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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망 Dec 06. 2023

바람이 이끌고 사랑이 깨닫는 여정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겠지 | 오소희

나는 스스로를 위해 책을 사는 일이 좀처럼 없다. 산다 해도 지인에게 선물할 때고 대개 도서관에서 빌려본다. 매주 두어 권씩 책을 읽던 시기에는 그만큼 책을 살 돈도 없었고 산 책을 쌓아둘 공간도 없었다. 모든 책이 마음에 남았던 것도 아니고 잠깐의 유희로 지나갈 책에 낭비하는 사치를 하기 싫었다.



20대에 이 책을 만났다. 제목에 마음이 끌렸고 여행기라니 여기저기 다닌 이야기겠구나 싶었다. 책 구절구절 작가의 생각이 가슴에 남아 20여 년간 되뇌었다. 정확한 문구가 기억나진 않았다. 작가가 누구였는지 혹은 어디로 여행을 떠났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책은 오래 남았다. 시간이 지나도 기억에 남아 자꾸만 되새김질하게 만드는 이 책만은 꼭 사야겠다 싶어 모든 기록을 뒤졌다. 대부분의 기록을 잃어버렸지만 다행히 당시 읽은 책 목록이 남아있었고 제목을 보자마자 '이거다!'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금 찾아 간직하게 되었다.




세 살배기 JB와 함께 떠난 배낭여행, 그곳에서 작가는 인생을 배운다. 아이는 내 계획과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몇 발자국 더 걸으면 뒷골목에 싸고 맛난 음식점이 있더라도 중심가의 여행객을 위한 비싸고 맛없는 음식점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눈앞에 관광지가 있어도 마음껏 갈 수 없다. 혹여 관광지에 발을 들여도 아이의 흥미를 붙잡지 못하면 이내 '나가자'는 목소리가 이끈다. 반대로 아이가 즐거워하면 나가려 해도 그곳을 벗어나기 힘들다. 갑자기 피곤하다며 낮잠이라도 자게 된다면 그날의 일정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이런 아이와 왜 여행을 떠나냐고 물을 것이다. 시간과 돈 낭비다. 사람들은 'why?'를 묻지만 그녀는 'why not?'을 다짐했다. 작가는 차츰 그 상황에서, 아이와의 관계 속에서 지혜를 배운다.


한 달간 터키를 여행하며 작가가 찍은 아름다운 유물과 풍경사진들이 면면을 장식하지만 그녀가 들려주는 것은 옛날 유물, 유적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이는 아이가 보고 싶은 것을 본다. 때로는 같은 것을 보고 즐거워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아이는 나와 다른 것을 '선택'한다. 그것은 곧 '엄마, 나는 나름대로 여행을 즐기고 있어요'하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아이는 마치 선물처럼,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들을 알게 해 주었다. 아이의 보폭은 좁고 일정은 늘어졌지만 아이는 그렇게 걷지 않았으면 결코 보지 못했을 것들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렇게 조용하고 작지만 생생히 살아있는 것을 좇는 아이의 눈을 따라 죽은 자의 흔적대신 그 자리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해 쓰고 생각한다. 가난한 나라를 여행하는 여행자로서 느끼는 미안함, 안타까움. 무례한 자국민 단체 여행객에게서 느끼는 부끄러움과 이미 이골이 나 작가의 변명이 통하지 않는 현지인들의 단호한 불만에서 느끼는 곤혹스러움. 자본주의라는 톱니바퀴 기기의 한 부분인 듯 약아버린 이들을 만나는 피곤함, 그러나 대부분이 아이 덕분에 만나게 되는 이들에게서 느끼는 따뜻함이다. 또래라면, 아니 그저 아이이기만 면 언제 어디서든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친구가 되어 함께 노는 아이를 따라 그녀도 말 없는 대화로, 손짓발짓으로, 여러 나라 말로 사람들과 소통하게 된다.


올림포스에서 그녀는 터키남자와 결혼한 로라의 하소연을 듣는다. 아이를 좋아하는데 아이를 키울 능력이 안되서 네 번이나 지웠다는. 푸념을 견딜 수 없어하는 작가의 독백은 매섭기까지 하다.


로라는 모르고 있었다. 관계의 많은 부분이 희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자신이 희생하는 것들과만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무언가를 좋아하는데 그것을 얻을 수 없다면 이유는 간단하다. 그 '무언가'를 위해 자신이 희생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 그들은 자신의 생각과 달리, 그 '무언가'를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희생하지도 않는 것이다.



아이는 아이대로 올곧이 자신의 발로 자신의 속도로 걸으며 여행하도록 하고 작가는 때로 자신만의 여행을 하고 돌아온다. 무모하리만큼 용감한 작가의 사람들에 대한 믿음에 놀라고, 서로를 인간으로 존중하는 모자의 이 깊은 신뢰의 관계에 대해서도 놀란다. 여행기보다 육아에세이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은 누가 누구를 키우고 챙기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돌보기에 육아라 하기에도 충분치 않다. 그저 그녀의 지혜로운 삶의 기록이라 하자.




"엄마, 오늘 참 재밌었어!"

"이 방 너무 예쁘다"



여행 중 최악의 순간이라 느껴질 때 속삭이는 아이의 말이 여행을 계속하게 하는 힘이다. 이 작은 여행자는 모든 순간을 충만히 누리며 즐거움을 발견하고 있는데 옆에서 어떻게 불평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사랑스러운 동행 같으니라고.


"엄마, 그동안 잘해줘서 고마워."



이 따뜻하고 담대한 기록은 몇 번이고 다시 들여다보게 하는 매력이 있다. 일상의 짐을 내려놓기 힘든 당신이라도 이 책과 함께라면 낯선 도시를 꿈꾸게 될 것 같다. 작가가 여행을 통해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 그 자리에 대해 생각하게 됐던 것처럼. 아이와 딱 붙어있던 시기를 지나 적당한 간격의 호흡을 깨닫게 된 것처럼. 당신의 바람이 당신의 자리를 돌아보게 해 주길.


내가 10대였을 때는, 누군가 타인을 위해 봉사하고 내가 하기 어려운 일을 앞장서 해준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에 불과했다.

내가 20대였을 때, 타인에게 봉사하는 것은 감사해야 할 일이지만, 자신의 삶을 성실히 영위하는 것은 '먹고 살기 위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30대인 내게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것은 '위대한' 일이며, 자신의 삶을 성실히 살아가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자신의 삶을 성실히 꾸려나가는 것에도 부단한 노력과 결심이 필요하다는 것, 그러한 노력과 결심이 조용히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까닭이다.


©예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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