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죄라면, 삶은 형벌이다

신이 만든 금기, 인간이 만든 형벌

by sun

그들은 늘 말한다.

“이 책은 위험하다.”, “이 내용은 자극적이기에 위험하다.”

그러나 진정 위험한 것은 이 두 가지가 아니라

그 책과 내용을 두려워하는 인간들의 겁에 질린 양심이다.


금지서적이란,

언제나 거짓이 아닌 진실이 가진 힘의 증거다.

그들은 지배하고 싶었지만, 이해하기를 두려워했다.

그들은 통제하고 싶었지만, 생각하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그들은 불을 들고 와 책을 태웠다.

책이 아니라 스스로의 불안을 태워 없애기 위해.


아래의 내용을 검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읽기 바란다.


삶은 언제부터 축복이었는가.

누가 그것을 축복이라 불렀는가.


인간은 태어난 순간부터 ‘살아야 한다’는 강령 아래 묶인다. 울음과 동시에 부여된 첫 번째 의무가 바로 생존이다.

그러나 그 생존은 언제나

‘타인의 필요’와 ‘체제의 지속’을 위한 명령일 뿐이다.

개인의 의지가 아닌, 사회의 안정과 윤리의 정당성을 위해

인간은 살도록 길들여진다.

죽음을 선택하지 않는 자를 “정상”이라 부르고,

삶에 대한 의문을 품은 자를 “위험한 존재”로 분류한다.

이 얼마나 완벽한 구속인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곧 복종의 증거가 되는 체계 속에서

자유란 오직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자의 발끝에만 남는다.


‘죽음은 죄’라는 명제는 인간의 도덕을

가장 교묘하게 지탱하는 장치다.

죽음을 악으로 규정함으로써,

사회는 스스로를 선의 수호자처럼 위장한다.

그러나 그 ‘선’은 언제나 폭력적이다.

사람들은 자살을 막는다는 이름으로

타인의 고통을 통제하고

생명을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개인의 절망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그들은 “살아야 한다”는 말로 타인의 내면을 점령한다.

그 강요는 위로처럼 들리지만 실상은 협박이다.

삶의 명령은 신의 음성이 아니라 사회적 세뇌의 반복이다.

‘살아남으라’는 말이 진정한 사랑이라면,

왜 그 말 뒤에는 언제나 공포가 따르는가.


삶은 선이 아니다.

그것은 의무의 연속이며, 벌의 형태를 하고 있다.

인간은 의식이 깨어나는 순간부터

무한한 평가와 비교의 형벌 속에 던져진다.

존재의 무게는 타인의 시선에 의해 측정되고

생존은 경쟁으로 정당화된다.

‘사는 것’은 자유의 증거가 아니라 굴종의 결과다.

인간은 살기 위해 일하고 일하기 위해 견디며,

견디기 위해 자신을 속인다.

그 속임수는 문명이라 불리고,

그 문명은 다시 ‘삶의 가치’로 포장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죽을 권리’를

박탈당한 자들의 체념일 뿐이다.


자살은 결코 실패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사회의 명령에서 벗어나는 마지막 선언이다.

‘나는 더 이상 너희의 윤리에 복종하지 않겠다.’

이 한 문장만큼 순수한 자유의 언어가 또 있을까.

자살은 삶을 거부하는 행위가 아니라,

강요된 생존의 질서에 대한 반역이다.

인간이 스스로 죽음을 택할 수 있다는 사실은

존재의 본질적 자율성을 증명한다.

그렇기에 체제는 그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자살을 범죄로 규정하는 이유는

그것이 질서의 균열이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이 죽음을 자신의 선택으로 이해한다면

도덕과 종교, 사회와 법은 모두 붕괴한다.

‘살아야 한다’는 명제가 무너질 때

인간은 더 이상 통제되지 않는다.


사회는 생존을 미덕으로 포장한다.

그러나 그 미덕은 고통의 침묵 위에 세워진다.

죽고 싶은 자들에게 “그래도 살아야지”라고 말하는 자들은, 자신이 얼마나 잔혹한 폭력을 휘두르고 있는지 모른다.

그들의 연민은 감시의 다른 이름이다.

“자살은 비겁하다”는 말은, 사실상

“고통을 끝낼 권리가 너에겐 없다”는 명령이다.

이런 사회에서 생명은 신성하지 않다.

그것은 단지 도덕적 통제의 수단이다.


죽음을 욕망하는 자는 죄인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가장 솔직한 인간이다.

그는 삶의 고통을 미화하지 않고 존재의 불합리를 직시한다. 그가 느끼는 무의미는 병이 아니라 통찰이다.

그가 선택하는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완성이다.

왜냐하면 그는 비로소 자신에게

귀속된 자유를 되찾기 때문이다.

삶이 강요된 무대라면 죽음은 스스로 막을 내리는 행위다.

그 퇴장은 비겁함이 아니라

의식의 주체가 스스로 내리는 마지막 판단이다.


삶을 신성화하는 사회는 결국 죽음을 모독한다.

죽음을 모독하는 사회는, 결국 삶조차 모욕한다.

인간은 자신이 왜 살아야 하는지를

스스로 정의할 수 있을 때만 진정으로 산다.

그렇지 않다면, 그 삶은 형벌이다.

생존은 신의 은총이 아니라, 체제가 부여한 족쇄다.

그러므로 죽음을 택하는 자는 패배자가 아니라,

그 족쇄를 끊은 자다. 그는 부정이 아닌 초월로 나아간다.


“죽음이 죄라면, 삶은 형벌이다.”

그 문장은 냉혹하지만 동시에 진실이다.

살아야 한다는 명령이 존재의 본질을 압박할 때

죽음은 해방의 다른 이름이 된다.

금기의 경계를 넘어선 자만이 안다.

진정한 자유는 언제나 생존 이후에 있다.


많은 이들이 비난할 주제일 것이다.

많은 이들이 꺼려할 주제일 것이다.

당연하다.

아직 자신이 해보지 못한 경험인 것과 동시에

생각조차 해보지 못한 상태이기에

청천벽력같이 느껴질 것이다


그럼에도

‘나로서 존재할 이유’를

끝까지 찾아낼 용기가 있는가?


삶을 버티는 자가 강한 것이 아니다.

끝을 직시하고도 눈을 뜨는 자,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도

스스로의 의미를 재정의하는 자만이

비로소 ‘산다’는 말을 할 수 있다.


삶이 형벌이라면, 그 속에서도 자유를 창조하라.

죽음을 거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만큼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