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에는 육개장이 없어서
이 책은 플랫메이트 50대 독일인 남성 요나스와 20대 한국인 여성 성진이 한 집에서 같이 사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요나스는 '성진'이라는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하지 못해 '숭진'이라 부른다. 남자와 여자가 한 집에서 동거를 한다는 게 나에겐 너무나 생소했는데 집세가 비싼 베를린에서는 홈쉐어링이 흔한 주거 형태라고 한다.
여자 플랫메이트가 있음에도 팬티 바람으로 집안을 돌아다니고, 바닥에 떨어져 먼지가 가득 묻은 식재료나 곰팡이가 핀 딸기를 아무렇지 않게 입에 가져다 대는 요나스는 번번이 성진의 비위를 상하게 만든다.
작가의 말을 빌리면 '치가 떨릴 정도로' 자주 노크를 해대 진절머리가 나다가도, 누군가 집에 침입한 것 같다는 성진의 부름에는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와 감동을 준다. 종종 인종차별적이고 흉보기를 좋아하지만, 커피와 아침 식사를 챙겨주는 일이 삶의 기쁨이라고 말하는 뭐랄까, 허술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마성의(..) 아저씨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반 친구들에게 '인종차별이 맞아'라는 말을 종일 들었는데 나는 자꾸만 확인하고 싶었다. 괜히 화를 냈는지 후회되기도 했고 내가 이상해 보일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보복도 두려웠다. -92p
베를린에서 좀 더 지내게 되면서 알게 된 일이지만 인종차별은 상대방의 의도에서는 선한 면을 찾고 나의 반응에서는 못난 점을 곱씹게 한다. -92p
작가가 독일에 넘어와 잠시 머무름에서 진정한 삶으로, 치열하게 살아남는 과정은 자신과 배경, 생각, 인종, 나이마저 다른 요나스를 이해하는 과정과 흡사하고 느꼈다.
이방인이 다른 나라에 뿌리를 내리는 과정은 상상 이상으로 더 고되다. 인종차별은 경험한 적이 없지만 타국에서 산다는 건 언어와 문화 차이에서 오는 힘듦은 물론이고, 혹여 이곳에서의 삶이 배척당하지 않을까 내 언행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끝없는 자기 검열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이 부분을 읽으며 '사람 사는 건, 외국 생활이란 건 역시 다 비슷하구나'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안도감마저 들었다. 망망대해에 아슬아슬 떠 있는 조각배 같지만 파도에 몸을 맡기며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미치광이들은 의외로 다른 세계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101p
이 문장을 하이라이트 표시해 놓은 게 왠지 웃기다. 이런 담백하고 꾸밈없는 문체가 좋다. 어쩌면 작가의 마음가짐에 더 가까울 지도 모르겠다.
나는 오늘 너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얘기를 하는 일이 즐거워. 그게 전부야. -179p
무엇보다 나는 그저 지금의 삶이 행복하고 즐거워. 내가 지금 살아 있으면 됐어. -180p
요나스는 현재를 사는 사람이었다. 그는 재산도, 야망도 없었지만 좋아하는 일상으로 하루하루를 채우는 사람이었다. 일주일에 많아야 이틀 정도 일하면서 남는 시간엔 기타를 치거나 시를 썼다. 여름이면 캠핑을 가고, 겨울이면 동네를 돌며 산타클로스 역할을 자처했다. 두 번의 심장마비를 겪으면 요나스처럼 살 수 있는 걸까?
어릴 적 부모님의 이혼과 생활고, 그리고 스물한 살부터 시작된 공황장애로 삶의 허무함이 잦아진 작가가 죽음에 대해 물으면, 현재를 살라고 말해주는 요나스. 맛있는 걸 먹고, 좋아하는 것을 하고 그것으로 하루하루 일상을 채우라는 요나스의 조언은 눈물 나게 따뜻하게 느껴진다.
타인과의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한 요나스. 지금 삶을 잘 사는 게, 나의 행복이 중요하다는 걸 가르쳐준 요나스가 있었기에 숭진의 독일 생활이 많이 외롭지만은 않았을 테지.
아무 걱정도 하지 마. 숭진, 너는 생각이 너무 많아. 그냥 네 앞에 있는 로테 그뤼체(Rote Grütze)를 먹어. 그러면 행복해질 거야. -180p
글과 음식을 전공한 작가답게 이 책에서는 독일 음식의 맛을 생동감 있게 전해준다. 낯선 식재료와 독일 음식들을 검색해 이미지를 찾아보며 성진과 요나스가 나눴을 맛과 대화의 느낌을 상상했다.
한 꼭지가 끝날 때마다 낯설지만 따뜻하고 다정한 음식 레시피가 등장하는데 전부 한 번씩 만들어보고 싶다. 특히 요나스가 맛잘알이라 신뢰가 간다. 우선 일본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들 수 있는 것부터 도전해봐야지.
제목에 육개장이 왜 등장하는지는, 책을 끝까지 읽는 독자만이 알게 된다. 나조차 조금 갑작스럽고, 당황했지만. 그와 함께한 이야기를 이렇게 남겨두었으니, 요나스가 어디에선가 말하고 있지 않을까? “알레스 굿(alles gu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