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인생을 위한 짧은 일어 책
흡사 일본어 학습 교재 같은 제목이지만 일본 생활의 현실과 언어적 차이를 솔직하게 담은 에세이다. 공부법이 궁금해서 골랐다면 실망할 거고 공부하는 마음이 궁금해서 골랐다면 충족될 책이다.
책의 세계는 안온하고 평안했지만, 그만큼 납작했다. 아무 답이나 찍어도 25퍼센트는 답을 맞힐 수 있는 납작한 세계. 현지에서 언어를 배우려면 사지선다의 세계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와, 틀릴 확률 99퍼센트의 세계로 몸을 던져야 했다. 집 밖만 나가도 지천으로 널려 있는 일본어 구슬을 꿰어가며 내 실력을 쌓아 올려야 했다. 지금 엮어나가는 구슬이 뭐가 될지는 모르지만. -26p
현지어를 거의 하지 못하는 채로 일본에 온 대가는 컸다. 새 나라에서 자신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다. 누구도 나를 대신해서 도쿄가스에 전화를 걸어줄 수 없고, 날아오는 온갖 고지서를 해석해 줄 수도 없고, 집 계약 내용을 듣고 이해해서 설명해 줄 수도 없다. 가족도 없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이 모든 대가는 나 혼자 오롯이 치를 수밖에. -32p
이 책은 일본 대학에서는 비원어민 교수로 영어를 가르치고, 강의실 밖에서는 초보 학습자로 일본어를 배우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글로 담았다. 작가는 응용언어학 전공자지만, 일본어를 체계적으로 배우거나 전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날 것의 언어 학습 이야기를 엿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일본어를 거의 읽지 못하던 문맹일 때, 집 앞에 날아온 요가 교실 광고지조차 읽지 못해 번역 앱을 사용하다 눈물을 찔끔 흘린 적이 있다'는 대목에서, 내가 처음 사회인이 되어 일본에 왔을 때를 떠올렸다. 당시 일본어를 거의 하지 못하는 채로 일본에 온 작가와 비할 바는 못 되지만 타국살이, 첫 독립, 첫 사회생활, 공장 근무, 언어 장벽으로 많이 깨지고 굴렀다.
나의 문화, 나의 경험이 낯선 문화, 낯선 언어와 교차하는 지점에 서는 것. 몇십 년 간 경험해 온 한국에서의 가치관과 생활 방식이 아닌 다른 나라의 문화에 자신을 맞춰 나간다는 건 쉽지 않은 부분이지만, 크게 부딪히고 더 크게 깨지면서 그 균열로부터 나의 세계가 비로소 확장됨을 깨닫게 된다.
언어 정체기에 빠져 있던 그때, 한국에서도 유명한 도쿄대 명예교수이자 사회학자인 우에노 치즈코의 도쿄대 입학 축사를 우연히 다시 접하게 되었다. (..)
도쿄대 최고가 되라는 말이 아니라, 노력해도 보상을 얻기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이 많으니 자신의 능력을 자신을 위해서만 쓰지 말고 나누라는 말. 자기 자신의 약함을 그대로 인정하고 서로 도우며 살라는 말. 약자가 강자가 되는 게 아니라, 약자가 약자 그대로, 자신 그대로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 이런 메시지를 원문으로 읽었더니 색다른 벅차오름이 있었다.
「そして強がらず、自分の弱さを認め、支え合って生きてください」 -85p
원어로 책을 읽어가면서 일본 사회에 대해서 새로 알게 된 것들이 많다. 일본은 남편을 主人(주인), 아내를 한국어의 안사람처럼 奥さん(奥는 '안'을 뜻함)이라고 부르는데 최근에는 어떤 변화가 있고 대체 표현은 무엇인지, 전업주부는 연금을 어떻게 받을 수 있는지, 기업의 일반직과 종합직의 차이는 무엇이고 왜 그런 차이가 생겼는지 등. 한국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많아서, 일본어 자체는 어려웠지만 흥미롭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88p
피나는 노력 끝에 일본어 의사소통에 큰 문제가 없게 된 작가는 일본어 공부와 연습을 지속해 나갈 동기를 잃어버린다. 모든 외국어 학습자들이 거치게 되는 난관이지 않을까. 마음에 불씨를 확 당기는 일이 있어야 공부를 지속할 수 있는데 열의는 이미 미지근한 물처럼 식어버린 지 오래. 작가의 경우 원어로 좋아하는 학자의 축사나 책을 읽으며 언어 학습의 동기를 찾았다.
