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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설 Sep 16. 2022

6편|홈스쿨링, 나만의 일상 시간표 만들기

2012년, 열일곱

결국 좋았던 시절은 순식간에 흘러 중학교를 졸업해버렸다. 계획도, 목표도 하물며 비장한 마음가짐도 없이 말이다. 학교에서 짐을 챙겨 집으로 돌아올 때, ‘드디어 내 홈스쿨링이 시작되었구나!’, ‘새 세상이야.’ 하는 반가움보다는 그저 오후 늦게 일어나도, 새벽 늦게 자더라도 지장 없는 단순한 생활이 마치 학기 중 방학을 맞이한 것 같았다.


그러던 와중에 운이 좋게 새로운 경험을 하러 잠시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3개월 동안 미국의 한 공동체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뉴욕으로 발령이 나시는 지인께서 나를 데리고 떠나 주신 것이다. 초반에는 처음 접해보는 서양 문화와 낯선 환경에서 적응하느라 어른들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어린아이였지만, 슬슬 적응해나가며 공동체의 일원으로써 나의 몫과 역할을 충실히 해내었다.

요리에는 소질이 없던 터라 식사 후 뒷정리와 설거지를 했고, 전체 모임 있던 주말과 한국어 수업이 있던 날에는 공간 청소를 하고 소소한 준비들을 도와 나갔다. 공동체에서 주관했던 뉴욕 한인 행사를 준비할 때에는 기술이 필요로 하지 않은 잡일들을 도맡았다. 글씨는 재주 있게 썼던지라 가끔 직접 적은 손글씨의 플래카드를 만들어 붙이기도 했다. 

틈틈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뉴욕의 여러 거리를 뽈뽈뽈 헤치고 다니고, 껌벅껌벅 졸았지만 브로드웨이에서 손꼽는 라이언 킹 뮤지컬과 화려함에 제일가는 타임스퀘어를 두 눈으로 담고, 멋진 사람들을 만나 사랑받는 막내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새로운 경험을 품고 야심 차게 돌아와 홈스쿨링을 이어갔다. 


뉴욕 생활은 어린 나에게 시야를 넓혀주려 기회를 제공해주셨던 지인분의 덕이었다. 물론 새로운 경험을 기회 삼아 3개월 동안 시간을 알차게 보내고 돌아왔지만, 나에게는 더 큰 숙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당장의 눈앞에 놓인 언어와 문화의 차이를 이해해야 했던 뉴욕의 숙제는 난이도 하.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바로 무기력과 공허함. 손에 잡히지 않지만 곁에서 선명하게 느껴졌던 두 감정이 어딜 가나 나를 졸졸 쫓아다녔다.

간혹, 홈스쿨링을 하고 있다 하면 집으로 선생님이 방문하셔서 학교의 교과목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알고 계시는 분들이 계셨다. 분명 그것 역시 일례의 방법이겠지만 나의 홈스쿨링은 아니었다. 나에게는 아무런 제약도, 구분도, 선생님도 없었다.


