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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티나인 Oct 11. 2022

내가 저 인간이랑 이혼 안 한 이유

사랑보다 슬픈건 정이라고....

징글징글하게 싸웠다.  그 인간 손에서 부숴진 리모컨이 최소 5개는  되었고, 심지어 할부로 장만한 생애 최초의 나만의 노트북도 화가 난다는 이유로 던져서 내동댕이쳐졌다. 밥 먹다가 뭐에 심사가 뒤틀렸는지 밥숟가락을 던지기 일쑤였다.

신혼초에 마음에 안든다고 내가 사준 티셔츠를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걸 보고 나는 미친놈이랑 결혼했구나 확신했다.

내가 반한 하얗고 긴 팔다리는 사회 생활하는데 하등의 쓸모가 없었고, 조용하고 섬세한 성격은 막상 결혼하니 그렇게 까탈스러울 수가 없었다. 예민한 성격이라 회사에 적응하지 못해 몇 개월을 버티지 못했다.

이 사람이 없으면 죽을 것 같아 부모 반대 무릅쓰고 대차게 나와 동거를 했는데 점점 살다보니 이 사람이랑 살다가는 내가 죽을 것 같았다.

사랑했지만 나를 너무 힘들게 했다. 좋아한다는 감정만으로 아무 대책없이 무작정 같이 산 나의 무모함에 대한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결혼은 완전히 성숙한 인간이 결핍을 느끼지 않을 때 해야한다는 에리히 프롬의 말을 따랐어야 했다. 그도 나도 너무나 미성숙한 인간이었다.

헤어져야 했다.  그런데  덜컥 아이가 생겨버렸다.

양가 부모님들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들이라고 등을 돌리셨다.

아이가 생겼으니 나아질 거라 생각했다.


아이가 태어난 지 60일에 아이 아빠라는 사람은 가출을 했다. 3개월 동안 연락이 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죽여버리고 싶었는데 너무 연락이 없으니 어디가서 죽었는지 걱정이 되었다.

3개월 후에 집으로 돌아온 인간은 고시원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성공해서 돌아오겠다고

했다. 자격증 시험비가 없다고 해서 등신같이 있는 돈 다 털어줬다. 그리고 일년간 헤어졌다.

아이 백일에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었는데 혼자간 언니가 안쓰러웠는지 동생이 같이 가 줬다.

그래서 아이의 백일 사진에는  나와 내 동생이 아이를 사이에 두고 찍은 사진밖에 없다.

아이랑 먹고 살기 위해 친정에 아이를 맡기고 과외일을 하러 다녔다. 제때 모유를 주지 못해 젖이 넘쳐서 가슴팍을 적셨다. 카디건으로 앞을 여며 흐르는 젖을 감췄다.

과외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밖을 멍하니 보는데 내가 불쌍해서 입술을 파들거리며 울었다.


돌잔치때도 아이 아빠는 오지 않았다. 친정 엄마가 차려주신 돌상에는 나와 아이와 친정 부모님과 동생이 나란히 웃고 있었다. (누군가는 말했다 남편도 없는데 웬 돌잔치냐고 청승맞다고 했다 남편과 나의 문제에 아이의 인생에 가장 행복한 돌잔치를 안한다는건 아이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이는 실을 잡고 환하게 웃었다)웃는게 웃는 게 아니었다. 그 때 찍은 사진 속의 내 얼굴은  피곤에 찌들어 있었다. 낮에는 일하러 다닌다고 발을 동동 굴렀고, 밤에는 칭얼거리는 아이때문에 젖 물린다고 한숨도 자지 못했다. 아이를 안고 까무룩 잠이 들면 왜 이혼을 시키지 않느냐 친정 아빠가 엄마를 달하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죄인이었다.

시부모님은 나를 볼 면목이 없다고 이혼해도 할 말이 없다고 하셨고, 친정아빠는 무책임한 놈이라고 싹수가 노랗다고 당장 이혼하라고 하셨다.

그 때 이혼 했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더 살아 보겠다고 했다.

