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우리는 인종을 막론하며 하나의 공통된 감정을 갖는다.
그것은 '사랑'이다.
사랑에 대해서는 자신의 반려동물 혹은 부모님의 사랑 등
말로 못 다할 사랑의 주제는 많지만 오늘은 사랑이라 하면은
제일 먼저 떠오르는 남녀 간의 사랑을 말해보려 한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내 사랑은 다 이루어지지 않는다.
모든 동기부여의 주제는 긍정과 자신감이라고 말하지만
사랑에서는 그렇지 않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 만큼 잘 되는 것도 아니고
망치는 것 또한 아니다.
그저 염원하는 것 뿐이다.
사랑으로 인하여 상처받고
사랑으로 인하여 성장한다.
우리는 연애가 결혼의 예행 연습이라서 말하고는 한다.
이 말에서는 어쩐지 위로를 하는 뉘앙스가 느껴진다.
이 말을 연인과 헤어진 남녀들에게 하기 적절한 소리인가?
아니면 사랑 하나로 세상을 누비고 다녀도 두렵지 않을
연인들에게 적절한 소리인가?
인간들은 많고 많은 감정 중에 사랑에 대해서 논한다면
언제든지 귀를 열고 정원을 가꾸어 놓을 준비가 되어있다
우리들의 가장 약한 부분이면서도
가장 성숙하며 강하기도 한 부분이기도 하다.
누군가에게는 좌절을 누군가에게는 행복을 선사한다.
분노를 억누를 수는 있어도 사랑은 억누르지 못하며,
슬픔은 견딜 수 있지만 사랑과 연결된 슬픔은 통곡 뿐이다.
나는 늘 생각해왔다.
또한 나도 상처를 받고 행복한 적도 있었기에 더더욱
시든 꽃에 물을 주면 살아날까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것은 염원이었다.
마음이 100퍼센트 맞는 사람은 없다지만
안맞는 것들을 맞춰가며 평생을 약속하는 사람들에게서부터
나또한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답을 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구태여 답을 구하지는 않았다.
답을 구한다 한들 그들의 빌린 경험으로 상대방에게
어디까지 통하고 마음을 움직일지는
미지수일 것을 알았던 것이다.
누군가는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라고 한다.
나는 늘 짝사랑이 시작되면 주변에 도움을 잘 청하고는 했다.
그치만 내가 못난 탓인지 사랑이 시작되면
내 마인드가 변절되어서 그런 탓인지는 몰라도
어느샌가부터 좋아하는 인연이 생기면 진심보다는
'이 사람과 잘 될 확률'이라는 성숙하지 못한 숫자 게임에
놀아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일이 잘 풀려도 사랑 끝은 따뜻하지 않았으며
비판적으로 사랑을 바라보았다.
과거의 나는 뭐가 그렇게 겁이 나고
어차피 안되는 것들에게 그렇게 물고 늘어지며
마음에 담아두고 슬퍼하기를 반복하였는지...또 추후에는
자신의 마음과 정신을 자학하며 있었는지 말이다.
그때의 나는 사랑의 말로가 평탄하지 않으면
정말로 진심을 다해서 슬퍼하였다.
하지만 돌아보니 그렇게 자신에게 문전박대를 하듯
몰아세웠던 것이 지금은 과거의 내가 안쓰럽게 느껴진다.
오래도록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을 못느껴서 그런가
그저 내가 오만해진 것인가는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다.
준비되지 않은 것과 성숙하지 않은 것은 별개다.
만약 지금 나에게 사랑이 찾아온다면
그때만큼의 순수한 순애보의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또 다시 사랑이 온다면 나는 누군가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나아가며 사랑을 쟁취할 수 있을까?
요즘 여러 의문들을 생각하며 혼자 해석하고 있다.
솔직히 다시금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어서 나의 내면에서
원하는 것을 얻으라고 말한다면 나는 해내지 못할 것이다.
한 때 사랑으로 인한 문제로 자존감이 바닥을 뚫었던 나는
지금처럼 여실히 모든 것을 자신감있게 해내고 있지만
사랑만큼은 아직 성숙하지 못하다.
처음에 자존감을 올리려고 할 때는 그때 당시 가장 힘들었던
사랑을 배척하고 그 외에 것들을 무기로 삼고자 다듬은 결과는 사랑이 시작되면 좌절감부터 느끼고 말 것이라고
지금은 나는 확실히 느끼고 짐작하고 있다.
