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야 너 그냥 여기 있어.
너가 가는 게 더 마음 불편해."
엄마는 집에 가겠다는 나를 끝내 말렸다.
그 마음이 뭔지,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지금의 엄마가 배 부른 딸을 돌보는 건 무리였다. 집에 가면 남편은 바쁘기 때문에 내가 나를 챙겨야 할 테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부모님께 이래저래 민폐를 끼치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일은 조금 덜 수 있지 않을까.
“아니 그냥 갈래!”
“아니 그냥 있어!”
이런저런 실랑이 끝에 결국, 나는 그럼 조금만 더 친정에 있어보기로 했다. 엄마 상태가 더 안 좋아지면 그때는 정말 집에 가겠다고 덧붙이면서. 사실 내가 고위험 산모만 아니었어도 고민 없이 집에 갔을 텐데. 나는 출산까지 보호자가 필요한 상황이라 체력이 약한 엄마에게 계속 의지하게 되는 현실이 너무 싫고, 미안했다. 어서 출산해서 이 무력한 입장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저 시간이, 빨리 흘러주기를.
코로나 격리가 끝나고, 산부인과 정기검진일이 되었다. 이날은 임신성 당뇨 검사를 받는 날이었다. 임당 검사는 평소 혈당 수치나 식단과는 큰 관련 없는 '그냥 운'이라는 얘기를 어디서 주워 들었지만, 그래도 전 날엔 최대한 클린 하게 먹으려고 노력했다.
임신성 당뇨 검사는 공복 혈당을 잰 뒤, 단 포도당 음료를 마시고 2시간 뒤 수치를 확인하는 검사다. 검사라고 하니 살짝 긴장은 됐지만, 평소 건강검진에서 당화혈색소가 5.0이 나왔던지라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상도 못하게 첫 검사에서 수치가 기준치를 훌쩍 넘어서 재검 대상이 되어버렸다.
‘아 제발…..쪼옴…!!'
짜증이 확 치밀었다. 코로나 끝나자마자 이번엔 임당이라니. 세상이 나한테 너무 가혹한 거 아닌가??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임신성 당뇨는 두 번의 검사 결과로 확진되니 아직은 한 번의 기회가 더 남아있었다.
'재검 땐 잘 나올 거야!'
애써 희망회로를 돌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오자 긴장이 풀리면서 허기가 몰려왔다.
'대체 어제는 뭐 하러 그렇게 건강하게 먹었지?'싶었다.
억울하고 속상한 마음에 비뚤어진 심정으로 짜장면을 시켰다. 시커먼 짜장 소스가 마치 타들어가는 내 속마음을 닮은 것 같기도 했지만, 그건 그거고—짜장면은 또 미친 듯이 맛있어서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었다.
며칠 뒤 임신성당뇨 재검을 위해 다시 병원을 찾았다. 재검은 훨씬 더 힘들었다.
첫 검사가 ‘공복+2시간 후 혈당’만 보면 됐다면,
재검은 ‘공복+1시간+2시간+3시간 후 혈당’까지
총 네 번 채혈을 해야 했고
그 사이엔 물 한 모금도 마시면 안 됐다.
로컬 산부인과에선 이럴 때 임산부들 편하게 기다리라고 베드도 제공해 준다던데, 여기선 베드는커녕 내가 앉아 있을 자리를 사수하는 것도 전쟁이었다.
채혈도 1층 채혈실에서 다른 외래 환자들과 함께 대기해야 했다. 당 섭취 후 정확한 시간마다 채혈을 해야 해서
혹시나 타이밍을 놓칠까 불안했던 난 매시간마다 발을 동동 굴렀다.
그렇게 긴장 상태로 배고픔을 참고 채혈만 네 번을 하니 나중엔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져서, 마지막 채혈이 끝나자마자 다급히 단팥빵을 거의 삼키듯 욱여넣었다.
‘각오는 했는데… 이 정도로 힘들 줄이야.’
더 슬픈 건 이제 검사만 끝난 거지 진료는 아직이라 집에 가려면 한참 멀었다는 거다. 이날은 정말이지 하루 종일 병원에 갇혀 있었던 것 같다.
임당 재검은 측정한 혈당 수치 네 개 중 두 개 이상이 기준치를 초과하면 확진된다. 나는 초조하게 병원 앱을 새로고침하며 결과가 뜨기를 기다렸다.
공복 혈당 – 통과.
1시간 후 혈당 – 통과.
‘오? 좋은 느낌인데?
개고생 한 보람이 있구나.’
처음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조금 뒤, 2시간 후 혈당이 떴다.
– 아웃.
‘아... 안 돼. 제발 마지막 하나는 정상이길…‘
불안한 마음으로 계속 핸드폰만 쳐다보던 나는, 진료실에서 내 이름이 부르기 직전에 마지막 수치를 확인했다.
… 또 아웃?!
멍한 표정으로 진료실에 가니 교수님은 “당뇨 관리도 해야겠네~” 하며 웃으셨고 나는 허탈한 얼굴로 “네... 그러게요…”라며 따라 웃었다.
사실 임신성 당뇨는 그렇게 희귀한 케이스는 아니다.
