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산을 이루는 풀꽃 14

명랑 아파트 101동 905호

by 김유수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는 경숙에게 영수가 말했다. 첫째 며느리가 어제저녁 집으로 찾아왔다고. 아들 내외와 연락이 끊긴 이후로 20여 년 만에 처음 마주한 얼굴이랬다. 홍삼 세트를 손에 들고 찾아온 그녀는 허름한 방 안에 앉아계신 시부모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고, 이제야 찾아와 죄송하다면서 엉엉 울었다고 한다.



갑작스러운 며느리의 방문에 당황했던 노부부는 일단 그녀를 방 안으로 들여 이야기를 차분히 들었다고 했다. 며느리가 말하길, 사업을 하겠다며 부모님이 모은 돈을 모두 가져간 첫째 아들은 번번이 사업에 실패하면서 가진 돈을 모두 탕진했었다고 털어놨다. 빌린 돈을 다시 드릴 수 있을 때까진 부모님을 찾아 뵐 면목이 없어 연락하지 못한 세월이 어느덧 20여 년이나 흘러버렸는데, 그 시간 동안 산전수전을 겪으며 가계를 겨우 회복했을 무렵 첫째 아들에게 췌장암이 찾아와 지금 2년째 투병생활 중이라는 거였다.



집과 병원을 오가며 통원치료를 받던 첫째 아들은 최근에 병세 악화로 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을 간병하던 며느리가 유튜브에 올라온 뉴스를 보던 중에 우연히 시부모님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고, 그 뉴스를 남편에게 보여주자 그는 자신이 부모님을 이렇게 만든 거라며 통곡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고 한다. 남편이 움직일 수 없으니 혼자서라도 찾아왔다는 며느리는 그간 갚지 못했던 빚을 포함해 자식으로서 도리를 이제서라도 제대로 하고 싶다며 이렇게 찾아온 것이라 설명했다고 한다.



경숙은 노부부가 해준 이야기를 듣고 잘됐다며 하염없이 울었다. 현재 노부부의 삶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는 사람으로서 만감이 교차했다. 이 손바닥만 한 쪽방에 살며 더우나 추우나 폐지를 주워 모은 돈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연락 끊긴 아들들을 그리워하면서도 원망하는 소리 한번 없이 살아온 노부부가 이제는 남은 여생을 조금이나마 편안하게 살다 갈 수 있게 되었으니 이렇게 다행일 수가 없었다. 주름지고 건조한 옥자의 손을 꼭 붙잡고 우는데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작은 아드님은요? 작은 아드님 소식은 모르세요?"

"가는 지금 즈기 강릉에서 배 탄다 하더라고. 토요일에 만나기루 했어."



영수가 검지 손가락을 허공에 가리키며 말했다. 며느리 말로는 첫째 아들 못지않게 고생하며 살아온 막내 아들은 현재 어업을 하며 살고 있다고 했다. 막내 아들 역시 어려운 형편 때문에 이일 저일 다 해가며 살다 결국 바닷일까지 하게 되었는데, 자식들 먹여 살리기 바빠서 부모님은 물론이고 형제간의 연락도 단절된 채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 이번에 뉴스를 본 며느리가 막내 아들에게 연락하면서 가족들의 소식을 알게 되었고, 그는 이번 주말에 부모님과 형을 만나러 강릉에서 오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서로 소식도 모른 채 살아가던 한 가족이 20여 년 만에 재회를 하게 된 것이다.



"인제 우리 이사 가믄 경숙이 너두 그만 와도 된디야."



눈물을 겨우 그친 경숙에게 옥자가 말했다. 이번 달 내로 첫째 아들 집으로 이사 가게 되었다면서 그러면 더 이상 재가방문을 오지 않아도 된다고. 경숙은 이 말을 듣고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너무 갑작스레 찾아온 이별이라 섭섭해도 얼굴이 밝아진 노부부를 보니 기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첫째 아들이 병원에 누워 투병 중이지만, 죽음을 늘 곁에 두고 살아가는 그들은 연락 끊긴 자식들을 살아생전 한 번만이라도 꼭 만나고 싶었다는 바람이 이루어진 것에 감사하고 있었다.



당장 내일 헤어지는 게 아닌데도 경숙은 아쉬움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옥자의 담당 요양보호사로서 노부부를 모신 지 1년이 넘었는데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그 시간 동안 들어온 정의 깊이는 결코 얕지 않았다. 노부부를 친부모처럼 여기며 정성껏 모신만큼 그들도 경숙을 자식처럼 아꼈다. 그 마음을 너무도 잘 알기에 경숙은 노부부와의 이별이 아쉽기만 했다.



"오늘은 내가 된장국 끓여줄 테니까 저녁 먹구 가."



옥자는 바닥을 짚고 천천히 일어났다. 항상 경숙이 해준 음식을 먹던 옥자가 오늘은 자신이 저녁을 차리겠다며 부엌으로 향했다. 경숙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만류했으나 옥자는 됐다면서 경숙에게 앉아있으라고 일렀다. 영수도 얼른 홍삼즙을 마시라며 가위로 팩 입구를 잘라 경숙에게 내밀었다.



