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이야기는 빌드업이 길다.
"잠깐 신분증 좀 볼 수 있을까요?"
양갈래로 머리를 곱게 땋은, 스트로매 (Stromae)처럼 생긴 곱상한 경찰 아저씨가 다가왔다.
나는 여권을 보여주었고 그는 나와 여권을 여러 번 훑어보더니 같이 경찰서로 가자 했다. 경찰은 내 여권을 좀 더 살펴봐야겠으니 며칠 있다가 여권을 다시 찾으러 오라 했다.
20대 중반에 네덜란드 여행 중에 일어난 일.
위트레흐트(Utrecht)라는 도시를 여행하던 나는 여느 때처럼 길에서 글씨를 쓰고 있었다. 경찰과 조우한 적은 많았지만 여권을 뺏긴 건 처음이었다.
안 좋은 일은 한꺼번에 닥친다고, 지갑까지 잃어버린 나는 주머니에 뭐가 있나 뒤적여 보았다.
분홍색 10유로가 나왔다.
나는 그걸로 빅맥을 사 먹고 오롯이 빈털터리가 되어 길가 벤치에 앉아 운하를 바라보았다.
이역만리 외국 땅에서 내 신분을 증명할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돈도 없고 당장 밤에 잘 곳도 없었다.
멍하니 운하를 바라보는데 희한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건 사실 '생각'이라기보다는 인생 처음으로 '있는 그대로 뭔가를 본 경험'일 것이다.
운하를 바라보는데 별안간 내 모습이 있는 그대로 눈에 스윽 들어오면서 불안 걱정이 사라졌다. 마치 내가 주인공인 영화를 내 눈으로 관람하는 느낌이었고 현재 주인공은 곤란한 상황을 맞닥뜨린 씬을 촬영 중이었다.
그게 다였다.
나는 곤란한 씬을 어떻게 극적으로 연결시킬까 궁리하다 문방사우를 다시 길에 펼쳤다. 마침 길거리 음반 매장에서 U2의 Beautiful Day가 흘러나온다. 영화의 사운드트랙이 내가 좋아하는 노래로 바뀌고 나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흥얼흥얼 글씨를 쓴다. U2를 좋아한다는 어떤 청년이 다가와 내가 팔려고 써 놓은 글씨를 몽땅 사간다. 수중에 몇 백 유로가 생겼다. 이 돈이면 일주일은 풍족하게 살 수 있다.
그날 후로 나는 내 인생의 플레이어이자 관찰자, 배우이자 감독임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온몸으로 알게 된 무언가는 평생의 자산이 되어 주는 것 같다.
그래서 도대체 이 이야기가 제목과 어떻게 연결이 되느냐?
이왕 내가 주인공인 영화를 찍는 게 내 삶인 줄 알아버린 이상 실제로 나를 찍어보는 아침 리추얼을 시작한 것.
하루 중 아침에 가장 지혜로운 편이라 일단 매일 아침에 떠오르는 문장이나 단어를 캔버스에 붓으로 적고 그 과정을 촬영해 보기로 했다. 아침에만 떠오르는 재밌는 생각들을 흘려보내지 않는 나다운 리추얼이 될 것 같았다.
별거 아닌데
해보니 정신에 활기가 돈다.
미래에 전혀 다른 무언가로 발전해 있을 하나의 프로젝트에 시작점을 찍은 것 같기도 하다.
아니어도 뭐 어때.
지금 나에게 행복과 활기를 주었으니
그걸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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