내가 선택한 사랑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었다. 2년밖에 안 살고 끝내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진짜 헤어질때 미련없이 훌훌 털고 홀가분할 때 그때 헤어지고 싶었다. 내가 완전히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했을때 헤어져야 나를 탓하지 않을것 같았다 아직은 미련이 남았다. 지긋지긋한 애증이었다.

한톨의 애정도 남지 않을 때 그때 헤어져도 늦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마냥 당하고 살 수만은 없었다. 되로 주면 말로 못 갚아도 되로는 갚아줘야 할 것 같았다.

처음으로 그가 나에게 십원짜리 욕을 했을 때는 모멸감에 어쩔 줄을 몰라 울기만 했었다. 미친듯이 사랑한 사람의 입에서 나를 향한 모욕적인 말이 나왔을때 너무 슬퍼 이성적이고 배운 사람답게 해결하려고 했었다.

안 통했다.

두 번째로 나에게 십원짜리 욕을 했을 때 그가 태어나 들어본 적 없는 온갖 쌍욕을 퍼부었다. 그는 놀라서 멍하니 나를 보고 있었다.(그 후 20년간 그에게 욕을 들은 적이 없다. 혹여 이성을 잃고 내게 욕을 할 것 같으면   내가 먼저 " 이 개...."라고 선수를 쳐  입을 닫게 해  버렸다)

할부로 산 내 노트북을 그가 바닥에 내팽겨쳤을 때  나는 가만히 쳐다 보다가 모서리가 깨진 노트북을 들고 벽에다 몇 번을 내리쳤다.  그렇게 하면 박살나겠냐고 내가 박살내주겠다고 ...( 나중에 보니  인간은 내 깨진 노트북을 주섬주섬 들고는 자기는 일부러 살짝 던졌는데 나때문에 못 쓰게 됐다고 궁시렁 대면서 고치고 있었다)

아이가 7살때 밥을 먹다가 뭐가 뒤틀렸는지 밥그릇을 던져서 아이가 울고 있었다.

아이에게 조용히 방으로 가라고 뽀뽀를 해주고 다시 돌아 와서 밥상을 뒤엎어버렸다. 김칫국물이 튀고 반찬이란 반찬이 온 방바닥을 굴러다녔다. 눈이 돌아간 나를 보고 헛참헛참 하더니 무서웠는지 옆방으로 가서 방문을 걸어 잠그는게 들렸다. (그 후로는 밥상에서 젓가락 하나 안 던지더라. 그때 둘이 김칫국물 치우면서 행주를 몇개를 버렸거든)

왜 내 옷은 안 사주냐고 입을 게 없다고 투덜대는 인간에게 니가 신혼때 내가 사준 옷 다 찢어버리지 않았냐고 평생 나한테 옷은 못 얻어 입을거라고 냉정하게 말했다.( 50넘은 지금도 그는  혼자 인터넷으로 자기 옷과 속옷을 구매한다. 사이즈를 잘 못 골라 매번 작거나 크다. 모른체한다. 여자의 한이 이리도 무서운거다)

그런다고 속이 후련해졌냐면 그건 아니었다. 감정의 소모가 어마어마했다.  

이건 전쟁같은 사랑도 아니고..... 그냥 전쟁이었다. 하루는 니가 이기고, 하루는 내가 이기고, 어떤 날은 니가 먼저 잘못 했다고 항복하고, 어떤 날은 아이를 인질로 삼고.....


더 이상 한 톨의 미련도 남지 않았을 때 , 살아갈 날 보다 살아온 날이 많아 이런 추한 감정 싸움에 내 남은 인생을 걸기가 너무 아까워졌을 때 드디어 이혼을 결심했다. 충분히 할만큼 했고 더 이상 후회도 없었다. 홀가분했다. 시기를 저울질 했다.

그런데 원래 이런 사이코패스는 생존능력이 뛰어난 건지 본능이 발달한건지 모르겠지만,

어느 날 불쑥 내게 말했다.

"여보 나 이렇게 살아선 안 될거같아.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당신 몰래 20군데 넘게 이력서를 냈는데 다 떨어졌어.. 딱 한군데서 오라는데 부산이래."