준비는 되었지만 과거의 징크스로 성숙하지 못한 것이다.
누군가는 나에게 의문을 가지며 해결책을 주려하였다.
'계속 과거~과거~ 그러는데 아직도 과거에 갇혀서
그 문제들을 너 자신이 직면하지 않으려고 하는 거 아닐까?'
과연 훌륭하고 본질적인 말이다.
객관적인 문제로 보면 이것이 참으로 훌륭한 정답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좋은 조언을 듣고도 예전에 문제들을
직면하지 못하였다.
아니...직면하지 않았다.
결국에 그 문제들을 직면하는 것은 나의 성장을 위한 것보다는 그 사람들과 함께했던 불행을 회상하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내 곁에 연인이 되었던 90퍼센트의 이성들은 언제나
나를 이용하기 바빴고 이용 가치가 없어지면 곧잘 버리기도
하였다.
나는 버려진 줄도 모른 채 늘 최선을 다했지만 말이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없던 것이었다.
경험과 성장을 했다고 치면 분명 현재의 나는 사람을 보는 눈이 매우 매우 좋아졌다.
그렇기에 그때의 기억들을 현재의 눈으로 본다면
그들에게 분노와 역겨움 밖에 안보이는 나머지
마음 속으로 저주까지 해버리고는 한다.
또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은 찝찝하기는커녕
오히려 속이 시원해진다.
다른 사람이 이런 내 입장을 보면은 당연지사
도덕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옳바르지 않은 생각이기에
좋지못하다는 생각을 할 것을 안다.
그렇지만 언제나 긍정에만 목매어 답을 찾지는 않을 것이다.
비참한 상태의 날 사랑하려 애쓰지 마라.
이것은 과연 올바른 방법일까? 아니면
겁이 많은 자신에게 조심성을 부여하여
견제하도록 하기 위함일까?
자신을 사랑해야 타인을 사랑할 줄 안다고? 아니 반대다.
사랑이란 불시착과 같아서
어설프게 준비를 하게 되면 말로는 언제나 좋지 않다.
불행한 자신을 위해서 애쓰지 마라.
당신도 당장의 답이 없다는 것 쯤은 알 것이다.
그것을 찾기 위해서는 비참한 자신을 사랑한 후에
답을 찾으려고 할 것이다.
마치 고통의 시간 속에서 날 모질게 괴롭힌 후에 무뎌져서
고통이라는 것이 자신의 성장과 깨달음을
촉진시켰다고 믿는 것처럼.
그러니 굳이 상처 받은 현재의 나를 사랑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이성적이면은 ”못난 나의 모습도 사랑해라.“
라는 말이 얼마나 무책임한 말인지 알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계속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세상을
살아가려하며 그 속에 불꽃이 있다고 믿는다.
단지 이것은 예전의 방식을 그리워하는 것 중 하나다.
내가 수기한 글 중에 ”낭만실조“ 라는 글이 있다.
사람들은 이미 낭만의 뜻 따위는 잊고서는
마음이 웅어리 진 것 같은 효과를 낭만이라 칭한다.
이런 세상 속의 비참한 자신을 남에게
맡겨두어서야 되겠는가?
전달하려는 바는 다음과 같다.
주변의 영향을 받고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본인 의지가 아닌 것이다.
그저 남들이 하니까...
그렇게 하라고 하니까...
남들이 겪은 경험을 말해 주니까...
나보다 오래 살았으니까...
똑똑한 사람이니까... 등
외치고 돌아오는 메아리는 정말 많다.
이와 같은 것들이 아니고
진정으로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과
진심을 다해 내가 받은 상처를 이해할 수 있다면
그때가 당신이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 때다.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는 과정까지의 이유는 생각보다 많다.
생각없이 가슴으로만 사랑하게 되면
더욱 큰 상실감과 절망이 내게로 온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리고 잊지말자.
무엇이든 해결책이라는 보험이 있어야지
자신이 겪은 어려운 상황들을 조금 더
일찍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만 알아두자.
내일의 아침(희망)도 결국에는
오늘의 밤(상처)이 있어야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을.
아마도 사랑할 때 우리가 경험하는 감정은 우리가 정상임을 보여준다.
사랑은 스스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안톤 체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