내 언어 공부의 동기는 무엇일까. 나는 항상 커리어적으로 목마른 사람이라, 더 배우고, 성장하고 싶은 욕구가 강한 사람이다.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해서 장래적으로 한국과 일본을 넘어 글로벌 업무를 담당하는 샐러리맨의 모습을 그렸다. 그런데 최근 사업부로 이동하고 와서 머릿속에 있는 걸 상대방에게 문장으로 전달함에 있어 내 어휘와 표현력이 많이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다. 돌이켜보면 소위 '각 잡고' 일본어를 공부한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래서 요즘에는 책장 구석에 박혀 있던 일본어 단어책을 다시 꺼내 외우거나, 원서책을 읽으면서 다시금 마음의 불씨를 지피고 있다. 나의 경우 더욱 성장하고 싶은 마음이 언어 공부를 지속하게 되는 가장 큰 동기이다.
투명하고 섬세한 색과 조곤조곤한 소리. 이 특징은 언어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일본어는 좋아한다는 감정을 '좋아(好き)'라고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신경 쓰여(気になる)'로 표현하기도 한다. -136p
일본어로 감정을 듣고 말하는 건, 감정을 마음속에서 빚어내, 일본어의 색채를 입혀서, 일본어의 음량으로 전달하는 과정이었다. 한국어는 진하고 선명한 아크릴 물감으로 칠하는 아크릴화, 일본어는 옅고 투명한 수채화 물감으로 그려가는 수채화 같았다. 내 속에 있는 감정은 하나인데, 어떤 언어를 골라서 표현해 내는지에 따라 색채와 톤이 달라졌다. -140p
서로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는 일본인의 공간 감각은 언어에도 그대로 들어와 있다. 일본 사람들은 '~라고 생각합니다(~と思います)' 같은 표현을 자주 쓴다.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할 때 한국에서는 '먼저 시장 상황에 대한 발표를 한 후에 질문을 받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일본에서는 '먼저 시장 상황에 대한 발표를 한 후에 질문을 받고 싶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는 식이다.
일본어는 문법도 타인의 공간을 함부로 침범하지 않고, 자신의 공간 안에 남아 있기 위해 애쓰는 것 같았다. 직접적으로 말을 걸기보다 협조를 구하는 느낌이랄까. -146p
언어에 화혼양재는 있을 수 없기에 언어를 익힌다는 건 어쩌면 새로운 나라의 문화를 배우려는 태도로부터 시작된다. 표정도 목소리도 억양도 생각하는 방식마저 조금씩 다르니 또 하나의 자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외국어를 할 줄 아는 것이 단순한 능력치의 확장에 그치지 않고 나의 세계가 함께 넓어지는 거라고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두근하다. 내가 다른 외국어 공부에도 도전하는 가장 큰 이유다.
친구 집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도쿄에서 버스를 탄 건 처음이라 계속 지도 앱을 확인하며 앉아 있었다. 드디어 다음이다! 방송이 나오자마자 짐을 챙겨 손잡이를 따라 출구 쪽으로 움직였다. 문 앞에 딱 서서 하차 준비 완료. 그런데 문 앞에 선 채로 정류장을 기다리다 깨달았다. 이 버스 안에서 버스의 규칙을 따르지 않은 건 나 혼자뿐이라는 사실을. 그 규칙은 너무 간단했다. "버스가 완전히 정차한 후 하차하세요." -157p
한 번은 일본 공항버스에서 “왜 이렇게 늦게 내리는 거냐”며 불평하는 한국인 관광객을 본 적이 있는데, 일본에서 버스 정차 전에 미리 일어서는 것은 반칙이라 그렇다.