"뭐 하는덴데?"

삐딱하게 물어보니

"지하상가 청소하는대래."

뭐? 지하상가 청소? 결벽증에 가까운 그 깔끔을 떠는 네가 지하상가를 청소한다고? 자존심이 하늘을 찔러 상사한테 한마디를 못 듣고 그만 두던 네가?

그는 절박해보였다. 내가 더이상 참아주지 못 하는 한계점에 왔다는 걸 안 걸까

1주일 후에 그는 부산으로 내려갔다. 정말로 청소를 하기위해...

한 달만에 온 그는 100리터짜리 쓰레기 봉투를 쓰레기차에 옮긴다고 손목이 작살나서 파스를 덕지덕지 붙이고 있었다. 최저임금밖에 못 받아 편의점김밥으로 끼니를 떼워 살이 더 빠져 보였다. 다리를 자꾸 긁길레 바지를 들춰보니 온갖 쓰레기균에 피부병이 생겨 하얀 피부에 울긋불긋 무슨 두드기같은 게 온 다리에 올라와 있었다.

" 이 미친놈아 진에 좀 정신차리고 젊을 때 일하지 늙어서 이게 뭐냐?"

내가 막 울자

"괜찮아 뭐... 할만해 ."

하면서 저도 운다.

아이고 ..사랑보다 더 무섭고 슬픈게 정이라 하더니만 이 인간하고 부둥켜 안고  우는 순간에 이혼은 텄다.  인간이 불쌍해보이면 답이 없다.


주말부부가 된 지 5년째

  남편은 부산에서 한 달 동안 청소반장을 하다가, 나와 애를 버리고 고시원에서 공부했던 장롱면허가 갑자기 빛을 발해 강원도로 취직이 되어 갔다. 처음에는 상사가 자기만 갈군다고 못해먹겠다고 울먹이길레 그냥 내려 오라고 했다. 아니라고 버텨보겠다고 했다. 눈에 콩깍지가 씌였는지 그동안 당한 건 잊어버리고 기특했다.

남편은 5년 동안을 새벽 6시에 나가 저녁 6시에 들어오고 회사에서 정해준 원룸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부대껴 잤다. 월급도 많이 올랐다. 내가 버는 돈의 두 배의 돈을 벌어다 주었다. 못 해먹겠다고 울먹이던 목소리는 자신감이 넘쳤다. 자기가 회사에서 일 잘 한다고 소문났다고 안 보니 확인 할 수 없는 얘기를 자랑스레 해댔다.

우리의 인질도 됐다가 평화의 사도도 됐다가 했던 큰애는 늦게 본 10년 터울의 동생을 돌보다가 유치원 선생님이 되었다. 자식이라기보다는 동지같았던 (우리의 적은 그 인간이었다) 큰애는 엄마 그동안 고생했다고 하고 싶은거 다하라고 아예 월급통장을 내게 통째로 맡겼다.

나는  동지의 통장에서 그동안 키워준 값으로 매달 50만원을 빼서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마음껏 썼다.

나의 적이었던 그 인간은 그동안 우리가 치렀던 전쟁의 배상금을 아낌없이 내게 주어 내 삶을 풍요롭게 해주고 있다.  

 


사람들은 지금 나를 보고 부럽다고 한다. 하고싶은거 다하고 애들도 그렇게 예쁘게 키우고 남편도 어찌 그리 자기를 좋아하냐고 ...

한 계절만 보고 그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다 알겠는가

그 사람에게는 계절을 묵묵히 견디어 낸 인고의 세월이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남들보다 혹독한 겨울을 살아내고 있을테고 누군가는 물 한모금없는 사막을 걷고 있는 참담한 심정으로 여름을 살고 있을테지만 봄은 반드시  늦게라도 천천히 온다.

그때까지  버티자 (이혼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다. 후회없이 미련없이 다 해보고 끝내라는 얘기다)


"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때에도 너는 온다

....

눈비비고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

가까스로  두 팔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

                                                                  '봄' 이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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