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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똥이애비 Mar 26. 2024

내 목소리가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늦깎이 성우 도전기(16)

  기초반을 수료하고 초급반으로 진급했다. 이제부터 정말 입시생처럼 과거 방송사에서 나왔던 1차 시험문제로 연습하거나, 일본 애니메이션 화면을 보고 한국말 더빙 연습을 하는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지난 기초반에서 지속적으로 연습해 왔던 호흡, 발성, 발음은 이제 다른 세상 얘기가 되어버린 듯했다. 아니, 어쩌면 이런 기본들은 이제 알아서 해결(?) 해야 하는 것이 되어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초급반 선생님은 기초반 선생님과 달리 곧바로 내레이션 녹음부터 시작했다. 반 학생들의 목소리를 점검하고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녹음본을 다시 들으며 각자 무엇이 부족한지 피드백을 해주셨다. 나 같은 경우는 목소리가 너무 무거워 소리를 위쪽에서 내는 연습이 더 필요하고, 입속 공간을 더욱 넓혀서 사용해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혀뿌리가 입천장과 가까워서 소리가 2차원적이고, 먹는 소리가 나올 때가 있다고 하셨다. 비강을 활용한 발성법을 알려주셨는데, 복압을 이용한 발성법과는 또 다른 가벼운 소리가 나왔다. 자주 연습하면 오랫동안 들어도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요즘 트렌드에 맞는 목소리가 나올 수 있을 것이었다.


  애니메이션 더빙은 성우를 꿈꾸고 있다면 꼭 연습하고 공부해야만 하는 국영수 필수 과목 같은 것이었다. 성우 공채를 뽑는 방송사가 대부분 애니메이션 방송 위주로 되어 있고, 게임 더빙도 많아지는 추세라 이에 적용할 수도 있는 훈련인 것이다. 애니메이션보단 만화책 세대인 나에게는 큰 벽으로 느껴졌다. 처음으로 녹음실에 들어가 일본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을 더빙해 보았다. 캐릭터와 '입 길이'를 맞추는 것이 여간 쉽지 않았다. 입 길이라는 것은 캐릭터가 입을 뻥긋 거리는 것과 내 소리를 맞추는 과정이다. 입 길이라 길다는 것은 캐릭터가 뻥긋 거리는 게 끝났는데,

내가 여전히 대사를 말하고 있는 경우다. 한쪽 귀로 일본 성우의 목소리를 들으며 내 목소리를 새로이 입히는 과정이 꽤나 어려운 작업이었다. 익숙해지려면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애니메이션 더빙에서 가장 주력으로 갖춰야 할 목소리는 10대 주인공 목소리이다. 가장 많이 나오는 캐릭터이기도 하고, 여자 성우와도 경쟁해야 하는 역할이다. 특히나, 나 같은 중저음대역의 무거운 목소리는 이 10대 주인공 목소리를 내는 게 가장 큰 허들이었다. 아무리 변성을 해보려고 해도 너무나 아저씨 같은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소리를 모아서 내라는 선생님의 조언을 듣고 연습해 보았지만, 생각보다 10대의 그 풋풋한 감성을 살리는 목소리가 나오지는 않았다. 사실 내 목소리로 20대의 목소리를 내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처음으로 내 둔탁한 목소리가 싫어지기 시작했다.



  두 번째 수업은 라디오 드라마 대본 연습이다. 그나마 지금 내 감성의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는 30대 가장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감정이 매우 듬뿍 담긴 대본이다. 아이와 아내를 잃고 오열하는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굳이 변성은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장면을 그려내듯 목소리에 감정을 담아내기가 너무나 어려웠다. 평소 드라마나 영화를 봐도 슬픈 장면이 나오면 울고 있는 아내를 보며 놀리기 바빴는데, 막상 그런 슬픈 감정을 꺼내어서 연기를 해야 한다는 게 나에겐 매우 어색한 일이었다. 스스로 어색하게 느끼니, 녹음한 목소리에서도 전혀 장면과 맞지 않는 어색함이 느껴졌다. 게다가 선생님과 반 학생들과 함께 내가 녹음한 걸 듣고 있으니 더욱 민망함이 밀려왔다.


  선생님께서는 내게 너무나 많은 피드백을 주셨다. 오열하는 장면에서도 천천히 여유롭게 연기해야 주인공 느낌이 난다는 것,  듣는 이로 하여금 인간의 복합적 감정이 잘 전달되어야 한다는 것, 대본에 나와있지 않은 이전 상황과 대사를 듣고 있는 상대역까지도 상상하여야 한다는 것, 콧소리를 빼고 호흡을 늘리라는 것 등이었다. 이 피드백을 공책에 써내려 가면서 처음으로 내 목소리가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과연 내가 이 늦은 나이에 성우가 될 수 있을까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으로 돌아왔다. 방송사의 좁은 문을 뚫을 수 있을 정도의 경쟁력이 전혀 없어 보였다. 방송사가 아닌 분야는 AI의 기술 발전으로 성우의 역할을 대신하기 시작했고, 이미 내 나이의 성우들은 그 분야에서 베테랑이었다. 요즘 성우 지망생들은 성우 학원뿐만 아니라 성우학과에서 전문적인 교육과정을 받기도 하고, 대학에서 연극영화과나 뮤지컬 전공을 한 경우도 꽤 많다. 기본적으로 전문 교육을 통해 3~5년 정도의 성우 지망생 시절을 보내고 최종 합격해서 성우로 활동하는 것이다.


  이제 고작 성우 학원 6개월 차인 나에겐 성우가 되는 길은 너무나 멀게만 느껴졌다. 혹여나 우연찮게 성우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냉혹하고 경쟁이 치열한 시장에선 뛰어난 실력이 없으면 밥벌이하기도 힘든 실정이라고 들었다. 실력 있는 유명 성우들이 독점하는 시장에서 나는 어떠한 경쟁력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주변에서 목소리 좋다는 소리 몇 번 듣고 뒤늦게 가벼운 마음으로 뛰어들기엔 성우는 그리 만만치 않은 직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글을 써내려 가는 와중에 KBS에서 49기 성우를 모집하는 공고가 떴다. 일단은 이번 1차 시험을 후회 없이 녹음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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