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착한 자를 먼저 데려간다

착한 사람을 먼저 태워야 굴러가는 사회

by sun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렇게 말해왔다.

착한 사람은 일찍 죽는다고.

그 말엔 씁쓸한 위로와 체념이 동시에 깃들어 있다.

마치 세상은 본래 불공평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그 부조리를 인정하기 싫은 인간의 자기 위안처럼 들린다.

그러나 만약 그 문장이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사회 구조가 만들어낸 잔혹한 진실의 반영이라면 어떨까.


착한 사람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약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그들의 선의를 소모품처럼 소비하기 때문이다.

도덕의 틀 속에서 타인을 먼저 배려하고,

불합리를 양보하며, 타인의 감정을 먼저 헤아리는 이들은

결국 구조의 톱니바퀴에 가장 먼저 닳아 없어지는 존재다.

선함은 인간의 이상이지만,

현실의 체계 속에서는 자기방어를 포기한 노출 상태다.

세상은 그런 순진한 선의를 알아보는 순간,

그를 ‘이용할 자원’으로 분류한다.


반대로, 오래 살아남는 사람들은 어떤가.

그들은 비겁하지 않다.

다만 ‘질서의 언어’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자들이다.

도덕과 정의는 집단이 생존을 위해 합의한 언어이지만, 권력은 언제나 그 언어의 ‘이면’을 다룬다.

선을 외치는 집단일수록 내부의 경쟁은 더 잔혹하며, 윤리를 말하는 이일수록 더 많은 것을 감춘다.

따라서 악한 자가 오래 사는 것은 부조리의 승리가 아니라, 세상의 규칙을 정확히 읽어낸 자의 생존 기술이다.


착한 사람은 ‘옳음’을 믿는다.

그러나 세상은 ‘결과’를 믿는다.

이 두 언어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착한 이는 늘 무너진다.

그는 타인의 평화를 위해 스스로의 분노를 억누르고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며,

정의를 말할 때조차 “너무 이기적인 건 아닐까”라고

자신을 의심한다.

그 순간, 그는 이미 도덕의 포로가 된다.

세상은 그를 칭송하되

그 칭송은 언제나 순종을 보상하는 미소일 뿐이다.


그러나 역설은 여기서 시작된다.

착한 사람이 일찍 죽는 세상에서

진짜 악한 자는 오래 살지도, 행복하지도 않다.

그들이 오래 살아남는 이유는

단지 ‘사라질 권리를 잃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득을 쥐고도 불안하다.

사람을 속이고도 잠들지 못한다.

권력을 가졌지만 그 권력은 끊임없이

누군가에게서 빼앗아온 잔해로 세워졌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의 ‘행복’은 체념된 양심의 무덤 위에서 피어난 꽃이다.

그러니 오래 산다는 것은

곧 영혼이 부패한 채로 유지되는 형벌이기도 하다.


이 불균형은 윤리의 실패가 아니라

인간 사회의 진화 과정에서

만들어진 자연스러운 불협화음이다.

공생을 위해 만들어진 도덕은

아이러니하게도 약자를 더 약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도덕은 언제나 ‘다수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착한 사람은 이 틀 속에서 개인의 정의를 지키려다

다수의 이익에 맞지 않는 순간 밀려난다.

반면 악한 자는 구조를 이용해 자신을 보호한다.

그들은 타인의 고통을 거래하고

불의조차 전략으로 변환시킨다.

그게 바로 ‘현대적 악의 생존 방식’이다.


결국 착한 사람의 죽음은 단지 신의 시험이 아니라

세상이 정의를 지탱할 능력을 잃었다는 신호다.

그리고 악한 자의 장수는 신의 무능이 아니라

사회가 스스로 만든 괴물과의 공존에 익숙해졌음을 의미한다.


세상은 선과 악을 상징으로 나누지만

현실의 질서는 훨씬 더 비열한 계산 위에 세워져 있다.

착한 사람은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무너지고

악한 사람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잃는다.

둘 다 불행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타인을 잃은 쪽의 손을 들어준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정의로운 자의 존엄’보다

‘이익을 지킨 자의 기술’을 더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다.


착한 자는 세상을 바꾸려다 죽고,

악한 자는 세상에 맞춰 살며 산다.

그리고 세상은 늘, 그 죽음을

"~를 위한 희생"이라고 결론내고 “아름답다”고 부른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