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대상화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우리는 서로의 일부만을 떼어내 그것만을 돌려보며 서로에 대해 규정한다. 성별, 나이, 외모, 출신지만으로 그 사람의 성장 배경과 성향, 가치관을 유추할 수 있다고 자만하곤 한다. 그렇기에 보이는 면면이 규정하는 범주 안에서-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상대에게 나를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미디어는 사람으로 움직이고, 그 자체로 사람을 소비한다. 해시태그 안에서 우리는 대상화된 우리 스스로를, 혹은 대상화된 타인을 발견한다. 미디어와 현실의 구분이 모호해지면서 그 경향은 더욱 커졌다. 우리는 우리가 보여주고 싶은 것들만 모아 잘 정제된 형태로 게재하고, 모나고 각진 부분은 덮어 씌운 채 들키면 안 되는 것인 양 숨기곤 한다. 미디어가 아니더라도, 대인관계에서 이는 중요한 메이크업이다. 하루에도 여러 명의 사람들을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만나면서, 우리는 자연스레 대상화하는 눈을 가지게 된다. 그 사람의 행동이나 보이는 모습에 따라 몇 가지 해시태그를 매기고, 그 사람의 언행의 근간을 거기서 찾곤 한다.
그러나 물질화되고 유형화된 속성들 만으로는 한 사람을 완벽히 정의할 수 없는 법이다. 사람은 내러티브narrative적인 존재이고, 규정할 수 없는 흐름이다. 영화의 스틸컷만을 보고 감상을 논할 수 없듯,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뒤덮은 분류지가 아닌 그 사람 자체를 봐야 한다. 곧 사람을 대상화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람을 나와 같은 인격체로서 존중한다는 것이다.
사람을 대상화하지 않고 마주하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물살의 어느 시점만을 포착하여 그 방향을 알 순 없지만, 몇 시간 동안 관찰한 영상으로 예측하는 것은 가능하다. 오랜 시간 물살을 바라본 이는 계곡의 흐름을 알 수 있다. 곧 사람과 함께한 시간은 그 사람을 올곧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한다. 대상화 없는 사랑이란 규정과 판단이 배제된 관찰이다. 섣부른 이해도 공감도 아닌, 누군가를 정의하는 것은 무기한 보류한 채 그 사람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대상화 없는 사랑은 어떤 것을 평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 혐오가 낄 구석조차 없는 온전한 행위이다.
나는 이것이 대부분의 문제의 해답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