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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동KimLawdong Jul 17. 2023

밥전, 망한 유아식에게 주어지는 패자부활전

비록 원래의 모습은 아니지만 아이를 배 불려준 밥전에게 영광이 있기를!

아이의 돌이 다가올 무렵, 아내는 "이제 슬슬 이유식을 마치고 유아식을 시작해야 하는 것 아닌가"하고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부부가 식사를 하고 있으면 아이가 입맛을 다시며 식탁 근처로 다가오곤 했고, 무설탕요거트에 불린 오트밀을 한 입씩 주면 맛있게 받아먹곤 했다. 태어날 때는 불타는 고구마(아내의 표현임)처럼 시뻘겋기만 했던 그 아기가 드디어 사람이 되어 밥을 먹을 순간이 오고야 만 것이다.


아내는 초중기 이유식까지를 직접 해서 아이에게 먹였었다. 재료까지 직접 손질하지는 않았으나, 이유식 큐브를 하나하나 찜기에 넣어 아이가 좋아하는 식감이 될 때까지 시간을 섬세하게 조절하며 정성껏 쪄냈다. 그렇게 정성을 담아낸 이유식을 아이는 "알 바임"이라는 태도로 '푸르르르'하면서 여기저기 뱉어내곤 했다. 아내는 그 기간 깊은 우울감에 빠졌다. 옆에서 아내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나는 "이유식의 고수를 찾아 나서는 꿈"이라는 다소 황당한 제목의 글을 협회 신문에 투고했고, 고생하는 아내의 모습을 팔아 소정의 원고료를 받을 수 있었다.


후기 이유식에 이르러서는 아이는 이유식을 무척 빠른 속도로 잘 먹게 되었지만, 아내는 여전히 초중기 이유식을 먹이던 그때의 기억과 느낌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했다. 아내는 불안감을 떨쳐내려 다양한 유아식 요리법이 담긴 책자를 구매하고는 얼마 간 쓱 훑어보는가 했는데, 어느새 책자는 나에게 건네져 있었다. (사 먹이는 경우도 많지만) 그렇게 유아식의 칼과 도마는 어쩌다 보니 내 손 아래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일단 정말 기본적이고 간단한 것부터 시도해 보자고 하면서, 밥솥에 있던 밥을 가지고 밥전을 부쳐주기로 했다. 아이의 치아와 혀끝을 테스트해 보는 일종의 테스트 음식이었던 것이다.  




(이걸 굳이...?)


1. 흰자와 노른자가 완전히 섞이도록 계란을 열심히 풀어준다.

아이가 보는 앞에서 열정적으로 저으면 아이가 미소를 지어주곤 한다.

예전에 아내와 함께 제과 학원에서 실기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학원에서 하루는 계란 흰자를 가지고 손머랭을 치는 법을 배웠는데,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가 눈 옆을 흘러내렸다. 계란을 섞고 있으면 가끔 그때가 생각난다.


2. 계란물에 충분히 적셔질 정도의 밥을 넣고 밥과 계란물을 골고루 섞는다.


3. 팬 위에 식용유를 조금 붓고 노릇하게 굽는다!

가끔 명절에 어머니 곁에서 전과 튀김을 뒤집는 것을 도와드린 적이 있다. 어머니께서는 모양이 잘 나오지 않은 것은 먹어서 없애면 된다고 말씀하셨다. 예쁘지 않게 된 것은 먹어서 없애면 된다.




그렇게 최초의 밥전이 탄생했다. 아이에게 먹여보았더니 제법 잘 먹었다. 남은 것은 다음 날 어린이집 가방에 넣어 보내면서 아내가 어린이집 선생님께 이유식 대신 먹여봐 달라고 부탁드렸는데, 어린이집 선생님께서는 아이가 밥전을 아주 잘 먹었다고 말씀하셨다. 아주 순조롭고 무난한 출발이다,라고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착각이었고, 그 뒤로 많은 종류의 유아식 먹이기에 실패했다.


