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서란 Sep 01. 2022

친구를 입양했습니다

[프롤로그] 시골살이를 통해 만난 친구와 함께 노후를 고민하다


귀농 귀촌한 사람들에게 왜 시골에 사느냐 물으면 대부분 자연환경이 좋아서, 자연인을 동경해서, 본인이나 가족이 아파서, 도시 생활에 회의를 느껴서 혹은 사람에게 상처 받아서 등등 저마다 사연은 다르지만 비슷한 이유로 시골살이를 하게 되었다 말한다.


나 역시 그랬다.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도시에서의 삶은 불편함 없이 모든 것이 풍족했다. 그렇게 도시인으로 익숙하게 살던 어느 날, 출근길 지하철에서 호흡곤란이 왔다. 생전 처음 마주한 공포에 겨우 지하철역 밖으로 나와 호흡을 가다듬은 후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지하철을 탈 수 있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 뒤로도 호흡곤란은 어지럼증, 구토증세와 함께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왔다. 언제라도 또다시 공황이 찾아올 것 같은 두려움에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사람 많은 곳에 가는 것이 점점 무섭고 괴로웠다. 대신 산을 자주 찾았다. 어릴 때부터 막연히 좋아했던 산은 어느 순간 내가 제대로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되었다. 이제는 산이 있는 곳으로 떠날 때가 됐구나, 싶었다.


◇ 순진했던 첫 번째 시골살이, 현실은 환상과 달랐다


시골살이 준비를 위해 넉 달간 하루도 빠짐없이 토요일마다 농장에서 생애 처음 농사를 배웠다. 세상에, 농사가 이렇게 신나고 즐거운 일이었다니! 돈 버는 게 목적이 아니라면 세상에 이보다 더 가치 있고 아름다운 일도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당연했다. 평일에는 농장에서 다 관리해 주고 고작 주말에만 가서 거들 뿐이었으니, 즐거울 수밖에. 그렇게 넉 달간 서울에서의 준비를 마치고, 두 달간 시골 귀농학교에서 시골살이에 필요한 종합적인 교육을 받았다. 그리곤 바로 산자락 시골 마을에 집을 구해 이사했다.


우여곡절 끝에 찾은 나의 첫 번째 귀촌지는 가장 가까운 구멍가게도 7km나 차를 타고 가야 하는 두메산골이었다. 구멍가게는 그나마도 저녁 6시면 문을 닫았다. 마을에는 불과 십여 가구 정도가 거주하고 있는데, 귀촌한 세 가구 외엔 전부 토박이 할머니, 할아버지들만 살고 계셨다. 마을은 작고 예뻤다. 처음 맞이한 시골 풍경은 모든 것이 신기하고,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아침마다 알람 소리 대신 새소리에 잠이 깼고, 현관을 나서면 온통 초록이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심지어 길에 난 흔한 잡초까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이사 간 집엔 귀농·귀촌하는 사람들의 로망, 아궁이가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고구마와 감자도 구워 먹었다. 적정기술(지역의 환경과 사회적 여건 등을 고려해 적은 비용으로도 지속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기술)교육을 받은 뒤엔 난방이 어려운 주방에 2단 가스통 난로도 설치했다. 타닥타닥 나무 타는 소리도, 바라보고 있으면 빠져들게 만드는 장작 불꽃도 모든 게 그저 예쁘기만 했다.


그렇게 겨울을 나면서 땔감을 구하는 일이 점차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인근 산에 가서 땔감을 구해오는 일도 한두 번이지, 나무 나르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 땔감을 구하는 일 말고도 시골집에 사는 건 몸 쓰는 일 투성이였다. 책상 앞에 앉아 머리 쓰는 일만 하던 나는 밖에서 한 시간 일하면 방에 들어와 두 시간을 누워 있어야 했다. 그래도 좋았다. 공기 좋은 시골에서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일 다 해보며 몸을 쓰니 비로소 살아있는 것 같았다. 시골에서는 무언가를 얻으려면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야 하는데, 정말 몸을 쓰는 만큼의 대가가 정직하게 돌아왔다. 하지만, 그렇게 일 년이 지나며 시골살이에 대한 환상이 점점 깨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귀농·귀촌을 ‘사회적 이민’이라고 했다. 문화가 다른 낯선 곳으로 이민 가는 것처럼 철저히 준비해야 잘 정착해 살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겪어보니 그랬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대부분인 시골 생활은 내 생각과 너무 달랐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마을 안에 들어가 산다는 것은 관계 속으로 보다 깊숙이 들어간다는 것이고, 때론 어르신들의 과한 오지랖까지 감수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특히나 마을에서 혼자 사는 젊은 여자는 관심의 대상이다. 시골마을 어르신들은 나의 삶의 방식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존중해주지 않았다.


내가 살던 마을을 둘러봐도 귀농·귀촌인은 대부분 가족 단위였다. 비혼 여성 1인 가구인 나와는 연령대도 가족 형태도 달랐다. 게다가 공통의 관심사가 없다 보니 속 깊은 대화를 나누기도 어려웠다. 마을에서 사람들과 잘 어우러져 살려면 마을에 새로 들어온 나이 어린 내가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자연스레 섞여야 하는데, 지극히 내성적인 성격인 나에겐 너무 힘든 일이었다. 반년 정도 애쓰다 지쳐버렸다. 마을에서 난 너무나 이질적인 존재였다.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걸까’ 회의감이 들었다.


