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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망 Dec 27. 2023

쉬어가는 것도 재능

안경 | 오기가미 나오코

갓 대학을 졸업하고 선교단체에서 일하게 된 20대였다.

함께 일하는 동료인 L은 나보다 1년 먼저 들어온 선배 격이었지만 동갑내기 친구처럼 늘 소탈하고 친근했다. 웃으면 눈 언저리 둥그런 곡선만 남는 하회탈 같은 얼굴로 일 하나는 똑 부러지게 처리하는 믿음직한 구석이 있었다. 제대로 해내겠다는 열정이 가득했던 L과 나는 종종 밤늦도록 일을 하고 같이 회사를 나서는 퇴근 메이트였다. 음악 취향도 비슷해서 인디밴드 음악을 소개해주고 밤늦게는 같이 라디오도 틀어놓고 일을 하곤 했다.


L은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했고 다큐멘터리 영화도 찍어 수상한 적이 있는 유망한 감독이기도 했다. 편협해서 이것저것 접하지 않는 나와 달리 그녀는 폭넓고 깊어서 다양한 것들을 두루 섭렵했는데 마치 문화 얼리어답터 같았달까. 이런 그녀의 선택이라면 나는 묻지도 않고 무조건 좋다고 답했다. 그녀 역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어 했고 그래서 우리는 좋은 친구였다.


하루는 그녀가 영화제를 하자고 했다. 목요일 저녁 회의실에서 프로젝트빔으로 자신이 고른 영화를 같이 보자고 했다. 마음 맞는 몇 명이 같이 했다. 약간의 간식거리와 함께 오순도순 모여 이야기도 나누며 그렇게 L영화제가 시작되었다. 가끔은 배달음식 저녁을 앞에 두고 하기도 했다. 때로 일이 마무리되지 않아서 제 시간에 가지 못하면 VIP특권이라며 나를 위해 상영시간을 조금 늦춰주기도 했다. 큐레이터의 취향대로 즐기는 영화제였다. 그녀는 잔잔한 일본영화들을 여럿 소개해 주었는데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개봉되지 않은 영화들이었다.

이 영화 역시 그녀의 선택이었다.





<안경>은 <카모메식당>으로 유명한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2007년작으로 <카모메식당>을 개봉한 지 4개월 만에 이 영화를 개봉했다. 또 이 영화의 주연인 코바야시 사토미는 두 영화에 모두 출연했다. 카모메식당의 야무진 식당주인이 이 영화의 주인공인 어리숙한 대학교수다.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뮤즈라 불리는 모타이 마사코 역시 두 영화에 빠지지 않는데 무표정한 듯 진지한 얼굴로 무언가 깊은 이야기상상하게 한다.

(좌)오기가미 나오코 감독   (중)코바야시 사토미    (우)모타이 마사코


우스꽝스러운 포스터만큼 이 영화는 묘한 구석이 있다. 장르가 코미디로 분류되어 있는데 어디서 웃어야 할지 애매하다. 드라마라 하기에도 잔잔하고 소소한 기복 없는 이야기라 지루하다. 힐링영화라는 미사여구에 혹하더라도 함부로 찾아보지 않길 권한다. 영화를 시작한 지 몇 분도 안 돼서 이걸 계속 봐야 하나 고민에 잠길 수 있기 때문에 이 글로 만족하셔. 뒤늦게 필자를 탓해도 어쩔 수 없다. 시간이 너무 남아돌아 그저 눈에 담을 무언가가 필요하다면, 무얼 분석할 것도 없이 풍경 보듯 가만히 지켜보다 보면 나도 모르는 새 주인공을 따라가게 된다.


헤매지 않고 잘 찾아오셨네요.
그러고 보니 헤매지 않고 온 손님도 삼 년 만입니다. 재능이 있네요. 여기에 있을 재능.




대학교수인 타에코는 여유를 보내기 위해 휴대전화가 터지지 않는 시골 섬마을로 여행을 왔는데 찾아오기 힘들었던 만큼 조용히 지내기도 쉽지 않다. 혼자 있을라치면 민박집주인이 이상한 체조를 같이 하자 부르고 모르는 사람들과 밥도 다 같이 먹어야 한다. 늦잠이라도 잘라치면 조용히 옆에 앉아 인사한다.(공포물인가?) 관광할 곳은 없고 사색이나 하며 시간을 보내라는 민박집주인. 사색을 해볼라 쳐도 맘 같지 않다.


여긴 아니다 싶어 다른 숙소로 옮겼더니 수도원인양 낮엔 일하고 밤엔 공부해야 하는 쉴 틈 없는 일정에 그대로 돌아 나왔다. 제 몸만 한 캐리어를 끌고 가다 지친 타에코를 자전거 뒤에 태워주는 사쿠라. 챙겨가기에 너무 큰 캐리어는 길바닥에 과감히 버려두고 다시금 민박집으로 돌아온다. 사색이 습관인 사람들 곁으로. 캐리어와 함께 그녀가 이제껏 차리던 체면과 눈치를 내버린 듯하다. 이상하고 우스꽝스러운 메르시 체조를 함께 하게 되면서 그녀는 차츰 익숙해진다.

출처: 네이버 영화

빙수가게 주인 사쿠라는 투명한 유리그릇에 하얀 얼음을 산처럼 쌓아준다. 돈 대신 자신이 주고 싶은 것을 주면 빙수를 먹을 수 있다. 아이는 종이접기를 주고 빙수를 먹는다. 타에코는 빙수값으로 빨간 목도리를 떠준다. 이제 곧 여름을 앞두고.


눈을 뜨면 안경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던 타에코는 이제 바람에 안경이 날아가버려도 행복하다. 시간이 흘러 또 어느 봄, 약속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다시 민박집에 모인다. 사쿠라는 타에코의 빨간 목도리를 매고.


왠지 불안해지는 지점에서 2분 정도 더 참고 가면 거기서 오른쪽입니다.


민박집 약도를 이렇게 적어주는 주인은 손님이 많이 오질 바라지 않는다. 간판도 알아보기 힘들 만큼 작다. 그럼에도 그곳에 찾아온다면 (남들 눈에는 우스꽝스러울지 몰라도) 그들만의 사색과 평화를 누린다. 도시생활과 달리.


뜨개질이란 게 공기도 같이 짜는 거라고 말하죠?
중요한 건 조급해하지 않는 것.
초조해하지 않으면 언젠가 반드시
아무리 성실히 한다 해도 휴식은 필요해요.
사람은 죽으면 어떻게 되요?
이 물고기랑 같아요. 한번 죽으면 두 번은 안 죽는다.


<안경>이란 제목은 감독이 그냥 정했다는데 모든 배우가 끼고 있는 안경이 익살스럽다. 그들 모두 이 여행을 통해 새로운 안경으로 바꾸게 됐을까?각자의 관점으로 영화를 즐기길.


정말 지루해 못 참을 지점에서 5분만 더 견디면 그리워질 영화. 이 영화를 소개해준 L이 그립다. L영화제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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