지난번 글로 올렸던 닭가슴살브로콜리 크림소스로 만든 리조또도 실패했고, 시판하는 볶음밥을 산 것도 잘 먹지 않았다. 밥알이나 섞여있는 재료의 식감에서 거부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아이가 먹지 않는다고 안 먹일 수는 없는 것이고, 밥을 먹이기는 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잘 먹는 방법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매일 계란을 깨고, 계란을 풀고, 먹이려고 했으나 먹이지 못한 음식을 계란물에 풀어넣었다. 크림소스리조또는 크림소스밥전이 되었고, 새우볶음밥은 새우볶음밥전이 되었다. 처음에는 각기 다른 음식이었지만 모두 똑같이 생긴 밥전이 되었다. 집에서 아침마다 명절 냄새가 났다. 부부 둘이서는 한참 만에야 먹던 계란 한 판이 며칠 만에 동이 났다. 매일 부치다 보니 괜히 모양에도 욕심이 나 네모반듯하게 부쳐본 날도 있다(그래봐야 어차피 한 입 크기로 자를 거면서...).


계속 부쳤다. 네모나게도 부쳤다. 그러고 보니 처음보다 확실히 모양이 좋아진 것 같다.


고생해서 해놓은 혹은 비싸게 구매한 유아식이 모두 결국엔 똑같이 생긴 밥전이 될 때 기분이 좋았냐고 하면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 마음이 아프고 허무하다. 원래는 음식이었던 것이 계란물에 풀어져 있는 모습이 늘 그렇게 썩 아름다운 것은 아니고, 가끔은 그 모양을 보고는 떠올리지 않았어야 될 무언가를 떠올려 비위가 상하기도 했다. 게다가 애초에 먹질 않아서 밥전으로 부치게 된 것이니, 아이가 뱉어내고 흘린 것을 치우는 데만도 한참 걸린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그런 생각도 들었다. 정신승리! 비록 계란물을 뒤집어쓰고 기름에 지져지면서 모양은 비슷해져 버렸지만, 안에 들어있는 재료가 사라진 것도 아니고 영양이 사라진 것도 아니라고. 오히려 계란의 영양소까지 더해졌으니 아마도 영양성분은 더 많아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직 아이가 플레이팅에 대해 특별히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종종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 커리어와 관련해 열패감 같은 것을 느낄 때가 있다.


다들 각자의 일을 잘해나가고 있는 것 같은데 나 혼자 뒤처지는 것 같고 헤매고 있는 것 같고 실패하고 있는 것 같은 좌절감에 우울해지는 느낌을 받곤 했다. 처음에 내가 생각했던 것은 이런 게 아닌데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어디선가 내가 잘못된 선택지를 택했던 것인지, 그 길을 쭉 따르다 보니 처음엔 조그마한 경사각의 차이가 점점 벌어져 생각하던 것과는 이렇게 멀어져 버린 것인지. 생각하고 후회한들 돌이킬 수도 없는 일을 가지고 상념에 젖어버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


앞으로는 밥전을 부치던 일을 떠올려보려고 한다. 비록 처음 요리를 할 때 계획했던 우아한 모습도 아니고, 어느샌가 똑같아지고 평범해진 것 같은 모습이지만 그래도 경험과 재료가 완전히 사라져 없어져 버린 것은 아니라고. 처음에 담아내려고 했던 어떤 모습과 헤매면서 경험한 배움이 계란옷 안 어딘가에 분명하게 박혀있을 것이라고.


망한 유아식 레시피에게 한 번 더 주어진 패자부활전이 바로 밥전이 아닌가 한다. 훨훨 비상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계란이라는 트램펄린을 통해 다시 한번 ‘통!’하고 점프에는 성공한 존재. 생김은 투박하지만 원래의 재료들이 가진 영양에 계란까지 더해지고, 무엇보다도 아이가 한 입이라도 더 먹을 수 있게 해 준 밥전에게 영광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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