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를 마치며 떠오른 이런저런 기억과 회한을 풀어헤친 글로, 아래글을 먼저 보고 읽으시면 좋을듯요. :)
01. 콩으로 만들어내는 두부 : 가문의 씨를 잇는 남성과 간수를 붓는 여성
02. 남성의 다리와 '절뚝거림'
03. 꽃과 불, 집안의 여성 : 꺾이고 낙화하여 열매를 맺는 땅/흙의 열기
04. 옛 속담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
05. 나이듦 : 우리나라의 역사와 시대/세대 차이
+ 그들의 이름(名) 뜻에 대한 상상(想像)
+ 집 밖에서 겪었을 한국 역사에 대한 단상(斷想)
+ 진짜와 가짜 : 자녀의 거울인 부모의 초상(肖像)
06. 순환 : 가족의 연결고리와 나무의 계절
07. 다시, 봄 : 조카 늘봄과 카네이션을 받은 고모
+ 한국 <장손>의 성진 | ITALY <키메라>의 아르투
+ 카네이션과 가정의 달(5월)의 역사/날짜 변화
에필로그1. 제 본가(本家)의 명절 풍경
전 종갓집에서 개종을 하고 뛰쳐나간 둘째 아들(제 할아버지)네 손주이면서, 아들이 넘치는 대가족 집안에서 큰아빠와 20살 차이가 나는 막내아들(제 아버지)이자 외가의 데릴사위가 낳은, 장남?같은 장녀입니다.
실은 전 운이 좋게도? 양가 모두 평소에는 딸을 아들보다 귀하게 키우는 집에서 태어나 가부장제에 대한 편견이 거의 없긴 합니다. 오히려 거세당한? 유교/전통문화에 대한 호기심이 있는 편이지요. 양쪽 모두 (증)조부모님 대에 개종을 해서 가정집 제사를 구경도 못해봤는데요. 오히려 제 기준에선 도찐개찐 같은 한 배에서 나온 종교(천주교/개신교)끼리 은근 신경전을...ㅋ
그러나 친가는 명절과 결혼식, 장례식이 있을 땐 유교적인 사고방식이 근간에 짙게 깔려 있는지 꽤나 아이러니한 대혼종의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아들들 사이에서의 위계나 맏이의 존재/책임감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거든요. 집안에 장손이 결혼하거나 아들이 태어나면 문중에서 족보를 업데이트 받아오기도 했습니다. (제가 업어키운 10살이나 어린 늦둥이 동생시키가 제 위에 적혀있길래 아빠한테 가서 바꿔와달라고 지랄발광했던 기억이...ㅋ) 심지어 큰집은 장손들(큰아빠-큰사촌-큰조카)이 한번에 골?로 가지 않기 위해 절대로 같은 차량에 타지 않았답니다. ㄷㄷㄷ
다행히 간소화가 꽤 진행되어서 명절은 죽은 자가 아닌 산 자를 위한 잔치가 되었고, 성묘는 추모예배로 대체되었습니다. 마치 포트럭 파티처럼 각자의 집에서 나름 민주적?/공화주의적?으로 큰집에서 역할을 분배해준 음식을 공수해왔지요. (사오거나 바쁘면 안와도 OK!) 아들들은 육아와 상차림을 맡고, 딸들은 설겆이와 청소 등을 맡지만, 그래도 여전히 음식준비하는 며느리들의 노동량이 압도적으로 많긴 했습니다.
