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봄방학이라 힘들다.
나는 남편을 사랑하지만
혼자 있는 시간을 더 사랑하는 것 같다.
남편의 비문증이 아파트단지라면 오늘의 내 비문증은 집안 풍경에 온통 걸려있는 남편이다. 안 되겠어서 동종업계 남편 친구들에게 남편이 집에 있음을 굳이 알린다. 그럼 여기저기 소환 돼 나가는데 만남들이 하나같이 간결해서 뭘 좀 해보려 하면 돌아오고 돌아오고 하니 화가 난다.
집에 걸려있는 남편의 풍경이 못마땅한 것은 타인이 내는 무작위적 소리나 움직임이 걸리적거려서다. 바로 옆에 있으나 멀리 있으나 다른 방에 있으나 똑같다. 그 불규칙의 움직임이 또 언제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남편의 경우 가는 곳마다 최대치로 불가역적 흔적을 남기며 성성한 육근을 드러내는 재능이 있다.
엔트로피 그 자체.
나는 고요한 아침을 좋아한다.
좋아한다기보다는 그날 하루를 잘 사는데 필수적이다. 남편에게 아침에 제발 세탁기를 돌리지 말라고 여러 번 당부했지만 지켜지지 않는 나날들이 많았다. 어제도 남편의 무질서한 움직임이 계속되자 본의 아니게 아침부터 한숨이 푹푹 나왔다.
남편은 내가 한숨 쉬면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돌아보는 습성이 있기에 갑자기 부엌으로 가더니 계란 세 개를 삶기 시작했다. 그놈을 마요네즈 양배추랑 버무려 샌드위치를 만들더니 저 멀리 혼자 산에 다녀왔다. 배낭 메고 뚤레뚤레 나가는 모습이 어딘가 짠했지만 하루종일 혼자 있으니 행복했다. 오늘도 좀 나갔으면 했는데 안 나간다.
나는 평생 혼자 많이 오래 있었다. 혼자 여행했고 학창 시절에 혼자 매점 다녔다. 친구들이 같이 매점 안 간다고 같이 화장실 안 간다고 삐지곤 했다. 그렇다고 내가 친구들을 사랑 안 한 건 아니다. 친구들을 사랑했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남편이 너무너무 좋은데 혼자 있을 때의 기쁨이 승리할 때가 많았다.
Crown Shyness 수관기피
: 나무들끼리 서로 닿지 않으려는 본능. 특정 종에서 발견되는 현상.
나는 수관기피 지수가 높은 식물이라 시공간적으로 좀 많이 내벼둠이 필요하다. 몸 마음을 널따랗게 펼쳐놓아야 호흡이 안정되고 생각이 돌아가고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남편은 내가 이런 사람임을 알고 이해해 주지만 아직도 가끔 마음의 상처를 입는 것 같다. 남편에게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것과 너를 사랑하는 것은 별개라고 자주 말한다. 다행인 것은 남편도 수관기피형 인간이라는 것이다. 다만 내가 매번 더 멀리 달아날 뿐.
웃긴 것은
만약 남편이 당장 내 삶에서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나는 내 삶도 함께 접어도 여한 없는 마음이 올라온다. 따라 죽겠다는 허무한 소리는 아니고 그냥 '여한 없음'이다. 이제 남편은 정말이지 내 존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원래 그랬기에 만났나 싶기도 하고. 가끔 꿈에, 남편은 그냥 내 친구고 다른 남자가 내 남편인 꿈을 꾼다. 그럴 때마다 덩그러니 멀치감치 앉아있는 남편을 바라보며 '저 사람이 내 남편인데 왜 저기 있지'하면서 꿈에서 엉엉 운다. 남편은 꿈이나 생시나 내게 태양처럼 따뜻하다.
남편 봄방학을 맞아 또 길을 나선다.
작년에는 친한 커플 여섯이 로드트립을 같이했는데 올해는 둘이 간다.
내일 아침 출발 예정!
콜로라도가 봄에 예쁘니 일주일 정도 돌아볼 생각이다. 나는 남편과 집에 함께 있는 건 싫어하지만 자연에 함께 있는 건 괜찮다. 왜냐면 집에서 남편은 비문증이지만 여행할 땐 슈퍼히어로니까.
여행 플래너
운전기사
짐꾼
국립공원 해설사
구조대원
말동무
기타 등등
야외에선 아주 마음에 든다.
자연에선 그도 나도 몸 마음을 널따랗게 펼쳐놓고 널따랗게 조우할 수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살면서
나 만큼 부조리한 존재를 본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