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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망 Jan 03. 2024

팍팍한 삶에 위트 한 방울

페르난도 보테로

예술 작품은 실생활에 쓸모가 없을 때 가치가 높아진다고 한다. 쓸데없는 것에 과도한 노력, 시간, 재력을 들일 수 있는 것이 플렉스, 즉 자랑거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그림을 끄적이는 건 좋아하지만 미술 작품을 딱히 좋아하진 않는다. 실생활과 동떨어진 형이상학적 세계는 신선놀음 같기 때문이다. 때문에 시대상을 반영하거나 반대로 위트가 느껴져 잠깐 여유를 느끼게 하는 가벼운 작품을 선호하게 되었다.




우연히 보게 되었지만 고전그림들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새롭게 창조해 낸 작가의 위트가 맘에 들었던 까닭에 2009년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린 전시를 가게 되었다. 모나리자나 비너스도 그를 만나면 풍만한 몸집으로 바뀐다. 그의 그림은 고전의 엄숙함과 진지함을 절묘하게 비틀며 유쾌함을 준다. 어렵고 난해한 것만이 예술이 아니라는 일침이다.


페르난도 보테로(Fernando Botero)라는 이름은 낯설어도 그의 그림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번 보고 지나가더라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그림의 특이함 때문이다. 뚱뚱한 모나리자로 대표되는 그의 독특한 화풍은 풍성함(Fullness)으로 일괄된다.


'12세 모나리자'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콜롬비아 메데인 출신인 보테로는 미술관을 학교 삼아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다. 이탈리아로 르네상스 예술을 공부하러 갔다가 미술사에서 다양하게 변주되어 온 '변형'을 깨닫는다. 특히 양감과 형태의 중요성을 강조한 13세기 이탈리아 미술에 감명을 받고 풍만함에 빠져 50년이 넘게 과장되게 부풀려진 형태의 인물, 동물, 정물을 그렸다. 그는 뚱뚱함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부피감을 표현했다 말한다. 더 많이 색을 칠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낸 것이다.


무표정의 단순화된 인물들은 더욱 형태에 집중하게 한다. 그림자는 배제하고 감각적인 색채의 톤 차이를 통해 선명하게 그림이 튀어나온 듯한 양감을 표현한다. 밝고 둥글둥글한 그림은 거칠고 사나운 주제마저 순하게 만든다.

벨라스케스 모작
거리 (2000)


그의 그림에 대해 "단순히 뚱보로 그리는 것은 예술이 아니다. 즐거움만을 강조하는 예술은 매춘"이라는 비난도 있었지만 그는 오히려 당당했다.
 “모든 예술은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오아시스여야 합니다. 비평가들이 그걸 매춘이라고 부른다면, 제 작품은 매춘이 맞습니다.”


그는 마약 카르텔과 폭력이 만연한 메데인에서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낸 만큼 사람에 대해 동정과 사랑을 갖고 따뜻한 시선을 견지한다. 세계적 화가로 인정받으면서도 고향 메데인에 평화를 위한 비둘기상 조각을 기부하며 유머와 평화를 전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카르텔의 폭탄 테러로 비둘기상이 크게 훼손되었지만 당당하게 다시 한번 비둘기상을 만들어 기부한다. 파손된 비둘기상과 나란히 설치해 전쟁과 평화의 상징을 눈 앞에서 느끼도록 했다. 이후로도 1999년부터 2004년까지 콜롬비아의 폭력사태를 다룬 그림들을 그려 콜롬비아 국립박물관에 기증했다.



보테로가 2005년 파리 아틀리에에서 이라크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의 갖가지 고문, 모욕, 악폐를 소재로 그린 작품을 공개했다. <AFP연합>


또한 2003년 이라크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에 갇힌 이들을 미군이 다양하게 학대한 기사와 사진들을 보고 아부 그라이브 학대 시리즈를 그린다. 세상의 부조리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고발하고 비판한 것이다. 또한 이 작품들도 판매하지 않고 기부함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고통의 기억을 공유하기 원했다.

“좋은 예술가는 해답을 찾지만, 위대한 예술가는 문제를 찾습니다.”



그가 작년 9월 91세의 나이로 운명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마음이 울렁였다. 짧지 않은 생이었으나 참 빼곡했다. 생전 보테로는 자신의 작품 123점과 개인 소장품 85점을 콜롬비아 보고타 보테로 박물관에 기증하여 현재 모든 작품을 무료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살아서 유명을 누린 몇 안 되는 작가 중 한 명이지만 시대상을 담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주려 애썼다.

어려운 것을 쉽게, 쉬운 것을 깊게, 깊은 것을 밝게 담아내던 화가 보테로. 남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지 않고 자신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담아낸 그는 독보적이었다. 누구에게나 친근히 다가가 자신의 생각을 쉽고 유쾌하게, 혹은 신랄하게 표현한 그는 지성 있는 선구자였고, 훌륭한 예술가였다.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시점이다. 시작이라는 단어에 희망을 담아 활기를 전해본다. 지구 곳곳의 분쟁과 전쟁에도 평화가 깃들기를.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작은 미소로 하나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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