하는 수 없이 자리에 앉은 경숙은 영수가 입구를 잘라준 홍삼즙을 마셨다. 처음 꺼냈을 땐 차가웠던 홍삼즙이 방안의 후덥지근한 온도 때문에 미지근해졌다. 그래도 괜찮았다. 건강을 마시는 게 아니라 사랑을 마시는 기분이라 그런 듯했다. 아마 옥자가 만든 된장국도 그럴 것이었다.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오늘따라 경쾌하게 들려왔다.








경숙이 사는 명랑 아파트는 세 개의 동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아파트였다. 연식이 오래된 만큼 오랫동안 거주한 세대가 많은지라 이웃들끼리 얼굴과 이름을 아는 것은 물론이고 집집마다의 속사정도 금방 퍼져나갔다. 몇 동 몇 호네 자식이 어느 회사에 취업했네, 몇 동 몇 호 네가 집을 새로 사서 이사를 갔네, 몇 동 몇 호 네가 이혼을 했네.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까지 공유할 정도로 이웃 간의 소통이 원활하다 보니 아파트 부녀회도 활발하게 운영됐다. 오지랖이 넓고 수다 떠는 걸 좋아하는 경숙은 부녀회의 일원으로 입주자 대표 모임에 꼬박꼬박 참여하며 명랑 아파트의 발전과 평화로운 공동체 생활을 위해 애써왔다.



하지만 해가 지날수록 공동체 생활에 협조하지 않는 이웃이 많이 늘어난 것 같아 경숙은 여러모로 답답했다. 분리수거를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아파트 쓰레기장이 엉망이 되는 경우는 다반사였고, 경비원한테 삿대질과 욕을 해가며 갑질하는 입주민도 생겼다. 전에는 층간소음이나 층간흡연 문제로 갈등이 발생하면 대화만으로도 원만하게 해결이 됐는데 이제는 경찰을 부르는 게 당연한 절차가 될 만큼 어느 한쪽도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이웃끼리 서로 조금만 배려하고 양보하면 해결될 문제가 점점 더 격한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으니 경숙은 세상 살기가 많이 각박해졌구나 하는 걸 온몸으로 실감하는 중이었다.



점점 삭막해지는 아파트 분위기 때문에 최근에 부녀회에서 추진하고 있는 경비실에 에어컨 달기 안건이 무산될 위기에 놓였다. 체감 온도가 30도 중반을 훌쩍 넘는 한여름에 두 명의 명랑 아파트 경비원들은 선풍기 하나에 의지하며 아파트를 관리했다. 24시간 교대 근무라는 조건과 열악한 근무환경을 버티지 못하고 그만둔 경비원들의 숫자가 경숙이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열 명은 족히 넘었다. 그런데 현재 근무하는 두 명의 경비원, 그중에서 정호는 근무 기간이 2년이 다 되어 갈 정도로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성실하게 아파트를 관리하고 있었다.



부녀회 모임에서는 명랑 아파트를 위해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 정호를 위해서라도 그동안 이런저런 사정으로 미뤄온 경비실 에어컨 설치를 올해엔 꼭 실행하자는 이야기가 여러 차례 나왔었다. 하지만 6월에 실시한 1차 찬반 조사 결과 과반수가 조금 넘는 세대만이 에어컨 설치에 찬성한다는 의견을 냈다. 전체 세대 중 적어도 70% 이상의 동의를 얻어야 에어컨 설치가 가능한데, 아무래도 관리비에 에어컨 설치 비용과 경비실 전기세까지 포함된다고 생각하니 절반 정도의 입주민들은 영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부녀회에서 어떻게 하면 입주민들의 동의를 더 구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이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8월이 되었다. 장맛비가 한바탕 휘몰아치고 나서 뜨겁고 축축한 날씨가 연일 이어졌다. 이런 날씨에 에어컨은커녕 휴게시간이나 휴게공간조차 보장되지 않는 환경에서 일을 하고 있음에도 정호는 늘 웃는 얼굴로 입주민들에게 인사했다. 그래서 경숙은 땀으로 흠뻑 젖은 그의 근무복을 볼 때마다 고맙고 미안하기만 했다.



"엄마, 902호에서 또 싸우는 소리 들려."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서연이 집에 들어와 말했다. 거실에 앉아 빨래를 개던 경숙은 그 말을 듣자마자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어떡하냐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다 경비원부터 불러야겠다는 생각에 인터폰으로 경비실 호출 버튼을 눌렀다. 머지않아 익숙한 목소리가 무슨 일이냐고 응답했고, 경숙은 902호에서 또 싸움이 났으니 얼른 오라고 경비원을 닦달했다. 그리고 마스크만 챙겨 얼른 슬리퍼를 신고 나갔다.



경숙이 사는 101동은 한층에 여섯 세대가 사는 복도식 구조였다. 그래서 복도를 지나가다 본의 아니게 다른 집 안에서 나는 소리를 듣게 될 때도 있었다. 복도식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남의 집에서 나는 소리를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게 익숙하고 당연한 일이었는데 최근 들어 경숙의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게 만드는 소리가 있었다. 바로 밤마다 902호에서 들려오는 무시무시한 소리였다.