분주한 여자들을 놔두고 남자들이 먼저 식사를 해서 자리(position)에 앉는 상도 달랐는데요. 다만 어린 자녀를 먹여야할 아이 엄마/임산부, 손녀딸들은 와서 같이 먹도록 권했습니다. 때문에 명절날 만큼은 영화 속 풍경과 의외로 많은 부분이 비슷하면서도, 묘하게 조금씩 달라서 영화를 통해 윗 세대의 전통문화 이야기를 엿본 기분이라 추억돋더라구요. :)
그나저나 부부끼리 같이 앉는건 영화 속이 더 진보?적인 것 같네요. 저흰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들이 큰엄마께 다같이 한 상에서 먹자고 제안했으나 큰엄마가 며느리들끼리 속편하게 O씨 남자들 씹으면서 먹겠다고 쿨~하게 거절하셨거든요. ㅎㅎ 왠지 저희 집에서는 명절날 같은 성별끼리 모여 근황토크 나누는걸 더욱 선호하는 듯 했습니다. (전 어릴때 선머슴아/Tomboy라 양쪽을 넘나들었던...ㅋ)
그러나 큰아빠네 장손/사촌이 자녀를 낳아 큰집에서 3대가 만들어지면서 이 조카들에게도 슬슬 사춘기/봄이 왔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몇몇 해외에 나가는 집이 생겨나자 점차 잘 모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저희집은 전 만들기를 담당한 막내집이었음에도 왁자지껄한 모임이 사라지는 걸 서운해하면서 향수를 느끼는 편입니다. (아마 제사가 빡센 큰집 며느리들은 속편한 시누이 같은 소리를 하냐며 엄청 욕하겠지요? ㅠㅠ)
그래도 저도 나름 동그랑땡 머신으로 다한증이라 손맛에 간을 추가해 공장처럼 매우 천편일률적으로 예쁘게 잘 찍어냈었답니다. (요똥손이 유일하게 할 줄 아는 공정인;;)
99세(본인상 중에 100세) 찍으신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에는 부조금을 형제끼리 나누는 작업을 막내집 장녀인 제가 노트북에 엑셀로 입력했었습니다. 아무래도 하나둘 지인들이 은퇴하기 시작한 큰아빠들보단 한창 활동량이 많은 현역인 제 아빠로 인한 업무량이 많을 것이라 차출? 당했지요. 여튼 영화 속 부조금 계산 장면들이 묘하게 디테일이 살아있단 생각에 내내 웃퍼서 추억돋더라구요. 이 때는 각자가 살면서 쌓아왔던 인간관계의 가치가 돈/금액으로 매겨지기에 집 밖에서의 자기 삶/연결고리의 궤적을 되돌아보는 자리랄까요.
저희집도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환갑을 지나는 아버지들대에서 하나둘씩 돌아가시는 분들이 생겨나고 각자의 손주들이 태어나면서 명절날 다같이 모이는 문화가 슬슬 사라져 갔습니다. 그래서인가 집안을 결속시키는, 즉 콩물에다 간수를 붓고 서로 엉기게 만들어 두부를 굳게하는 역할은 대게 할머니가 아닐까 싶더군요. 간수가 너무 짜면 두부가 비누처럼 딱딱해지고, (즉 며느리/사위들이 죽어나가고) 간수가 적으면 물러터진 순두부가 되던가요? :D
현재는 결혼 안하고 자유분방하게 살려던 장손이 뒤늦게 꽤 멋진 새언니를 만나 딸/아들을 낳자 이제는 장손며느리가 가장 상전이 되셨습니다. 큰엄마께서 일하는 며느리 손에 물 한방울 안묻히게 하시거든요. 장손은 육아/학원라이드?를 전담하겠다고 몇년동안 주3일만 일하는 호스피스 시설에서 일하다가 최근 아이들/후배들의 문이 굳게 잠기자 써전으로 복귀했던... (이 시국에? 장하다! 장손!) 여튼 다들 집안의 큰어르신/할머니가 된 큰엄마의 룰(法)에 따라 장손의 본(本)을 보며 살아가는 편이라 요즘엔 나름 남자들이 다들 가정적이려고 애를 쓰는 듯 합니다. 솔직히 외가 못지않게 친가 또한 대대로 여자들이 더 드센 집안이란 풍문(風聞/Rumor)이 전해내려오기에, 요샌 (저를 포함해) O씨 여자들 똥고집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며 저희끼리 자조한다는... :)
에필로그2. 제 집안의 이름들
