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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 Dec 12. 2024

위대한 그의 빛 - 심윤경


소하고 사부작거리지만 무거운 소설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래서 영미 소설은 잘 안 읽게 된다. 문장의 깊이와 묘사에 중심을 두었다기보다는 서사에 중점을 두는 소설은 피하게 된다. 

심윤경 님의 소설들은 약간의 반전과 스펙터클이 다소 있었으나, 주인공 내면의 흐름을 따라 묘사되는 소설들이 주를 이루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소설은 '나의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무거운 회색도 아닌 연한 연둣빛의 이 소설은 웃음과 슬픔, 반전에 의한 놀람등을 가져다주었다. 여러 번 읽었다.

그러다 심윤경 님의 새로운 작품을 발견했다. 그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약 250쪽 분량의 이 책은. '잘'읽힌다. 심윤경 님만의 서늘함과 애잔함이 담겨있는 문장들도 정말 많다. 다만 이 소설을 읽으며

1. '위대한 개츠비'가 겹쳐 보인다는 사실을 떨쳐낼 수 없었고, 

2. 상류층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질감이 들었으며

3. 느닷없이 빠르게 전개되는 횡파의 파고가 조금은 어색했다.


주인공인줄 알았던 주인공은 2인칭 시점의 관찰자의 역할이 더 컸고, 주인공인 제이강의 심리상태를 묘사하기엔 250쪽 분량은 너무 작게 느껴졌다. 실질적으로 메인에 서있는 주인공인 연지는 캐릭터가 잘 그려지지 않았다. 

좋았던 점도 많았다. 인물 간의 개연성을 촘촘하게 조직하여 소설이 전개되고 있으며, 상류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는 목소리 또한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심윤경 님의 아름다운 문장들은 여전하다. 필사해 둘 문장은 스무 문장이 넘어갔다. 게다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살아보지 않은 삶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도 있었고.


주인공들 모두 40대 후반이다. 40대 초반인 나에게 그들의 무모한 사랑과 긴박한 헤어짐, 그리고 어린아이 같은 행동들은 다소 이질적으로 와닿았다. 한편으로는 10년 뒤의 나도 여전히 저렇게 낭만을 꿈꿀 수 있을까? 에이 말도 안 되는 소리. 고개를 끄덕였다 휘휘 저었다 하며 혼란스러웠던.


#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과 미안함은 사람들에게 굳이 왜 그러느냐고 캐묻지 않고 이래라저래라 설교하지 않는 인내심으로 나의 내면에 조용히 퇴적되었다.


# 삶이라는 게 그런 것 같다. 살면서 나에게 가장 상처를 준 것들은 내가 그것들과 가장 오래 부대끼며 가까이 살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 결국 나는 내가 어떻게든 떠나고 싶어 했던 성수동과 뉴욕을 얼기설기 엮어서 둥지 같은 것을 만들고 그 안에서 숨쉬며 사렉 되었는데, 그런삶이 그리 불쾌하지도 않았다. 이제 나는 이 모든 일들에 그저 아이러니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성수동에서 뉴욕스타일 와인바를 운영하는 자영업자의 삶에 순응했다.


# 내 삶의 어떤 부분은 십대 후반에 정신없이 지나친 어떤 지점에서 화석화되어 내면에서 영원히 덜그럭덜그럭 소리를 내며 굴러다녔다. 대체로 무해했지만 가끔 그 덩어리가 예민한 지점을 쿡 찌르면 요로결석에 걸린 것처럼 비영을 지르며 한참 동안 그 통증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도 있었다. 


# 강재웅은 유연지를 잊지 않았다. 


# 베토벤 4번 교향곡 첫 소절이 운명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라는 별명을 얻었던 것처럼, 나는 그날부터 덜머리댁의 아장걸음이 인간이 운명을 향해 걸어가는 발걸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 폭탄을 품은 근본주의 테러리스트라고 해도 저렇게 분통터진 얼굴로 이를 악물고 다가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 어느새 우리는 그런나이에 이르렀다. 얽매여 허덕였던 삶의 의무들을 어느정도 완수했고, 놀라운 의료기술의 도움을 받아 마지막 남은 젊음의 끝자락을 아직 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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