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참을 뜸 들인 교감은 자리를 고쳐 앉으며 박이경의 표정을 살폈다. 박이경 또한 평소와 다른 교감의 모습에서 어떤 말을 하려고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요즘 많이 힘드시죠?”
박이경은 교감의 말에 답 대신 테이블에 올려진 찻잔에 시선을 보냈다. 어떤 말을 들을지 이미 예상한 탓에 교감과의 눈을 맞추고 싶지 않았다. 박이경의 이런 태도를 교감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다음 말을 잇는데 꽤 시간이 흘러갔다.
교감실에 들어오기 전 박이경은 '그린 스마트 미래학교' 신청서 공문이 자신에게 배분된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교육청에서 시행하는 많은 사업이 그렇듯이 단위 학교에서 준비할 수 있도록 충분한 안내와 기간적 여유도 없이 단기간에 사업 신청서를 제출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눈치 빠른 몇 학교에서는 새로운 사업을 위해 빠르게 움직이고 있을 수도 있지만 수업과 사업에 허덕이고 있는 보통의 학교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이처럼 느닷없이 밀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교육청의 예산 문제이겠지만 대부분의 사업들은 모든 학교에 똑같이 예산 지원되는 사업도 아니고 신청한 학교를 대상으로 일정한 학교만 지원해주고 있었다. 이 사업 역시 신청학교 중 20%를 선발해 우선 지원한다는 것이 공문의 주안점이었다. 당연히 20% 안에 들기 위해서는 누군가 계획서를 잘 작성해야 했다.
“어려우신 것 알지만 또 선생님께 부탁드릴 수밖에 없네요.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그린 스마트 미래학교' 신청은 우리 학교에서 꼭 필요한 사업이라 지원했으면 합니다.”
교감의 의도는 꼭 필요한 사업이라는 말을 할 때 목소리 톤을 높인 것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사실 박이경의 학교는 건물이 건축된 지 40년이 지나있어 많은 부분에서 노후화가 심각한 상태였다. 더구나 고교학점제가 적용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형태의 교실과 특별실이 꼭 필요하기도 했다.
하지만 학교 시설을 리모델링하고 싶어도 거기에 필요한 예산확보는 학교 자체적으로는 힘들었다. 그렇기에 교감은 이 사업을 꼭 하고 싶은 눈치였다. 하지만 학교에 새로운 일이 발생했을 때 어느 부서가 주관하여 그 업무를 하는가는 항상 논란의 대상이 되곤 했다. 공문을 접수하고 주관 부서가 되는 순간 모든 일이 그 부서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기에 어느 부장도 선뜻 나서는 일이 없었다.
그러기에 교감도 새로운 업무를 배분할 때는 힘들어했다. 교감의 어려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만, 공문을 배부받은 박이경은 이번에는 분명한 거절의 뜻을 표현하리라 다짐을 했었다.
“사업의 필요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너무 촉박하고 제가 감당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아 힘들 것 같습니다.”
감당하기 힘들다는 말에 힘을 주어 말하는 것에서 박이경의 의사는 충분히 드러났다. 하지만 교감은 박이경의 반응을 예상한 탓인지 아니면 애써 외면하기 위함인지는 모르지만, 거의 표정 변화 없이 자신의 말을 이었다. 그것은 일을 밀어붙일 때 보여주는 교감 특유의 스타일이었다.
“고교학점제 선도학교 사업도 선생님이 맡아서 잘 진행해 주셨잖아요. 그때도 못 하신다고 했지만, 우리 학교 누구보다도 훌륭히 그 일을 하셨고, 아니 아마도 우리 지역에서 선생님만큼 고교학점제 준비를 해내신 분도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또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교감이 입에 발린 칭찬을 하고자 함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교감의 의도와는 다르게 박이경의 표정은 굳어갔다.
박이경은 고교학점제 선도학교 신청서를 작성할 때 일이 떠올라 머리가 아팠다. 교육부가 고교학점제 전면 도입을 목표로 진행한 선도학교 운영 사업 진행도 이런 식으로 맡았었다.
고교학점제라는 시대 흐름에 밀려 새롭게 구성된 부서에 부서장을 맡자마자 참가 신청 공문이 배부되고 촉박한 일정 속에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었다. 촉박한 일정에 맞추느라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전쟁과 같은 시간이었다. 계획서 작성을 위해 일주일간 국회도서관 자료 검색을 시작으로 각종 연구보고서와 타 시도 연구 사례집 등의 자료를 찾아 헤맸다. 대학원 시절 논문자료 찾아 지방까지 돌아다니며 동분서주할 때의 심정을 새삼 느낄 수 있는 기간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초안 잡은 자료 중에서 학교에서 적용해 보거나 운영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선별했다. 또 프로그램의 초안을 계획하고 그에 따른 예산 계획을 수립하는 등 정말 힘든 시간 끝에 사업 신청서를 작성했었다.
“고교학점제 선도학교를 신청할 때와는 또 다른 것이 제가 공간 부분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목소리 톤을 한층 높이는 것을 통해 박이경은 스스로 거절의 의사를 분명히 말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교감은 받아들일 의사가 전혀 없어 보였다.
“선생님 마음은 충분히 알아요. 하지만 선생님 말씀대로라면 우리 학교에서 그 분야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을까요? 선생님이 늘 말씀해 오셨잖아요? 학생 선택형 고교학점제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공간 재구성과 새로운 형태의 교실이 필요하다고…….”
박이경이 그렇게 말을 해 온 것은 사실이었다. 박이경이 생각하는 학생 선택형 교육과정의 적용을 위해서는 새로운 공간이 더 필요했다.
“하지만 그 필요성과 제가 이번 사업을 준비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공문 보셔서 아시겠지만, 학교 자체 프로그램 공간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와 연관된 공간 구성 계획도 해야 하는데…….”
교감은 박이경의 말을 끝까지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미 공문 파악하고 계시잖아요. 부장님이 이해하시고 계신 그런 부분을 다른 부장이 이해하고 준비하는 것은 더 힘든 일 아니겠어요? 선생님, 안 되는 이유 찾기 시작하면 끝도 없다는 것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 긍정적인 접근을 부탁드려요. 각 학과 부장과 기획 위원들이 협조하도록 제가 역할을 할게요.”
교감의 말에 박이경은 이미 자기의 의사는 물 건너간 느낌을 받았다.
교감은 말처럼 다른 부장들도 나름의 역할을 할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지시를 수행할 다른 부장의 협조를 기대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박이경은 이미 앞선 사업 계획서 신청서 작성에서 경험했다. 작은 글을 쓸 때도 협업적 글쓰기는 힘들다. 더욱이 사업 신청서를 쓴다는 것은 사업의 전체적 맥락을 이해하고 사업 목적에 필요한 내용과 그 내용을 뒷받침할 구체적 자료들을 찾아 연결해야 하기에 어려움이 더 많았다. 타 부서 부장이 사업의 큰 흐름에 맞지 않은 자료를 주고는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고 하면 할 말이 없었다. 부장들을 탓할 수도 없었다. 이해하지 못한 사업에 들어갈 자료를 박이경의 입맛에 맞추어 작성해 주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자기 업무를 하느라 다들 바빴다.
박이경은 한참 동안 고민했지만 더는 교감과 언쟁하는 것에 득이 없다고 판단했다. 사실 교감은 그동안 많은 회의에서 본인이 의도한 결론이 나오지 않으면 그 결론이 나올 때까지 이야기를 계속 끌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박이경은 그 순간을 견디는 것도 힘에 겨웠다 그러기에 이번 건도 더 길게 말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