전 이름에 관심이 많아서 종종 친사촌네 조카/외사촌들 이름지을 때 어감이나 한자를 봐주곤 했습니다. 이름은 '일흐다(일컫다)'에서 나온 순우리말인데요. 한자인 '명(名)' 또한 '깜깜한 저녁(夕)에 서로를 식별하고자 입(口)으로 부르다'란 뜻으로, 주로 내가 아닌 남이 불러줄 때 그 쓰임새가 있습니다. 마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김춘수의 <꽃>이란 시처럼요. :)
어릴 땐 제 이름을 외가에서 너무 여성스럽게 지어놔서 (저랑 안어울리게 꼭 기생 이름 같다며 싫어한...) 중성적인 이름의 친구들을 부러워했습니다. 그러다 딸을 너무나 갖고 싶었다던 옆집 아주머니가 아들들 이름을 '아름', '다운'이란 형용사로 짓고 장난삼아 여장?!시키는 걸 보게 되었는데요. 전 비록 로보트 장난감은 절대 안사주더라도 핑크색과 인형, 거울을 싫어하는 취향을 존중해 꾸미는 걸 포기한 부모님이라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을 했었습니다. (실은 <바비> 보는 내내 닭살 돋았던...ㅋ)
솔직히 전 흔해빠진 항렬자를 안따르는 건 OK였으나, 나중에 태어난 남동생이랑 이름의 운율을 맞추지 못한 걸 속상해했습니다. 꽤 오랜기간 외동이었기에 아버지/어머니의 형제자매를 보면 이름들이 다 비슷한 게 내심 부러웠었거든요. 다행히 아빠와 형제자매처럼 자랐던 큰집의 딸/제 사촌언니이자 피아노 스승과 끝자의 운율이 맞춰져있긴 했지만요. 나중엔 제 이름이 이뻤는지 중간자가 저와 항렬자처럼 같아진 사촌네 조카도 생겨났습니다. (제 이모처럼 저도 만나면 이모딸 하자고 속삭임. :D) 제 이름은 외가에서 종교적인 뜻을 담아 지었고, 그 친사촌네 조카도 종교적인 뜻을 담아 지어줬는데요. (두 집안 종교 다름.ㅋ) 국어교사셨다던 3rd 큰엄마가 자녀/손자녀들 이름에 굳이 한자를 붙이지 않고 한글로 지어서 신기하더라구요. (한자까지 같았다면 내 딸로 둔갑시키기 갓벽했는데... 췟! ㅋㅋㅋㅋ)
+ 가부장제가 미러링된 집안
영화 속 할머니 이름 오말녀처럼, 아들 많은 집 막내인 제 아빠의 이름은 O번째 아들+가문의 항렬자 조합으로 숫자와 집안의 관계망으로만 대충 지어진 짠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리고 집안의 첫 자손의 이름을 '(어머니에) 버금/둘째가는+난초'란 시적인 뜻으로 지어준,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한 K-장녀를 과외하다 눈이 맞았구요. 그 때문인지 1살 차지만 스승의 날만큼은 나름 엄마가 아빠에게 존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대를 이어서? 어머니는 어린 막내 외3촌과 나이가 똑같은 친4촌언니(훗날 제 피아노 과외스승) 둘을 데려와서 영어과외를 해주었습니다. (전 외가 이모삼촌과 친가 사촌언니오빠가 서로 동갑이라 허구헌날 호칭을 헷갈렸던...)
그나저나 외할아버지는 어머니가 집 밖/학교에 나갈 때마다 매일같이 "잘 다녀오라"며 현관 앞에서 신발끈을 매어주셨다고... (공주님처럼 자라서 그런건지 어릴 때 절 인형/장난감 취급을 했던;;)
결국 아빠는 영화 속 손녀사위 재호처럼 몰락해가는 외가의 데릴사위 역할을 평생 담당해야 했는데요. 심지어 저희 외할아버지는 아빠 앞에서 도시 한 가운데를 흐르는 OO천을 건너면 제 성을 바꿔부르자고 하시며 실제로도 바꿔부르셨습니다. 전 유교걸?이라 그런지... 아빠의 존심을 밟고 빚 갚는데 이용만 하는 외가에 묘하게 반감이 들어서 엄마와 외할머니를 기피하게 되더군요. (feat.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
게다가 외가의 3대독자 외삼촌 시키(나이차가 적어서 나름 형제같음ㅋ)는 신부가 되어 집안의 대를 끊어버렸습니다. 아마도 신의 뜻은 종족번식일 거라는 X소릴하면서요. 이걸 또 매우 영광스럽게 여기시던 외할아버지; 결국 동네 최고령 남성노인이 되셔서 사위를 거꾸로 앞세우고는 그 3개월 뒤에 따라 가셨습니다.
