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이포 Jan 13. 2023

불안이 영혼을 잠식할지라도

나는, 오현주

한동안 내 가슴께를 채운 것은 달콤씁쓸한 라떼입니다. 별로 맛있는 것 같지도 않은 라떼를 그나마 먹을 만하기에 목구멍에 들이붓습니다. 잠이 오지 않습니다. 내가 원했던 거죠. 나는 시험 기간 내내 밤을 새웠습니다. 쥐어짜는 듯한 위장, 시큰거리는 식도, 두근거리는 심장을 뒤로하고 시험을 치렀습니다. 내 몸이 보낸 신호를 무시한 탓인지 한동안 체기가 가슴 안을 갑갑히 채웁니다. 만성 역류성 식도염 환자에게 생경한 ‘무언가’는 아닙니다. ‘무언가’라고 표현한 것은, 체기가 고통인지, 불편인지, 기분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누우면 소 된다, 는 말이 있죠. 역류성 식도염의 존재를 몰랐을 과거부터 사용되어온 관용어구는 어쩌면 역류성 식도염 환자를 말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역류성 식도염 환자가 밥을 먹고 바로 누우면 다음 날 체기가 목구멍에 솟아오릅니다. 강력한 위산이 식도를 태우며 올라올 때 치밀어오르는 구토감에 남몰래 쓰디쓴 헛구역질을 하는 모습이, 소의 되새김질을 닮았습니다. 다른 점은 인간에게는 고통이고, 소에겐 일상이라는 점일까요. 소의 두꺼운 식도를 인간은 가지지 못했습니다. 구토감을 억지로 삼키는 일은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나곤 합니다. 


크리스마스이브, 3호선 지하철을 탔습니다. 3호선 끝자락인 주엽역에서부터 72분을 타고 가야 합니다. 그런데, 많이들 아시겠지만, 3호선 지하철은 유독 많이 흔들립니다. 열차 소리가 시끄러워 음악도 맘 편히 듣기 힘들고 책을 읽기엔 글자가 흔들려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3호선을 타면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곤 합니다. 크리스마스 이브, 그날은 위산이 마치 화산처럼 폭발했던 날이었습니다. 하늘을 가득 메우는 화산재처럼, 체기는 3호선의 무료함을 쓰디쓴 뜨거움으로 메웁니다. 울렁거리는 속, 치밀어오르는 구역질, 어지럽다 못해 삐-소리가 들리는 귓가. 

모두가 평화로운 3호선 지하철 안, 나 혼자만의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두꺼운 패딩을 벗고, 목 스트레칭을 해보고, 가방 안에 있던 물을 꿀꺽꿀꺽 마셔보기도 하고, 가방에 늘 구비하고 다니는 라미나지액(위장 보호제)을 두 개나 때려 넣기도 하고, 힘없는 오른손으로 왼손의 합곡혈(엄지와 검지 사이)을 꾹꾹 눌러보기도 하고. 위산을 억눌러 삼키며 붉어진 눈가가 뜨겁습니다. 합곡혈이 위치한 연한 살갗에는 손톱자국이 주름처럼 남았습니다. 더 이상 싸울 힘이 없어 덜덜 떨리는 지하철 벽에 머리를 기대었습니다. 올라오는 구역질을 삼켜낼 뿐, 두통을 가라앉히고자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지도, 체증을 뚫고자 합곡혈을 쥐어짜지도 않았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더니, 괜찮아졌습니다. 흔들림에 몸을 맡기니 흔들림이 날 아프게 하지 않았습니다. 눈을 스윽 떴고, 괜찮아짐에 감사했고, 핸드폰 화면이 반짝 켜졌고- 아, 그때 카톡이 하나 왔네요.   

다음 정기모임 소주제는 ‘백투더퓨처’입니다. 후회가 되어서 바꾸고 싶거나, 돌아가고 싶은 과거의 순간, 사건을 소재로-

과거로 돌아간다라. 요즘 ‘회귀’라는 소재가 꽤나 흔하다고 합니다. 인생의 끝자락에서 과거의 한 순간으로 돌아가 다시 한번 사는 것을 회귀라고 한다네요. 웹소설 플랫폼 ‘문피아’에 “회귀”라는 키워드를 검색해보니 1,080개의 작품이 있습니다. 그 중 인기를 끌어 유료화에 성공한 작품은 462개. 정말 많네요. 몇 작품의 도입부를 읽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막고, 부모님께 내뱉은 평생을 후회한 모진 말을 속으로 삼키고, 신입 시절 저지른 업무 상의 실수를 지워내는 것. 과거의 실수와 잘못을 고친 후 성공을 향해 달려나가는 것, 흔한 클리셰입니다. 이러한 작품들이 열렬한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한다는 반증이겠죠. 댓글창에서 인상적인 댓글을 보았습니다. “한번 경험한 삶을 다시 살면 좋겠다. 그러면 안 불안하겠지-”, 불안장애를 겪고 있다는 독자의 댓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는지 수십개의 좋아요가 달려있었습니다. 좀더 읽어보려다가 속이 다시 미식거리는 것 같아 스마트폰을 끄고 다시 눈을 감았습니다. 

