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천망 Dec 13. 2023

위로와 희망, 빌려드려요

흔들리며 피는 꽃 | 도종환

20대, 무엇을 하든 자유롭고 내 맘대로 될 것 같지만 막상 앞은 보이지 않고 마음이 부유하는 시기. 이 시를 만났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도종환, 「흔들리며 피는 꽃」 전문




시를 딱히 좋아하진 않았다. 시라고는 학창 시절 수업으로 배운 게 다였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감성적이고 추상적인 시인들의 세계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화자는 누구고 청자는 누구냐? 그런 분석을 해야 하는 건가 싶었다. 함축적인 단어들과 맥락 속에서 숨은 뜻을 찾아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어찌 보면 한낱 말장난 같았다. 글자가 적으니 시집 한 권 읽기야 한 시간도 안 걸릴 텐데 쉽게 손이 가지도, 읽히지도 않았다.


그런데 마음에 딱 맞는 시를 알고 나니 시의 의미, 효용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감정의 발산과 해소

마음의 정화

더 깊은 사색으로의 안내

마음속 의지의 발현, 되뇜.


시는 진술이 아니라 표현이라 한다. 산문처럼 구구절절 나열하지 않고 심상을 전달한다는 말이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이런 진부한 표현 외에 떠오르는 단어가 없다.) 미디어의 발전으로 등단과 시인에 대한 기준이 흐릿해졌다. 그래서 단순히 운율만을 강조하고 의미 없는 단어만 반복하는 시들이 있는가 하면, 모든 생각, 상황을 죽 벌여놓은 산문시나 자유시들도 많다. 그래서 함축과 함유, 은유와 같은 시의 형식이나 본질이 많이 파괴되었다며 자유시를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역시 쉽게 읽히는 시를 사랑한다. 쉽게 읽히는 시가 모두 쉽게 쓰이진 않았을 것이다. 거르고 걸러 적확한 단어를 찾았겠지. 불필요한 글들은 덜어내고 많은 사람에게 닿을 수 있는 언어의 정수를 뽑아냈으리라. 결국 시도 읽히기 위해 있는 거니까.


시는 서정적이다.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기 때문에 미묘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아름답기만 한 시에선 거리감이 느껴진다. 뭐랄까. 저 혼자 유토피아에 있는 것 같달까? 도종환 시인의 시는 담백한 힘이 있다. 여리기만 하지도 않고 아름답기만 하지도 않다. 마치 어린 사슴을 보는 것 같다. 갓 태어나 가냘프고 비틀거려도 제 발로 굳게 일어서려는 의지가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꽃들은 흔들리지만 쉽게 꺾이지 않고 비에 젖어도 따뜻하게 꽃 피운다.


산짐승은 몸에 병이 들면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다
숲이 내려보내는 바람 소리에 귀를 세우고
제 혀로 상처를 핥으며
아픈 시간이 몸을 지나가길 기다린다

나도 가만히 있자

-도종환,「병든 짐승」 전문


때로 모든 일이 내 맘 같지 않을 때 현실에 좌절하여 자신만의 동굴에 웅크릴 때가 있다. 주위 상황에 민감해지고 쓰린 마음을 부여잡아야 할 때. 그때 이런 시 하나면 위안이 된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아! 이럴 땐 잠잠히 기다리면 되는구나. 같은 처지를 알아주고 위로해 주는 사람이 있구나.



대학을 졸업하고 많은 고민 끝에 선교단체에서 일하게 됐을 때 도종환시인의 시집을 선물 받았다.

앞으로 많은 감격과 많은 고통도 아울러 느껴갈 네게...
그래도 그 모든 시간이 지나 너를 완성해 감을 배우길 바란다.

그 언니는 쉽지 않을 거라 했다. 그러나 그 속에서 마음 깊은 감동들이 있을 거라 했다. 언니 스스로 이 시에서 힘을 느낀 듯했다. 또 나에게도 주고 싶었던 것 같다. '곧게 산 나무의 직선이 모여 가장 부드러운 자태로 앉아있는' 「부드러운 직선」 같은 삶에 대한 지혜를.

시를 많이 읽으라 조언했다. 시의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이 일상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거라고.

시의 아름다움은 모르지만 생각할 여지를 주니 좋다. 홀로 되뇌는 다짐을 시인의 단정한 단어로 바꿔 표현할 수 있으니 좋다.


그래서 희망적인 시를 좋아하게 되었나 보다. 일상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이 있듯이 모든 행복한 상황 속에도 슬픔과 어려움이 존재하니 말이다.

암담한 시기,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시를 빌려 희망을 키운다. 시인이 소소한 담쟁이에서 본 희망을 나도 힘든 누군가에게 전한다. 여리지만 포기하지 않는 의지를.

20대의 나에게 필요했던 것.

시간이 흘러 지금의 나도 사랑하는 이 의지를.

빌려드려요.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엎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도종환,「담쟁이」 전문


이전 02화 바람이 이끌고 사랑이 깨닫는 여정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