902호에는 3년 전쯤에 이사 온 부부와 어린 남매가 살고 있었다. 올해 중학생이 된 여자아이와 초등학교 5학년인 남자아이는 둘 다 성격이 밝고 인사를 잘해서 경숙이 볼 때마다 흐뭇해하는 아이들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남매의 부모는 이웃과 대화 나누는 걸 꺼려했고, 특히 부모 중 아빠는 인상도 험상궂어서 함부로 말 걸기도 어려울 아우라를 풍겼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이웃에게 인사 한번 안 하는 그런 아빠 밑에서 아이들은 어쩜 이렇게 예의 바르게 잘 컸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경숙은 그들이 그저 조금 특이한 가족이겠거니 하고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어느 날 늦게까지 공부하고 집에 온 서연이 902호에서 싸우는 소리가 나는 걸 들었다는 말을 듣고 처음으로 902호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관심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번 그 집 앞에 몰래 가서 싸우는 소리를 엿들은 결과, 집안에서 남편이 아내와 아이들을 폭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들어봐 봐요. 맞죠? 이 집 남편이 마누라랑 애들을 막 때린다니까요!"



경숙은 경비실에서 올라온 정호와 902호 문 앞에 귀를 대고 속닥거렸다. 안에서는 잘못했다고 비는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제발 그만하라고 울부짖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자는 아이들의 엄마가 분명했다. 하지만 조용히 안 하냐며 윽박지르는 목소리가 여자의 목소리를 집어삼켰다. 이어서 매 맞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무언가 둔탁한 소리가 나면 곧바로 아이들의 비명소리가 뒤따랐다. 아비규환을 연상케 하는 소리를 계속 듣다 보니 경숙은 심장이 쿵쿵 뛰고 손까지 떨렸다.



"아저씨가 어떻게 좀 말려봐요...!"

"아니 이걸 제가 무슨 수로..."

"애들 저렇게 맞고 있는데 그냥 둘 수도 없잖아요!"

"아 이거 참..."



무지막지한 폭력이 벌어지는 상황이 정호도 무섭긴 마찬가지인듯했다. 경숙이 어떻게 좀 해보라며 등을 떠밀었지만 그는 선뜻 나서지 못했다. 한참 방법을 생각하던 두 사람은 작전을 짰다. 정호가 민원이 들어와서 찾아왔다는 핑계로 남자와 대화를 시도해보기로 하고, 경숙은 숨어서 엿듣다가 상황이 악화되면 112에 바로 신고하기로.



비상계단 안쪽에 몸을 숨긴 경숙은 정호에게 얼른 초인종을 누르라고 손짓했다.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인 정호는 결심한 듯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안에서 들리던 울음소리가 뚝 끊겼다.



띵동.



정호가 초인종을 다시 한번 눌렀다.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띵동. 띵동.



초인종을 여러 번 눌러도 아무런 반응이 없어서 긴장감이 고조될 무렵, 현관문 안쪽에서 누구냐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칫 놀란 정호가 경숙을 쳐다봤다. 경숙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예. 경비실에서 나왔는데요. 시끄럽다는 민원이 들어와서 와봤습니다."



경숙이 시킨 대로 설명한 정호는 경숙의 눈치를 살폈다. 경숙은 잘했다는 의미로 엄지를 내밀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알겠으니 그만 가보라는 대답이 들린 이후로 902호는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일단 윽박지르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멎었으니 경숙은 안심했다. 그래도 마냥 다행이라고 여기진 못했다. 2-3일에 한 번꼴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도대체 언제부터 가정폭력이 시작된 건지, 어쩌면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부터 남매와 아이들의 엄마가 폭행을 당하고 살아온 건 아닌지 생각하다 보니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경비실로 내려와 902호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정호와 이야기하는데 경숙은 한밤중에도 후덥지근한 온도 때문에 금세 팔다리가 끈적해짐을 느꼈다.



"애비 된 사람이 지 처자식을 저렇게 때려서야 되겠나... 쯧쯧."

"녹음이라도 해놓고 경찰에 신고할까 봐요."

"남의 집 일에 함부로 나섰다가 아주머니까지 괜히 일 나면 어째요."

"그래도 모른척할 수는 없잖아요. 저 집 애들도 아직 어린데..."



경숙은 마주칠 때마다 씩씩하게 인사하던 아이들을 떠올렸다. 흠 없이 크는 줄 알았던 아이들이 집에서는 아빠에게 맞고 살 줄은 상상도 못 했던 터라 마음이 더 미어졌다. 어떻게든 아이들을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기에 경숙과 정호의 대화가 길어졌다.



"뭐가됐든 혼자 나서지 말고 저를 꼭 부르셔요."

"아유, 그렇게 말해주시니 너무 든든하죠."



정말 다행인 점은 이 일을 함께 고민할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정호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고마움을 표현한 경숙은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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