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경이 교감과 협의 아닌 협의를 끝내고 돌아온 교무실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학교 분위기가 확연히 바뀌고 있었다. 코로나 19의 영향도 컸다. 하지만 그 이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었다. 학생도 그렇지만 교사도 방과 후에 남아있는 경우가 현저히 줄어들고 있었다. 초과 근무를 많이 하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니더라도 늘 일은 넘쳐나고 있는데 다들 퇴근 시간이 되면 약속이나 한 듯이 사라졌다.
박이경의 눈에는 다들 자기 업무를 정한 시간 내에 해내는 능력자로 보이기보다는 너무 일을 안 한다는 느낌이 강했지만 이런 판단도 다 의미 없는 생각에 허탈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 또한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기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박이경은 자리에 앉자마자 교감과 협의하느라 마무리하지 못한 잡무처리를 위해 업무포털 사이트를 열었다. 결재를 기다리는 근태 관련 서류, 교육청에 보고해야 하는 공문, 문서 배분을 기다리는 공문과 각 부서에서 공람 걸어둔 문서들이 12개나 있었다. 이렇게 잠시만 비워도 쌓인 일거리가 많은데, 새로운 사업 계획서를 작성하라는 교감의 지시가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더 속상한 것은 얼마 전부터 자신만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텅 빈 교무실에 혼자 버려진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만큼 지친 탓도 있었다.
“부장님 아직 안 가셨어요?”
컴퓨터 화면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박이경에게 수업계 박지숙이 말을 걸어왔다.
“일이 저를 놓아두지 않네요. 지숙 선생님은 왜 퇴근 안 하셨어요?”
박지숙은 들고 있던 교재와 출석부를 사물함에 정리하며 대답했다.
“저 이번 주까지 보충이에요. 지난번에 연기된 것 이번 주에 마무리 지어야 해서요.”
“아 보충이 남았었군요.”
작은 일도 요란하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치 잘 짜인 톱니바퀴가 돌 듯이 자신의 자리에서 소리 없이 역할을 해내는 사람이 있는데 박지숙은 후자에 속한 사람이었다.
업무 분장 때면 누구도 지원하지 않는 수업계 일을 하면서도 늘 웃으며 업무처리하는 모습이 박이경은 보기 좋았다. 후배이지만 그 점만큼은 배우고 싶은 부분이었다.
“그런데 아까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가던데……. 또 새로운 사업 우리 부서에서 맡아서 하게 되나요?”
박지숙이 물어보는 의도를 알기에 박이경은 즉답을 피했다. 새로운 사업을 부서장이 맡아온다는 것은 그만큼의 일거리 추가를 의미했다. 업무분장에 지정되지 않은 사업을 부장이 맡아 오는 순간 그 부서 구성원들은 하지 않던 일을 더 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라도 내 손에 힘이 들어가는 일에서는 벗어나고 싶은 것이 똑같은 사람의 마음이다. 하지만 학교 일에서는 없어지는 일을 찾기는 어렵고 해마다 새로운 사업으로 인해 일이 늘어나는 구조였다. 이에 새로운 일의 경우 부서 내에서도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기 힘들었다.
대답하지 않는 박이경의 태도로 미루어 짐작한 박지숙은 약간 얼굴이 어두워지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아직 교감의 지시 사항을 자신의 마음에서 수용할 수 없었던 이경은 뭐라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박이경의 표정에서 분위기를 읽었는지 지숙은 화제를 돌렸다.
“부장님 식사는 어떻게 하실래요? 괜찮으시면 짬뽕 같이 드실까요? 오늘은 매운 것이 확 땅기는 날인 것 같아요.”
박이경의 기분을 눈치챈 박지숙이 저녁 식사 제안을 해 온 것이다.
“아니 퇴근 안 하세요? 아이 어린이집에서 찾아야 할 시간도 지난 것 같은데….”
이미 시간은 7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이번 주는 친정 엄마에게 부탁드렸어요. 보충수업 때문에 어린이집 하교 시간을 도저히 맞출 수 없더라고요.”
“어머니가 가까이 계셔서 다행이네요. 일하고 육아 병행하기 힘들죠?”
“그렇죠. 뭐, 그래도 제 경우는 괜찮은 편이에요.”
항상 그렇듯이 불평보다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 과목은 보충수업 담당할 교사 수가 많은 편인데, 왜 매번 선생님만 하시는 것이죠?”
지숙은 대답 대신 다 아는 이야기 물어 무엇하나 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힘든 일을 하면서 환경이나 남 탓하지 않는 것이 지숙이 가진 큰 장점이었다.
방과 후에 일어나는 보충수업 개설도 특정 교사에게 몰리는 경우가 많았다. 학생들의 선택도 있었지만 대부분 일과 이후에 남아 추가되는 업무는 기피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선생님이 너무 착해서 그래요. 부탁한다고 다 들어주시니 나누어질 짐도 혼자 떠안고 가는 것이잖아요.”
“부장님, 그건 부장님도 마찬가지 아니신가요? 늘 힘든 일 다 맡으시면서. 흐흐. 선생님들이 다 뭐라고 하시는 줄 아세요? 일이 따라다니는 사람이라고 그래요.”
“제가요?”