그치만 나는 워낙 여러 일들을 겪어온 터라 적어도 이거 하나만큼은 무사히 넘어가길 바랐다. 남은 임신기간 동안 밥은 좀 편하게 먹고 싶었는데, 이제는 철저한 식단 관리를 시작해야 했다. 안 그러면 매일 맞는 크녹산 주사에 인슐린 주사까지 추가될 수가 있었다. 그건 제발 피하고 싶었다.
진료실을 나와 간호사님께 앞으로의 일정을 안내받았다. 임당 산모는 무슨무슨 교육을 들어야 한다고 했는데 간호사님껜 죄송하지만 이미 병원에서 7시간 정도를 버티고 안 좋은 결과까지 들은 그날은 더 이상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아서 대충 네네 하며 병원을 빠져나오기 바빴다.
집에 와서 뭘 먹고 좀 쉰 다음 아까 받은 안내문을 다시 들춰보았다. 나는 임신성 당뇨 관련 수업을 두 개 들어야 했다. 보통 로컬 병원은 이렇게 뭐 수업까진 안 하는 것 같던데, 대학병원이라 그런지 임당 산모 관리가 꽤나 엄격하고 빡빡했다.
며칠 뒤 예약된 수업일에 병원을 찾았고 우선 병원 영양사분에게 1:1로 식단 구성 수업을 받았다. 혈당을 천천히 올리기 위해서는 채소 → 단백질 → 탄수화물 순서로 음식을 먹을 것, 그리고 식사 시간은 20분 정도로 최대한 길게 천천히 가지는 게 좋다는 걸 배웠다. 그리고 당뇨 교육실로 이동해 임신성당뇨 대한 개념과 혈당 재는 법에 대해서 배웠다.
교육이 다 끝나고 강사님께 혈당 측정기와 채혈침을 받으니 ‘아 이제 찐으로 임당 산모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왔다. 가끔 남편이 손가락을 찔러서 혈당 체크하는 걸 볼 때마다 ‘으… 저런 걸 어떻게 해… 독한 놈...' 뭐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이제는 내가 그걸 하루에 다섯 번씩 해야 할 처지가 되었네.
진짜 웃기지도 않았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이 짓도 몇 번 하다 보니 나중에는 무슨 기계처럼 무표정으로 손가락을 콱 콱 찌르고 있더라. 심지어 한 번에 피가 넉넉히 안 나오면 아까운 시험지만 버리게 되니까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손가락 귀퉁이에 피를 모아서 한 번에 찌르는 스킬도 익히게 되었다.
솔직히, 크녹산 주사로 이미 단련된 내게 혈당체크는 별 것도 아니었다. 임당 식단으로 먹어야 한다는 게 좀 생소하고 막막했지만 다행히 나는 친정 엄마가 씻은 채소(양상추+오이)를 늘 준비해 주셔서 그나마 식단을 차리는 게 수월했다.
내 식단은 주로 채소+삶은 계란+통밀빵의 조합이었고 가끔 점심에는 햄버거나 파스타, 씬피자 같은 양식도 시켜 먹었다. (물론 먹기 전 채소는 꼭 먼저!)
처음엔 그런 서양 음식이 식 후 혈당을 제일 많이 올릴 거라 생각했는데 병원에서 배운 대로 적은 양을, 천천히, 채단탄 순서로 먹었더니 혈당 수치는 생각보다 안정적으로 나왔다.
오히려 김밥을 먹었던 날은 천천히 먹었는데도 혈당 수치가 바로 튀었다. 건강식인 줄로만 알았던 김밥이 혈당을 이렇게나 많이 올릴 줄이야? 배신감이 들어 이후로는 김밥을 한동안 입에 대지 않았다.
임신 20주 후반으로 향하자 아기가 커진 만큼 태동도 강해졌다. 나는 매일 배에 자가 주사를 놔야 하는데 배가 점점 불러오니 태동이 너무 신경 쓰여서 주사 놓기가 힘들어졌다. 교수님께서 주사 바늘이 절-대 아기에게 닿을 리 없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하셨지만, 그래도 기분은 영 찝찝했다.
간호사님께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하고 여쭤보니 주사는 허벅지에 맞아도 된다고 하셔서 그 이후론 쭉 허벅지에 맞았다. 처음엔 익숙하지 않아 더 아프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맞다 보니 심리적 불안이 덜 해서 아 확실히 이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사 위치를 바꾸니 얼룩덜룩했던 배는 서서히 깨끗해지고 이번엔 허벅지가 시퍼렇게 물들기 시작했다.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또 비참하다거나 슬프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 멍이 내가 아가를 지켜내고 있다는 영광의 상처처럼 느껴졌다. 너무 긍정적이었나?
그래서 나는 심지어 가끔 엄마에게 일부러 멍 자국을 보여주며 까르르 웃었다. 그때마다 엄마는 으악하며 시선을 피했지만 말이다. 그때는 엄마의 반응이 조금 서운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자기 딸 몸이 멍투성인데 어느 부모가 웃으며 그걸 볼 수 있을까? 정말 난 생각이 너무 모자라다.
어느덧 임신 24주를 훌쩍 넘겼다.
교수님이 “출산하려면 최소 이 주수는 넘겨야 한다.”고 하셨던 그 시점.
그렇게 나는, 또 한 고비를 버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