점점 밤낮 생활이 뒤바뀌는 나와 가족들이 마주치는 시간은 한집에 살면서도 고작 몇 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중학교에 다닐 때에는 기상, 취침, 전자기기, 음식 등 많은 것들에 제한이 있었지만, 마음껏 누릴 수 있는 홈스쿨링이 처음에는 나쁘지 않았다. 좋아하는 예능과 드라마를 미뤄 볼 필요도 없고, 원하는 시간에 눈을 뜨고 잠을 자는 게으른 하루들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두 달쯤 시간이 지났나? 아무런 걸림돌이 없는 생활이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마침 3년 동안 24시간을 붙어 지낸 동기들이 고등학교에 적응하며 새 친구들을 사귀는 모습을 간접적으로 마주치게 되자 방구석에 누워 핸드폰과 컴퓨터를 오가는 내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에게 주어진 무수한 낮과 밤을 주체하지 못하고 시간의 무게에 눌리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마냥 좋았던 게으른 하루들에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하자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은 불안감이 비 오는 날 개천이 무섭게 불어 오르며 도로를 덮칠 것 같듯이 나를 잡아먹으려 했다. 부정의 감정은 긍정의 감정보다 번지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홈스쿨링을 시작하고 난 이후, 어느 누구도 나에게 제시해주는 시간표가 없었다. 어린 나이부터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등 어딘가에는 필히 소속되어 살았고, 이유 한번 묻지 않고 학교에서 만들어준 시간표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며 살았다. 시간을 스스로 활용하여 살아본 기억이라곤 그저 시간표의 남은 빈칸이었던 자투리 시간을 통해 놀고먹던 기억뿐이었다. 나만의 시간표를 짜임새 있게 만들어 낼 힘도, 경험도 없었다. ‘이런 꿈을 가지고 싶어 혹은, 가지고 싶지 않아’ 하는 기준도 마땅히 없었고, 그렇다고 ‘이런 일을 하고 싶어, 이런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희망 사항도 없었다. 어중간하게 모든 것에 큰 호불호가 없었기에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책상에 앉아 책을 보거나 펜을 잡기보다 또 몇 날 며칠을 게으르게 살다 불안감으로 꼬리를 무는 생각들이 이어졌다. ‘이루고 싶은 꿈도 없어. 그렇다고 되고 싶은 것도 없어. 잘하는 것도 딱히 없어. 하고 싶은 일도 없어. 망했네’ 그리고 또 며칠 뒤, ‘지금 당장은 도대체 뭘 해야 하는 거야?’, ‘뭐든 한다고 한들 시작은 어디서부터 해야 되는 거야?’, ‘에휴. 나 앞으로 어떻게 사냐.’ 

또 자책하며 다음 날, 

‘그럼.... 지금 당장 내가 하고 싶은 건 뭐가 있었지.’ 


아슬아슬하게 살다 짧게 짧게 스친 생각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꿈이 없다고 한탄하고 잘하는 것도 하나 없다고 자책하니 미래가 캄캄했고 현재 내릴 수 있는 결론이 없었다. 꿈이 없기에 지금 당장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몰라 계속해서 방황만 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 ‘지금 당장 내가 관심 있는 것’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몇 달 사이에 집 밖을 나가 새로운 경험을 쌓지는 않았지만, 온갖 매스컴에서 보고 느낀 것들 중에 자연스레 호기심을 낳았던 것들 중 해보고 싶은 것들을 낙서하듯 끼적였다. 여러 가지 것들이 나왔다. 

그중에서 제일 배워보고 싶은 것을 추리다 나온 것이 바로 ‘옷을 만들어보는 일’이었다. 인터넷에 검색하여 양재 수업을 하는 곳을 찾다 한 문화센터를 발견했고, 곧바로 클래스 과정을 찾아 매주 2~3일씩 왕복 2시간의 버스를 타고 나가 하루의 반나절 동안 양재를 배우고 돌아왔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게 되자 기분 좋은 분주함으로 그동안의 굶주림이 천천히 해소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천천히 나만의 시간표를 하나하나 채워가는 법을 익혀갔고, 슬럼프와 같은 시간들은 결코 무용지물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시간들을 통해 스스로 고민하고 답을 찾아낼 수 있는 나만의 루트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요즘도 갈대처럼 세차게 마음이 흔들릴 때 나에게는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오래 걸리지만 결국 알아챈다. 그리곤 어릴 적 만든 나만의 질문을 사용해 차분히 앉아 고민을 하고 답을 적어가며 방황하는 길에서 갈피를 잡는다. 매번 달라지는 답변을 적어나가며, 주도적인 삶을 연습해나간다.


“요새 나의 관심사는 무엇이지? 하고 싶었던 일이 뭐가 있었지?”


 

2013 뉴욕, 용돈 모아서 산 형광 신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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