‘계절학기 신청하던 날로 돌아가고 싶다’ 본격적으로 추워진 아침 7시 반 집을 나서는 것은 너무 어려웠고, 축적된 피곤이 극에 다른 지금 6시 반에 일어나는 것은 더더욱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계절학기 신청하던 날로 돌아가면- 수업 하나만 신청해야지. 9시부터 12시까지, 1시부터 4시까지 하루 종일 수업하는 건 힘드니깐, 둘중 하나만 하면 좀 편할거야- 하는 생각을 하는데. 조금 진지하게 고민해봤습니다. 내가 만약, 다시 수강신청 날로 돌아가면, 정말로 수업 하나, 혹은 두 수업 모두 포기할까? 금방 답이 나오더라고요. 네, 저는 아마 지금과 똑같은 선택을 하겠죠. 미래의 나를 믿는다는- 한마디로 수업 두개를 모두 신청해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하고 있듯이 또 버텨내겠죠! 어릴 적부터 아빠는 제게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네가 힘들다고 느낄 때, 더이상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느낄 때, 딱 한 걸음만 더 걸어보라고. 한 걸음 더 걸어지면, 두 걸음은 좀 더 쉬울 것이고, 세 걸음은 그보다 더 쉬울 것이며, 그다음부터는 언제 힘들었냐는 듯이 걷게 된다고. 핫- 한계를 확장하라! 는 아빠의 말도 마치 웹소설에 나오는 클리셰 같네요. 클리셰에 따른 조언을 듣고, 클리셰에 반하는 선택-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 을 하곤 한다.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속으로는 별로 후회하지 않지만 겉으로 후회하는 것을 자주 합니다. 입 밖으로는 내뱉는 후회는 그 ‘한 걸음의 고통’을 알아달라는 노골적인 표현에 불과합니다. 실로는 후회하지 않고 있지만, 나의 아픔을 알아달라는 외침의 방식으로 후회를 택합니다… 일종의 엄살, 혹은 거짓말인거죠… 응… 무엇이 거짓말…?


아빠의 생일을 준비하기 위해 꽃바구니를 주문했고, 이를 픽업하러 나가는 길에 거실의 부모님은 어딜 가냐고 물으셨습니다. 아빠에게 알려주지 않기 위해 자연스레 당근(중고거래)하러 간다고 말했습니다. 무엇을 파냐- 길래 예전에 좋아했던 슈퍼주니어의 앨범을 팔러 간다고 말했고- 엄마는 슈주 앨범을 사려는 사람이 있냐 하셨고- 아빠는 귤을 까시다가 패딩 입고 나가라고 말을 하셨습니다. 태연스레 거짓말을 하고 꽃바구니를 들고 들어와서 방 한구석에 잘 숨겨두고 거실로 나갔습니다. 아빠는 샤워하러 들어가셨고- 엄마는 얼마에 팔았냐고 물었습니다. 그제야 나는 중고거래는 거짓말이고, 아빠를 위한 선물을 준비했다고 하니 엄마는 놀라며 거짓말을 뭘 그렇게 자연스럽게 잘하냐고 하시더군요. 내가 원래 착한 거짓말은 잘해-하고 넘기고 들어와서 생각해보니, 맞아요. 나는 거짓말을 굉장히 잘하더라고요. 남들한테도, 그리고 나한테도. 

나도 헷갈립니다. 이제는 뭐가 거짓말이죠? 나는 후회를 하나요? 내가 날 모르겠습니다. 후회를 하지 않음에도 후회한다고 타인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건지- 되려 내 입은 진실을 말하고 속으로 후회하지 않는다고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건지- 

글이 써지지 않는 이유는 고갈이 아닌 모양입니다. 하긴, 고갈이라고 하기엔 그렇게 쥐어짜지도 않았던 것 같아요. 그냥, ‘나’에 대한 글을 쓰기에는 ‘나’를 모르기 때문일까요. 나는 나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나는 나를 알지 못하나봅니다. 내가 날 좋아하는 이유를 알았어요. 지금껏 내가 짝사랑해온 상대들은 주로 알아갈수록 미스터리한 사람이었는데 나도 그런 사람이었나봅니다. 기분이 딱히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아요. 모르니까, 알아가면 되잖아요?

언제나 제 머릿 속은 과거, 현재, 미래가 뒤섞여 존재하고 있습니다. 온전히 현재에 집중한다는 것, 제겐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과거에 대한 그리움은 슬픔입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불안입니다. 그 슬픔과 불안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것은 언제나 현재의 '나'입니다. 지금의 '나'는 늘 긴장 상태에 있습니다. 과거의 그리움에 매몰될까, 미래에 대한 불안에 잠식될까- 양 손에 팽팽한 고무줄을 잡고 외줄을 걷고 있는 듯합니다. 외줄은 내가 살아온 시간들로 채워져 있어 더 많이 채울 수록 쉽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게 내가 빼곡하게 살아가는 원동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두 달 전 쯤 인터뷰에서 민지 언니는 제가 살아가는 원동력을 물었습니다만, 저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알지 못했으니까요. 두 달 동안 간간히 생각했습니다. 나는 쫓기며 살아가는가. 그렇다면 이렇게 살아가는 게 잘못된건가. 그냥, 내가 그렇게 살도록 태어났다면, 긴장상태로, 불안에 잠식된 채로 살면 안될까요- 삶의 원동력이 불안이 되면 안되는걸까요? 꼭 과거로 돌아가 인생을 바꾸며 불안을 제거해야 하나요?

‘나’는 알아갈수록 잘 모르겠지만, 지금 상태를 알 것 같기도 해요. ‘나’는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해왔는데,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내가 아는 ‘나’의 모습은 지난 여섯번의 글쓰기로 전부 고갈된 모양입니다. 고갈이 나쁘진 않아요. 비워져야, 또 채워질테니까. 이번 글은 의도치 않게 조잡한 자기고백의 글이 되었습니다. 재미없는 글, 읽기 쉽지 않으셨을 텐데,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버디(Buddy)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