“모르셨어요? 지난 5년 동안 부장님 가시는 부서에는 없던 일도 많이 생긴 것, 그리고 부장님 떠나시면 그 일 또 없어지잖아요.”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업무조정이 이루어질 때면 이런저런 이유로 새로운 일을 맡아서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 경우는 일 처리의 합리성을 위해서, 또 다른 일은 업무의 관행이라는 이유로 박이경에게 부여되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그 일을 하면서 남의 일을 대신한다는 생각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박이경의 생각에 꼭 필요하고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해서 스스로 만들어 가면서 한 일도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름의 보람을 찾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일을 하는 동안 심신이 지쳐간 것도 사실이었다.
“그럼 다들 저와 같이 일하기 싫어하겠네요. 없던 일도 만드는 사람이라 그런데 어쩌죠? 교감님께서 '그린 스마트 미래학교' 일 저보고 준비해 달라고 하셨어요.”
박이경이 아까 내뱉지 못한 말을 어렵게 꺼냈지만, 지숙은 새로운 사실에 놀란 기색도 없이 그럴 것 같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또 한동안 힘든 시간 보내시겠어요. 아 빨리 주문해야 하겠어요. 부장님도 매운 것 같이 드실 기분 같으니까요.”
배달 속도만은 빠른 짬뽕과 엽기 떡볶이가 둘 앞에 놓였다. 지숙은 맵다는 소리를 연거푸 내뱉으면서도 맛있게 먹었다. 매운 것을 잘 못 먹는다고 알고 있었던 지숙이의 모습에 이경은 의아함마저 느꼈다.
“여기 물 있어요. 매운 것 잘 안 드셨잖아요?”
지숙은 박이경이 건넨 물을 마시며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았다.
“그냥 평소 해보지 못한 것을 해보고 싶었는데, 역시 전 매운 것 하고는 안 맞는 것 같아요. 먹는 것이라도 바꿔 보려는 소심한 도전도 이렇게 무너지네요. 흐흐 ”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나기는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님을 지숙이 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학교 일로 쌓인 것이 많아서 나름 스트레스를 풀고자 하는 몸짓이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아 보였다.
“지금 하는 업무 때문에 속상한 일이 많아서 그런 것인가요? 아니면 오늘 수업 중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누군가 그랬다. 수업계 1년이면 교사 인성 다 확인할 수 있다고, 그 말은 교사들의 시간표를 짜고 매일매일 조정하는 작업에 스트레스가 많음을 시사했다.
지숙은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부장님은 스스로가 만든 틀을 깨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뭐라 답해야 할지 몰랐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자세하게 말해주시면 혹시 제가 도울 일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니 별일 아니에요. 제가 오늘 느끼는 것은 누구나 다 느끼는 우울감 정도일 뿐이에요. 저보다 부장님의 스트레스가 더 크실 것이에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다 드셨죠. 제가 이것 정리할게요. 그리고 이제 퇴근해야겠어요. 부장님은 더 일하시다 가실 것이죠?”
지숙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박이경도 먹던 자리를 정리하는 지숙을 도와주려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홀로 교무실에 남은 박이경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오늘 지숙의 모습을 보면서 한동안 자신만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가 하루하루 버텨내는 삶을 살고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루어 놓았던 공문 처리를 다 하고 업무포털 접속을 끊었지만, 마음이 개운하지 않았다.
그때 마침 박지숙으로부터 카톡이 왔다.
‘아직 교무실이시죠? 저 때문에 신경 쓰실 것 같아 보내요. 부장님 제가 보충수업을 거절하고 하지 않는 이유는 제가 착해서 그런 것이 아니에요. 제 판단으로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제가 기울인 노력이 학생들에게 꼭 좋은 성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그 순간만큼의 행복이 제게 있어요. 그러니 저 때문에 고민은 말아 주세요. 전 단지 교무실에서 부장님의 한숨 소리가 너무 많이 안 들렸으면 좋겠어요. 편안한 저녁 되시길…….’
카톡을 보면서 박이경은 자기 생각에 빠져 다른 이를 바라보고 있음을 반성했다. 그리고 얼마 전 아내가 한 말이 떠올랐다. 직장에 근무하면서 가장 모시기 힘든 상사의 스타일이 부장이 대리처럼 일하면서 정작 부장이 해야 할 역할은 못 하는 경우라 했었다. 그 말의 핵심은 맡은 역할의 범위에 따른 안목을 갖추지 못하고 늘 바쁘게만 달려가는 것에 대한 지적이었다.
마치 불빛을 찾아 사리 분별 못 하고 뛰어드는 불나방같이 주어진 일을 처리해 온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든 일 앞에서 다른 이와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노력하는 것보다는 남들이 안 도와준다고 불평했다. 그리고 혼자서 모든 일을 감당하겠다고 덤벼들고 있었다. 그러기에 많은 순간 힘듦을 느꼈다. 학교 일은 혼자의 열심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도 많았다. 다른 선생님들에게 비친 자기의 모습이 아내의 말을 닮아있을 것만 같았다. 늘 시간에 쫓기듯이 일을 하지만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안정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하나의 일을 하면서 또 다른 일을 해결하려고 몸부림치는 모습만 보여온 것일 수 있었다. 박이경의 자리는 혼자 막 달려갈 것이 아니라 주어진 일을 분배하고 갈무리할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한 자리임을 깨우친 것이다. 막상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남들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느껴졌다.
더구나 동료들에게 자신의 기대치에 대한 자세한 설명 없이 혼자서 동조해주지 않는 사람을 마음으로 비난해 왔다는 생각도 할 수 있었다. 대단히 큰 착각 속에서 일도 사람도 챙기지 못한 채 혼자 지쳐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