들을 이끌었고, 고객사 앞에서는 문제를 짚어내며 자연스럽게 영업까지 해냈다. 그 분에게서 나는 기술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배웠다. 자신이 아는 것을 표현하는 능력, 그리고 고객의 언어로 말할 줄 아는 감각 — 그것이 전문가의 완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미움의 반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아이디어는 늘 좋았지만, 실행의 방향은 없었다. 고객사에 사양과 맞지 않는 기술을 제안하면 그 수준을 맞추는 건 고스란히 실무자의 몫이 되었다. 결국 팀장급 이하 누구도 그 분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그 분은 자신이 쌓아온 것을 하나도 버리지 못한 사람이었다. 새로운 것을 계속 쥐었지만 오래된 것을 내려놓지 않았기에, 결국 손에 든 것들이 서로 충돌했다.

시간이 지나면 누구나 고지식해질 수 있다. "이건 예전에 다 해봤어"라는 말 뒤에는 새로운 가능성을 차단하는 벽이 세워진다. 22년간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내가 가장 늦게 깨달은 지혜가 있다면, '버릴 것과 지킬 것'을 구분하는 눈이다. 그리고 그 눈은 기술에서, 리더십에서, 삶의 태도에서 각각 다른 모습으로 나를 시험했다.



기술에서 — 도구를 버리고 목적을 지키다


40세 이전까지 나는 기술적 완벽함에 집착했다. 검사기 분야에서 전문가라는 소리를 듣기 위해 밤을 지새우며 알고리즘의 완성도를 높였고, 새로운 광학 기술이 나오면 현장에 적용해보려 안달이었다. 그때의 나에게 전문가란 '도구를 가장 잘 다루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다르게 본다. 딥러닝이라는 강력한 도구도 현장 문제의 속성을 모르면 무용지물이다. 비전 검사 장비는 결함을 찾아내는 기계이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무엇이 결함인지 정의하는 눈'이다. 도구는 세대마다 바뀌지만, 문제를 정의하는 통찰은 세월이 쌓일수록 단단해진다. 나는 최신 도구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대신, 전체 흐름을 꿰뚫어 보는 눈을 지키기로 했다.


“효율(수단)은 일을 ‘올바르게’ 하는 것이고, 효과(목적)는 ‘올바른 일’을 하는 것이다.”

- 피터 드러커 -


리더십에서 — 목소리를 버리고 귀를 지키다


임원이 되고 나서 가장 자주 한 실수는 회의실에서 목소리를 높인 것이었다. 업무가 지연되면 팀원들의 노력이 부족하다는 의심부터 했고, 담당자를 불러 책임을 추궁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팀원의 일정을 들여다보니, 고객사 현장 컴플레인 대응, 타 부서 회의, 테스트 진행이 빼곡하게 차 있었다. 실제로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하루에 두 시간도 되지 않는 사람에게 나는 결과만 다그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다그치기 전에 먼저 물어보기로 했다. "지금 제일 막히는 게 뭐야?"라는 질문 하나가 윽박보다 더 빠르게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진심으로 후배의 성장을 바란다면, 내 25년의 경험은 그들 앞에 놓인 장애물을 치워주는 데 써야 한다. 위에서 내리누르는 무게가 아니라, 옆에서 밀어주는 힘이 되어야 한다.


“커뮤니케이션에서 가장 중요한 건, 말하지 않은 것을 듣는 일이다.”

- 피터 드러커 -


삶에서 — 조급함을 버리고 호기심을 지키다


길게 직장 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이 하나 더 있다. 오래 살아남는 사람은 자신을 돌볼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나만을 위한 시간이 필요해진다. 하루 휴가를 내고 도서관에서 좋아하는 분야의 책에 빠져드는 시간, 브런치에 글을 쓰며 22년간의 직장 생활을 복기하는 시간 — 이런 것들이 마음의 근육을 키워주었다.

자격증이든 학위든 글쓰기든,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유지하는 과정 그 자체다. 나는 이것을 '정신적 골프'라고 부른다. 스코어를 줄이려 안달하는 것이 아니라, 필드에 나가는 것 자체가 목적인 라운딩 말이다. 굳이 사람들과 경쟁하려 할 필요는 없다. 필드에서 사람들과 대화하며 잔디를 걸어보는 것.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image.png


유연함으로 완성되는 계절


예전 올림픽을 떠올려 본다. 84년 LA 올림픽에서 복싱의 김광선 선수는 유력한 금메달 후보였지만 1회전에서 탈락했다. 편파 판정이라는 논란이 있었으나 당시에는 조용했다. 그때 뉴스는 금메달 소식만 전했고, 나는 그 사실조차 몰랐다. 88년 서울에서 그가 마침내 금메달을 목에 걸었을 때야 비로소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다르다. 모든 메달에 조명이 가고, 예선 경기의 감동도 함께 나눈다. 최고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시대에서, 과정의 가치를 인정하는 시대로 바뀌었다. 이 변화가 내게 알려준 것이 있다. 중소기업의 작은 팀이라도 각자의 재능을 인정하고 제자리에서 빛나게 하는 과정 그 자체가 대기업의 정예 조직이 만드는 결과 못지않은 힘을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고지식해진다고 한다. 하지만 참된 세월을 보낸 사람은 유연함으로 완성된다고 나는 믿는다. 속도를 내는 사람, 방향을 잡는 사람, 바람을 읽는 사람 —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갈 필요는 없다. 그 다름을 다름으로 인정하고 엮어내는 힘, 그것이 중년이 도달할 수 있는 유연함이다.



에필로그를 마치며


인생의 황금기는 언제일까. 나는 그것이 계속 발전해 나갈 수 있는 한, 바로 내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세월이 야속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인생의 내리막길에 있는 것이 아니다. 높은 곳에서 풍경을 조망하며, 다음 세대를 위한 길을 안내하는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22년간의 직장 생존기를 마무리하며, 내가 붙잡고 싶은 지혜는 결국 이것이다.

버릴 것을 알아보는 용기, 지킬 것을 붙드는 단단함, 그리고 그 둘을 구분하는 유연함.

이것이 중년이 세월로부터 받은, 조용하지만 묵직한 선물이다.


“변화만이 영원하고, 끊임없고, 불멸한다.”

- 쇼펜하우어-

이전 09화미래에 대한 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