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ne out the rest
우리 동네에 당근은 없어요. 개인 간 상식의 선이 너무 관대해서 당근 하기 무섭달까요?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그럼에도 아름다운 문화가 하나 있어요. 멀쩡한데 안 쓰는 물건들을 집 앞에다 고이 내놓는 거죠. 멀리서 보면 플리마켓 같은데 가까이 가보면 'free'라고 쓰여 있어요. 물론 저도 내놓습니다. 다른 지역도 그런지 모르겠어요. 우리 동네만 그런 것 같기도 한데 일단 저로서는 너무 반가운 문화예요.
일단 동네 사람들 취향이 저랑 비슷해서 건질 게 좀 있습니다. 이를테면 중고마켓에서 고가로 유통되는 음반, 희귀 서적, 쓰다 만 물감 같은 거요. 빈손으로 달리기 나갔다가 손에 뭔가가 들려진 채 함께 달리기도 하고 가끔 달리기는 홀딱 까먹고 두 손 무겁게 귀가하는 날도 있습니다. 그게 물건이건 과일이건 이 동네는 제게 뭔가를 자꾸 주섬주섬 건네고 저는 덥석덥석 받습니다. 받을 땐 내 평생 원했던 게 이거라는 표정으로 받는 편이고요.
사실 저는 물건을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그렇다고 미니멀리스트는 아닙니다. 그 어떤 이스트도 아니에요. 그냥 세상에 쓸데없고 못생긴 물건이 너무 많아서 가끔 눈이 아프달까요. 물론 잘 차려입고 가야 하는 자리에는 좋은 옷을 사 입죠. 요리조리 태세를 잘 바꿉니다.
하루는 날 잡고 생각해 봤죠. 모든 개인이 특유의 분위기를 지니듯 한 동네가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무형의 에너지가 있다면 이곳 사람들은
탐미주의자
게으름
비정규직
심드렁
유기농
달리기
정도의 연관 키워드를 지녔겠구나.
세상에서 달리기를 제일 싫어하던 제가 이 동네에 오고 달리기를 시작하게 된 것도 이 동네 사람들의 집단 무의식이 나를 수년에 걸쳐 살살살 꼬셔온 게 아닌가 싶어요. 다는 아니겠지만 일부 작용했다고 봅니다.
아니, 세상에 최근엔 뭘 주웠는지 아세요? 물욕 없는 제가 아주 오랜만에 갖고 싶게 된 러닝화가 있었는데 하필 그 신발이 뉘 집 문 앞에 다른 러닝 소품들과 함께 펼쳐져 있지 않겠어요? 그것도 내 사이즈로! 도톰한 헤어밴드도 있길래 신발이랑 같이 줍줍!
엄마가 보면 길에서 뭐 주워 신는다고 경악하겠지만 신발 주인은 얼마나 뿌듯하겠냐 이 말이야. 나도 가끔 내 물건 밖에다 내놓고 누가 갖고 가나 지켜보거든? 누가 갖고 가면 너무 짜릿해. 행복해. 주운 신발 깨끗이 빨아 신고 헤어밴드 하고 동네 한 바퀴 도는데 이 동네가 나를 먹여주고 살려준다는 생각에 목맥혀 하늘을 쳐다보니 봉황이 한 마리 두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