한국처럼 달리는 버스 안에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미리 문 앞에 이동한다면 곧바로 “위험하니 버스가 정차하여 문이 열릴 때까지 자리에 앉으시라”는 운전기사의 방송이 흘러나온다. 버스가 빨리 달리지도 않고 안전할지라도 말이다.
돌아보면 일본에서 일하는 동안, '일'과 '푸라이베-토'는 온과 오프 스위치처럼 딸깍딸깍 전환되었다. 나는 이 학교에서 일한 지 3년이 넘어가도록 상사의 메신저 아이디도 몰랐다. 지금도 휴대폰 번호는 서로 모른다. 상사의 메신저 계정을 알게 된 것도 학생에게 응급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그 일이 없었다면 지금도 모르고 있을지도. -208p
동료 그 누구도 "몇 살이에요?", "남자 친구 있어요?" 같은 사생활에 관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이 먼저 이야기하지 않으면 아무도 묻지 않았다. 이웃 연구실을 쓰는 동료 선생님이 기혼자였다는 것도 몇 년이 지나고야 알았다. 나도 묻지 않았고, 선생님도 이야기하지 않았고, 그 정보가 필요하지도 않았으니까. 서로 관심도 없고 정도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이쪽이 더 편했다. -212p
한국에서는 타인을 처음 만났을 때에 나이나 결혼 여부, 출신 지역 등 사적인 정보를 일단 묻고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 이런 사적인 영역의 질문은 터치하지 않거나 관계가 아주 가까워진 후에 물어보는 게 상식이다.
한국인이 일본에서 친구를 사귀는 것이 어려운 이유가 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일본인 친구와 사귀는 과정은 마치 축구 선수가 빌드업을 하듯(..)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てもらう'는 한국어로 직역하면 '~해 받다'라는 뜻으로, 나와 타인의 선을 넘어가지 않고, 내 선 안에 머무르며 '해 받고 싶다'라고 말한다. "물 좀 주세요"와 "물 좀 받고 싶습니다"의 차이. 이 표현에 쓰인 동사 もらう는 영어의 do처럼 흔히 쓰이지만, 접할 때마다 차갑다는 느낌을 받았다. 뭐가 이렇게 정이 없어. 왜 남과 나 사이의 선을 이렇게 찍 그어버리는 거지. 그냥 시키고 싶으면 솔직하게 "해줘"라고 말하면 되잖아. 남에게 민폐를 끼치지 말라는 정서가 언어에도 그대로 있네. 이런 정 없는 언어, 정 없는 나라라니! -224p
이 나라에서 무언가를 살 때 선물용이라고 말하면 종이봉투를 두 개 준다. 하나는 내가 집까지 들고 갈 때 쓰기 위한 봉투, 다른 하나는 선물할 때 깔끔하게 넣어서 주기 위한 봉투. 비 오는 날에는 종이가방에 비닐 커버까지 씌우고, 테이프로 꼼꼼히 싸매서 봉투가 젖지 않게 한다. 이 나라는 타인과 나 사이의 선이 왜 이렇게 두꺼울까. 그렇게 선이 두껍고 견고한 곳이니까 부탁을 할 때도 'てもらう' 같은 표현을 쓰는 거겠지. 이 정 없는 나라.. -226p
새 봉투에 선물을 넣는 게 익숙해졌을 때쯤 알게 되었다. 이 나라는 선을 지키는 게 그 나름의 정이구나. 뭘 사서 먹이는 게 아니라, 뭘 사서 예쁘게 놓아둔 뒤 원하면 가져가라고 하는 것. 플러스를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니라 마이너스가 되지 않게 하는 것. 선물을 하나 사도 받는 사람의 기분을 생각하는 것. 일상생활에서 다른 사람이 불편하지 않도록 하는 것. -227p
한국과 일본에서 '진짜' 정이란 무엇인가를 해석하는 관점이 꽤 다를 수 있다. 한국의 정이 선을 넘으면서 서로 챙겨주는 거라면, 일본의 정은 상대의 선을 최대한 지켜주려는 노력이라는 것. 개인적으로 인간관계에 있어 한국과 일본의 차이를 가장 명확하게 정의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음식의 1인분 기준이 한국과 일본에서 다른 것처럼, 저는 일의 1인분 기준도 한국과 일본이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저는 일본이 1인분의 기준에 달할 때까지 좀 더 사람을 기다려주고, 성장을 도와준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먼저 '신졸(新卒)'이라는 단어가 있죠.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인턴이나 계약직 등 경력을 쌓은 사람이 신졸 지원을 할 수는 없고, 제2신졸 혹은 경력직으로 지원해야 하고요. 이렇게 취업을 처음 하는 사람을 보호해서 그 사람들끼리만 경쟁시키는 문화가 저에겐 아주 새로웠어요. 한국에는 반대로 '중고 신입'이라는 단어가 있거든요. 이미 일해본 경력이 있어서 바로 1인분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원하다 보니 생겨난 단어입니다." -236p
일본에 와서 한국과 다르다고 느낀 것 중 하나는 한국과 비교해 일본은 '효율'보다는 '느림의 미학'을 추구한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많다. 스피드보다는 디테일이 중요하고,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한다. 처음 일본에 와서는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한 나로서는 이런 일본 문화에 답답함도 느꼈다.
