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Ⅲ
이런 상황에서 의병들이 일본이 아닌 우리나라 관군과 싸워야 했던 상황은 심리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고종은 싸우라고 밀지를 내려주지만, 실제로 이들을 진압하러 내려오는 사람은 관군입니다. 의병이나 관군 모두 당시의 국가 상황을 알기에 서로 싸울 수밖에 없는 당사자들의 마음은 무거웠을 것입니다.
을사늑약 이후 일제가 의병 탄압을 강요하자 대한제국 정부는 지방관들에게 의병 조사와 그 진압 방법을 마련하게 합니다. 그리고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이후에는 경찰과 순사들을 동원하여 의병을 진압하였습니다.1)
해산 군인들은 의병에 합류하지만 그 이전에는 의병을 진압했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어떤 마음이었을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의병들은 일본군이나 관군뿐 아니라 민족의 배신자들과도 싸워야 했습니다. 먼저는 일본이 고용한 밀정(공작원)이었습니다.
군대 해산 이후 일본군은 밀정을 고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의병 정찰, 토벌, 체포, 회유, 고문, 심지어는 불법적인 살인을 저질렀습니다.2) 청년 신돌석 역시 일제의 밀정이 된 부하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일제는 헌병보조원도 고용합니다. 이들은 대한제국의 하급군인으로 활동하던 자 중 군대 해산 이후 실직한 자들로 고용되었는데, 대한제국 정부는 1908년 헌병보조원으로 무려 4천여 명을 뽑아 일본군 토벌대의 보조역할을 시킵니다.3)
다음 글은 한 의병장이 헌병보조원에게 보내 그들의 매국활동을 청산하도록 한 것입니다.
너희들은 대한인민으로서 오직 생활을 위해 외국인의 노예가 되었어도 그 진심으로 일본에 진력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만약 너희들이 출장할 때 일본헌병 1명이 너희들 3, 4명을 이끌고 출장하는 기회를 엿보아 너희들 3, 4명은 헌병 1명을 살해해 그 머리를 우리 의병대에 가져오는 것은 한 나라의 충신이며 또 특별 상여금으로 금 50원을 줄 것이다. 너희들의 숙고는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4)
밀정, 헌병보조원뿐 아니라 민족의 배신자 중에는 자위대 출신도 있었습니다. 자위대는 지역을 지키기 위해 조직된 단체라는 뜻을 갖고 있지만 이 자위대는 일본에게 한일합방을 청원한 매국단체, 일진회가 조직한 것이었습니다.
대한제국을 일본의 나라로 만들어달라고 청원하기 이전부터 이미 지역에 자위대를 스스로 조직하여 적극적으로 의병을 탄압했으니 일진회는 가장 질이 좋지 않은 매국 세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5)
일본군이 의병 진압을 명목으로 지역주민들에게 행한 무차별적인 폭력은 의병 활동의 또 다른 장애였습니다. 그들은 의병인지 양민인지 충분히 확인하지 않고 주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양민인줄 알면서도 체포하였고, 마을 주민들을 학살하고 마을과 사찰을 소각하여 주민들이 의병에 협조할 수 없도록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습니다.6)
의병과 일본군 사이의 교전으로 주민들의 피해가 커지자 지역 주민들은 의병을 피하게 됩니다. 또한 의병이 군수물자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민가를 방화하는 경우도 발생했는데, 이런 경우 일제의 앞잡이가 된 정부는 피해를 입은 민가에 지원금을 주고, 의병을 체포한 사람에게 상금을 주는 식으로 지역민과 의병의 관계를 차단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일본의 회유책은 지역민뿐 아니라 의병에게도 사용하였기 때문에 점점 고립되어간 의병들이 투항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7)
이런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의병의 의로운 활동은 계속됩니다. 그러자 일제는 국권 강탈 1년 전인 1909년, 의병 초토화를 위해 대규모 작전을 실행합니다. 그것이 남한대토벌작전입니다. 군대 해산 이후 조직된 의병들은 비록 서울진공작전에서 실패했지만, 오히려 삼남 지역(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이 확산된 상황은 일제가 한반도를 식민지화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2개 연대의 대규모 군대를 파견한 일제는 헌병과 경찰까지 동원하여 학살에 가까운 두 달간의 만행을 저지릅니다. 이것이 남한대토벌작전이고 이로 인해 국내 의병 활동은 사실상 재기 불능 상태가 됩니다.8)
역사 배경지식이 풍부한 분들은 일제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의병이 발생했고, 시기별 정치적 상황에 따라 을미의병·을사의병·정미의병이 일어났으며, 서울진공작전은 실패하고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의병 활동이 큰 피해를 입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의병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선택이었는지를 짐작해보는 것입니다.
평민으로서 의병에 참여한다는 것은 조선시대 신분제의 한계 속에서 차별과 배고픔을 견디는 것이고, 압도적인 무력을 지닌 일제와 일제의 꼭두각시가 된 정부, 그리고 친일 세력이라는 불의한 세력들과 맞서는 것이고, 살기 위해 의병을 떠나려는 유혹을 견디며 끝까지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마지막까지 흠 없는 의병장으로 존경받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짐작할 수 있고, 이런 이유로 평민 의병장으로서의 청년 신돌석의 생애가 더욱 빛나는 것입니다.
1) 조재곤, 「러일전쟁 이후 의병탄압과 협력자들」, 『한국학논총』37,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2, 431·435쪽
2) 조재곤, 「러일전쟁 이후 의병탄압과 협력자들」, 『한국학논총』37,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2, 435쪽
3) 조재곤, 「러일전쟁 이후 의병탄압과 협력자들」, 『한국학논총』37,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2, 444쪽
4) 조재곤, 「러일전쟁 이후 의병탄압과 협력자들」, 『한국학논총』37,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2, 449쪽
5) 「일진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6) 김헌주, 「대한제국기 의병운동의 쇠퇴와 사회적 고립과정」, 『역사와 현실』111, 한국역사연구회, 2019.3, 296·301쪽
7) 김헌주, 「대한제국기 의병운동의 쇠퇴와 사회적 고립과정」, 『역사와 현실』111, 한국역사연구회, 2019.3,307·311쪽
조재곤, 「러일전쟁 이후 의병탄압과 협력자들」, 『한국학논총』37,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2, 432쪽
8) 「남한대토벌작전」,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