나는 혼자 있는 걸 좋아하니까 자연환경만 좋으면 시골에서도 혼자서 잘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또, 환경이 갖춰진 곳이면 사람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먼저 터를 잡고 살면서 뜻 맞는 사람들을 모아 여러 일들을 함께 도모하며 살고 싶었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시골 생활 두 해를 넘기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커졌다. 그 답을 찾고 싶어 그해 여름 두 달간 여행을 떠났다. 긴 여행이 끝나고 나니 다시 예전에 살던 곳으로 돌아가 살 자신이 없어졌다. 그 길로 지금 사는 이 지역에 먼저 자리 잡고 살던 친구 K를 찾아갔다. 비슷한 시기에 시골살이를 시작한 동갑내기 친구로, 2년 전부터 인연을 맺어 종종 연락을 해오던 터였다.


“나 여기로 이사 오려구요.”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녀를 만나자마자 대뜸 이렇게 말했다. 그런 나에게 그 친구도 짧게 대답했다.


“웰컴.”


◇ 두 번째 시골살이, 친구와 함께 노후를 고민하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나의 두 번째 시골살이, 아니 시골인 듯 시골 아닌 곳에서의 지역살이가 시작됐다. ‘숲이 있고 좋은 공기와 물만 있으면 혼자 얼마든지 살 수 있어’라고 생각한 나였는데, 이곳으로 이사 올 때는 ‘혼자선 절대 시골 마을에는 안 들어갈 거야’라는 생각으로 읍내에 집을 구했다. 이곳은 비록 집 주변에 숲은 없지만 강변 산책로가 있고, 시골도 아니고 도시도 아닌 것이 동네가 묘했다. 창문 너머로 밭이 보이고 멀리서 농기계 소리가 들리는데, 집 근처에 편의점도 있고 20분만 차를 타고 가면 도시에 닿을 수 있다. 드디어 나도 다시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완충지를 거치지 않고 처음부터 서울에서 바로 ‘깡촌’으로 들어갔던 나에게, 시골인 듯 도시인 듯 다양한 면이 공존하는 이곳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첫 번째 시골 마을에 살 땐 항상 주위 사람들을 신경 쓰고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얼굴 보며 살아야 했는데, 이곳에서는 내가 원할 때만 선택적인 만남이 가능했다. 무엇보다 이곳에 살며 감사한 건 마음 맞는 또래 친구가 생겼다는 점이다. 원래 이곳은 비슷한 시기에 귀촌한 또래 지인들이 살고 있어 가끔 왕래하던 곳이다. 전부터 연락하며 지냈던 친구와는 이사 후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새로 알게 된 좋은 사람들도 여럿 생겼다. 특히 맞은편 집에 살던 친구 어리와는 함께 집밥을 먹으며 단짝이 되었다.


어리도 나처럼 도시가 아닌 지역에서 살고 싶던 차에 우연한 기회로 이곳에 와서 살고 있었다. 어리와는 그전에 귀촌캠프에서 만나 서로 얼굴만 아는 사이였는데, 집을 계약한 후에야 우리가 이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사 후 우리는 이웃사촌이 생긴 반가움에 서로의 집에 자주 오가며 식사도 같이하고 대화도 많이 나누며 친해지게 되었다.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우리는 시골에서 무얼 하며 어떻게 살지, 비혼 여성의 노후 준비는 어떻게 해야 할지와 같은 고민을 많이 나눴다. 그러다 혼자보단 둘이 낫지 않을까, 같이 사는 건 어떨까 이야기도 했다. 난 예민한 편이라 이제껏 다른 누군가와 한집에서 사는 건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도 이곳에 오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생각이 변한 건지, 아니면 시골에서 혼자 산다는 게 꽤 피곤하고 어려운 일이라는 걸 직접 경험해 보았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전과는 좀 다르게 살아보고 싶기도 했고, 다른 사람이랑 같이 살면 서로 맞춰가는 과정에서 내가 좀 더 유연해지지는 않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어리도 그즈음 시골 생활 3년 차에 접어들면서 명확히 그려지지 않는 미래를 불안해하며 변화를 원하고 있었다.


그전까지 나는 타인과 공간과 물건을 공유하며 살아본 경험이 별로 없다. 형제도 오빠뿐이라 어릴 때부터 나의 공간, 나의 물건이 따로 존재했고, 성인이 되고 나서는 20년 가까이 혼자 살았다. 그런 내가 이웃집 친구와 차 한 대를 함께 쓰는 카셰어링(Carsharing)을 시작한 데 이어, 한집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건 조심스럽고 또 조심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함께 살아보지, 뭐’ 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우리의 동거가 시작됐다. 타인과 함께 사는 일생일대의 모험에 도전하기로 한 것이다. 나에게 찾아온 놀라운 변화다.


그렇게 시작한 우리의 동거는 만 5년을 지나고 있다. 그동안 우리에겐 여러 변화가 생겼다. 올해 봄, 나는 친구를 입양해 우리는 법적 가족이 되었다. 처음 함께 살 때 ‘과연 우리가 5년 후에도 이렇게 좋은 친구들과 어우러져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했던 물음에 이제는 답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