이런 일본의 특징은 신입사원 연수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일본에서 신입사원 연수와 교육을 받으며 느낀 건, 한국에서 한두 달이면 끝낼 교육을 일본은 굉장히 긴 호흡을 가지고 처음부터 하나하나 떠 먹여준다는 점이었다. 일본은 신입사원에게 컴퓨터 켜는 법부터 가르쳐준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외국인이기 때문에 남들보다 배움에 시간이 더 걸리는 나로서는 일본의 문화로 이득을 보고 있는 부분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과 불화하고 있는 느낌 받은 적 있으세요?" 미국과 한국에서 함께 연구하고 있는 동료들에게 던졌던 질문.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할지, 아니, 어느 스크립트에 맞춰 연기를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배역이 이리저리 섞여 무엇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248p
출근해서 영어 선생으로 일본 학생 앞에 서면 '버터 묻은 발음'으로 열심히 영어를 해야 할 것 같았고, 동시에 학생이 이해하지 못하면 일본어로 바꾸어 친절하고 상냥한 여선생이 되어야 할 것 같았고, 한국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나오면 BTS와 트와이스의 나라에서 온 사람으로서 홍보 대사가 되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학교 정문을 나서는 그 순간 보통 사람 1로 돌아와서 주변 일본 여성들처럼 행동해야 튀지 않을 것 같았다. -248p
영어, 일본어, 한국어를 가로지르며 사는 이 틈새 공간에서는 어느 공간의 스크립트를 따르지 않아도 되었다. 네이티브가 없으니 네이티브가 아닌 사람들끼리 규칙을 만들면 되는 거였다. 이 틈새 공간의 문화는 이 공간을 거쳐 가는 사람이 만들면 되었고, 어느 한 곳의 문화나 규칙을 따를 필요도 없었다. (..) 내가 내 스크립트를 써 내려가면 끝. 어디에도 속하지 않아서 불안했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않아서 자유로웠다. 숨이 탁 트여왔다. -252p
한국, 미국을 거쳐 일본에서 살고 있는 작가는 언어를 넘어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특히 일본 여자 스크립트를 답습하게 되었다는 부분은 일본에 사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공감하지 않을까.
입사하고 일본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일을 하다 종이에 손을 베인 적이 있다. 옆에 앉은 분께 혹시 반창고 있으시냐 물었더니, 가방을 뒤적이시며 '없네. 미안, 내가 여자력(女子力)이 없어서..' 라며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이셨다. 또 어느 날은 매일 회사에 도시락을 싸 오는 분을 모두가 여자력이 높다며 치켜세웠다. 참 적응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당시엔 왠지 나도 그렇게 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일본에 산다고 일본인처럼 되거나, 한국에 산다고 한국인처럼 되거나, 미국에 산다고 미국인처럼 될 이유는 없다. '일본인은 원래 이러니까'라는 말은 일본 사회에 뿌리가 없는 사람에게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 남이 보는 자신과 내가 보는 자신을 일치시킬 필요도 없다. 그저 일본과 한국의 틈새 그 어딘가에서 나답게 유영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