+ 제 발목을 잡은 상흔
어릴적 집안의 막둥이였던 아빠가 마치 영화 속 미화의 남편인 재호처럼 데릴사위 역할을 도맡으며 점차 술로 인해 망가지게 되자, 큰집에선 절 막내딸로 입양하고 아빠를 외가로부터 자유롭게 풀어주려 애를 썼었습니다. 그러나 형/외할아버지의 족보에 딸을 빼앗기기 싫었던 것인지 아니면 엄마를 놓치기 싫었던 것인지 제 아빠는 가려고했던 진로를 틀고 꽤나 큰 희생을 치르면서 가족을 유지했습니다. 덕분에 저에겐 큰 선물같은 늦둥이 남동생이 태어나 육아를 도맡으며 모성이 약하던 외가에 대한 트라우마를 조금은 극복할 수 있었지요.
여튼 친할머니가 큰아빠들에게 쟤는 원하는대로 살도록 냅두고, 시집가란 잔소리는 절대 하지말라고 유언을 남겨주셔서 명절날 맘 편하게 본가(本家)에 오도록 만들어주셨는데요. 정말이지 압도적 감사를 드린다는! :)
큰아빠는 집안에서 유일하게 결혼안한 딸인 저를 우리딸이라 부르시며 시집가면 큰엄마 몰래 비상금을 내어주겠다 꼬드기시지만, (은퇴하셨는데 노후자금 챙겨두셔야죠.) 딸이 귀한 저희집 딸들은 결혼할때 큰집들을 돌면서 면접을 봐야한답니다. ㅠㅠ (내 한몸 건사하기도 힘든데, 또 뉘집 귀한 아들을 망치려고!ㅋ)
제가 어릴 때만 하더라도 큰집이 아파트(지역의 초창기 맨션)로 이사가니 아버지 형제들도 다 따라서 아파트에 살기 시작할 정도로 다들 장손의 본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둘 각자의 배우자와 자녀들의 요구에 따라 삶의 형태/궤적이 달라지기 시작하더군요. 본래는 검소하게 남을 돌보고 살라면서 외제차/검은색 세단을 몰지않는 내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희 아버진 인생 두번째 차량마저 17년 끌고 다니시며 돈을 버는 족족 남에게 퍼다주신;;(에효...) 그런데 몇년전 장손이 포르쉐를 끌고 나타나자 다들 놀래서 뭐야 우리 저렇게 돈 벌면서 폼나게 제 멋?대로 살아도 되는거야?! 수근수근 웅성웅성 했다는... ㅋ
이번 추석에는 장손/사촌 오라버니가 또!! 바쁘다고 안와서 다들 안모이길래, 큰집에 잠시 인사드리러 다녀오고 다른 집엔 전화만 돌렸습니다. 명절날인데도 휑~한 본가의 느낌이 하나둘 쪼개지고 사라져가는 것만 같아 괜시리 서글프더군요. 이게 다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어 분화되면서, 하나둘 시들어/타들어 가다가 기억 저~편으로 넘어가는/날아가는 과정이겠죠.
아아... 어릴 때 사진이라도 많이 남겨둘 걸... ㅜㅜ
순간을 포착한 위 사진에서 각자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바라보는 것도 꽤나 흥미롭네요. 누군가는 신문물을 들여다 보고, 누군가는 배우자의 옷매무새를 매만져주고, 누군가는 그걸 부럽다는듯 슥 쳐다보며, 누군가는 거울 속의 자기 얼굴을 보고, 또 누군가는 미리부터 카메라/앞을 바라보는데... 아들 성진이를 바라보는 엄마 수희처럼, 명절날 저도 제가 자식처럼 키웠다 여기는 늦둥이 동생을 자꾸 바라보자 큰엄마한테 넌 아직도 동생이 그렇게 애기같냐며 한소리 들었던... ㅎㅎ
참고로 누나 껌딱지라 불리던 제 동생넘은 어릴적 오이디푸스 컴플렉스가 저한테 발동해서 제 남친/남사친들을 엄청 질투했으나, 이젠 제가 집에 내려와도 지 친구들이 더 중요한 걸 보면 그 또한 아련한 추억이로군요. 저도 이제 그만 다른 방향을 쳐다봐야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