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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댁에 가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

by ACCIGRAPHY






"외숙모! 근데 화장하는 그 연필이

(펜슬라이너) 너무 몽당한데

새거 사야 되는 거 아니에요?"


"아니. 아직 일 년은 더 쓸 수 있어.

난 검소한 사람이거든!"


'검소'하다는 표현에 누워있던 남편이

나지막이 콧웃음을 친다.


남편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의 기준에 차지 않을 뿐 나는 검소하다.


나는 쇼핑하러 가면 10분 내에 모든 걸 끝내는 편이다. 뭘 원하는 게 잘 없는 데다 간혹 생기기라도 하면 그 원하는 바는 꽤 구체적이라 쇼핑은 나에게 10분 내에 끝내는 무언가이다. 찾으면 좋고 없으면 인연이 없겠거니 하고 집에 온다. 하필이면 원했던 무언가가 대부분 고가였던 것이 콧웃음을 유발했나 싶기도 하다.


큰 시누 둘째 딸이 대화를 이어간다.


"검소? 그게 뭐예요?"

"응, 돈 잘 안 쓰는 거."

"어? 그거 우리 엄마도 있는데

(My mom HAS it.)."


우리 엄마도 '그런데'도 아니고 무슨 병증처럼 우리 엄마도 '있는데'라고 해서 새벽부터 크게 웃었다. 나는 뭐가 한번 웃기면 좀 오래 웃는 편이다. 내가 계속해서 어깨를 들썩거리자 이 딸내미도 일단 들썩거린다. 어제 나와 같이 자고 싶었던 소망이 엄마에 의해 꺾여버린 탓에 뭐라도 함께 하고 싶은 맘에 들썩이는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코끼리 베개를 들고 쿵쾅대며 우리가 있는 방으로 달려온 그녀는 아침이 되어도 내가 없어지지 않고 있어서 참으로 행복한 모양이었다.


우리가 어젯밤을 함께하지 못한 이유는 이틀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큰 시누 둘째 딸은 여섯 살이지만

몸이 좋은 편이다.


팔씨름을 하자기에 응해주려 폼을 잡는데 일단 나보다 팔이 굵고 딴딴했다. 애기라고 봐줄 상황이 아님을 깨달은 나는 경기에 진지하게 임했고 승부는 당연히 근육량의 승리로 돌아갔다. 체급차가 컸기에 여섯 살 여성에게 진 것에 별 감흥은 없었다.


팔씨름을 마치고 잘 시간이 되자 그녀는 나와 함께 자고 싶다는 강한 의사를 표했다. 엄마는 당연히 뜯어말렸지만 서로 좋아하는 우리는 한마음 한 뜻으로 엄마를 설득해 냈고 둘 다 눕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애기는 몸부림이 심했다. 밤새 그 튼튼한 팔과 다리로 나를 후드려팼는데 내가 점점 멀어져 갈수록 팔다리를 더 거세게 휘둘러가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 휘두름은 한 침대에서 내가 어디까지 도망갔는지 감지하는 용도로 쓰는 것 같았다. 나는 더 도망가다가는 많이 맞을 것 같아 그녀가 사지를 휘두를 공간을 차단해 버리기로 했다. 나는 그녀에게 겨우 숨 쉴 공간만을 허락한 채 옆으로 딱 붙어 누워 내 팔다리로 그녀의 사지를 제압했다.


그제야 그녀는 깊은 호흡을 시작하며 잠에 빠져들었다.


아... 원한 게 이거였구나...

문제는 회피할수록 커지고 직면하는 순간 사라진다는 가르침을 온몸으로 배웠다.


심오한 깨달음과 함께 시계를 보니

새벽 4시였다.




아침부터 시댁 근처에 사는 친구집에 놀러 가기로 되어있던 나는 비몽사몽 로션을 찍어 바르며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가 일어난 낌새를 챈 애기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 내 옆에 앉았다.


"외숙모! 우리 오늘 밤에도 같이 잘 거죠?(세상 해맑음)"


"아니! 오늘은 같이 안 잘 건데?(나도 세상 해맑음)"


"왜요? 나는 같이 자고 싶은데..."


나는 우리가 왜 오늘 밤을 함께할 수 없는지에 대해서 일부러 아주 길게 설명해 주었고 시종일관 웃는 낯을 유지했다. 마치 좋은 소식이라도 전하는 냥. 남편 말이 맞았다. 나는 사기꾼이었다.


설명이 너무 길어지자 '왜'에 대한 생각의 흐름을 잃어버린 이 아이는 내 웃는 낯만을 보고 일단 알겠다고 했다. 다행이었다.




장난감 잔과 빨대를 꺼내 주스를 따라놓고는 나를 파티에 초대했다. 아끼는 물건이란다. 경미한 결벽증이 있는 나는 너무 고맙다며 진한 감동을 표한 후 남편을 초대해 마시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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