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Ⅲ
조선에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청과 일본의 경쟁은 청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이 승리합니다. 이로써 중체서용을 내세운 청의 양무운동은 실패했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전쟁 패배로 충격을 받은 청은 정치제도와 교육제도를 좀 더 근본적으로 개혁하려는 변법자강운동을 실시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보수파의 반발로 불과 3개월 만에 좌절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서양의 경제적 침탈에 대한 중국 민중의 반감이 더욱 고조되자, 이들의 불만은 의화단 운동으로 표출됩니다. 의화단이라는 종교 단체를 중심으로 ‘부청멸양(청을 돕고 서양을 멸하자)’을 내세운 이들은 철도·전신을 파괴하거나 서양 선교사를 죽이고, 외국 공사관을 습격하는 반외세 활동을 전개했는데, 이 때문에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 일본 등 8개국 연합국이 결성되어 의화단운동을 강경 진압하게 됩니다. 그 결과 청은 막대한 배상금뿐 아니라 외국 군대 상주를 허용하는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면서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하게 됩니다.1)
반면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로 동아시아의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청일전쟁 패배로 랴오둥반도를 일본에 할양한다는 조약에 불만을 품은 러시아는 삼국간섭을 일으켜 일본을 견제하고, 일본은 랴오둥반도를 포기하게 됩니다.
국제적 상황을 인지한 조선은 러시아에 접근하는데, 여기에 위기를 느낀 일본은 명성황후 살해라는 극단적인 만행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리고 을미사변 직후 구성된 친일 내각이 단발령을 발표하는 을미개혁을 실시하자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 의병인 을미의병이 일어납니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을미의병은 개혁을 실시하는 관리나 친일파를 처단하고, 관군 및 일본군과 항전하였으며, 전선·철도 등 일본군의 군용시설을 파괴하거나 일본군 주둔지를 공격하였습니다. 신돌석도 이때 처음 의병에 참여합니다.
친일 정권을 중심으로 의병 진압이 진행되는 중에 아관파천이 단행되어 친일 정권이 무너지자 정부는 단발령을 철폐하고 의병 해산을 권고하는 조칙을 발표합니다. 이 때문에 을미의병은 점차 쇠퇴하게 됩니다.2)
이 시기에는 독립신문이 발행되고, 독립협회가 활동하였으며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서 환궁하여 대한제국을 선포합니다. 이후 정부는 전제권력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라를 이끌었으며, 제국주의 국가 간의 복잡한 외교 상황에서 어렵게 국권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청일전쟁 이후 진행된 국제적 상황은 일본의 의도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바로 조선에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겠지만, 청일전쟁 이후 이어진 삼국간섭과 아관파천의 상황은 러시아가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상기시켰습니다. 이 때문에 일본은 러시아와 협상을 벌이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킵니다. 이것은 한반도에서 청을 몰아낸 청일전쟁 발발 10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러일전쟁이 발발하기 전 대한제국의 외교 상황은 위태했습니다. 1901년에서부터 1904년까지 4년 동안 외교 업무를 담당하는 외부대신이 20번 넘게 교체되었던 상황은 대한제국이 정상적인 외교를 할 수 없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3)
이런 상황에서 러일전쟁 발발 1년 전, 러시아와 일본의 갈등이 고조되는 용암포 사건이 일어납니다. 용암포는 압록강 하구의 목재 집산지였는데, 러시아는 군대를 동원하여 이곳을 강제 점령한 후 대한제국 정부에 조차를 요구하여 이를 실현시킵니다.
그러나 러시아의 팽창을 우려한 일본·영국·미국은 러시아의 용암포 점령의 불법을 내세워 개항을 요구합니다. 대한제국 정부는 이에 러시아에 허락한 용암포 조차를 취소하고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의 요구대로 개항하여 이 사건을 일단락 짓습니다.4)
이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대한제국은 열강 사이에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제국 정부의 안일함을 볼 수 있는 일이 벌어지는데 그것은 고종의 황제 즉위 40주년이자 50회 탄신 잔치였습니다.
고종의 황제 즉위 40주년 잔치는 러시아가 용암포의 조차 요구를 수락하는 가조약 체결 5일 후에 벌어지는데, 이날 덕수궁 뜰에서 기생이 노래하고 춤추는 가운데 술은 샘처럼 넘쳤고 평소 수라상의 10배가 넘는 가짓수의 음식으로 3,000명의 중앙 공무원들을 상대로 성대한 행사를 벌입니다.
나라는 외채 때문에 빚더미에 올라 오늘내일하는 상황이었지만 이 행사를 위해 엄청난 예산을 들여 잔치를 벌이고 외국 사신을 초청하고, 그 때문에 새로 영빈관을 짓고, 광화문 네거리에 비각을 세웠다고 하니 당시의 상황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5)
고종의 황제 즉위 40주년 잔치가 있은 지 3개월 후, 일본과 러시아의 대립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러시아는 일본에 39도선(대동강에서 원산)을 중심으로 양국이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자는 제안을 합니다.
한반도 분할은 광복 후 미국과 소련에 의한 38도선 분할만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한반도 분할이 논의된 역사는 꽤 오래되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은 명과 대동강, 한성 등을 명과의 분할선으로 고려한 적이 있으며, 청일전쟁 발발 직전에는 청이 일본에게 서울을 중심으로 남북을 분할 점령하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습니다.
삼국간섭으로 타격을 받은 일본은 세력을 만회하고자 러시아에 접근하여 한반도에 대한 분할안을 제시한 적이 있는데 그때는 러시아가 거절합니다. 당시 분할안에 대한 정확한 자료가 현존하지 않아 논란이 있지만 38도선·39도선·대동강 선등이 제시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러시아가 39도선을 제시한 것이고, 이 제안을 이번에는 일본이 거부합니다.6)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 상황 속에서 대한제국은 중립화를 위해 노력하였고, 러시아와 일본의 결전이 현실화되자 대한제국은 1904년 1월, 대외중립을 선언합니다.7)
하지만 일본은 그해 2월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대한제국의 중립화 선언을 무시하고 대한제국을 협박해 조선의 군사 요충지를 수시로 사용할 수 있다는 내용의 ‘한일의정서’를 체결합니다.8)
1) 「변법자강운동」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안정애, 「의화단운동」,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가람기획, 2012, 네이버 지식백과
2) 「을미의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3) 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4, 인물과 사상사, 2007, 9쪽
4) 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4, 인물과 사상사, 2007, 10쪽
5) 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4, 인물과 사상사, 2007, 15-17쪽
6) 이완범, 「한반도 분할의 국제정치학 : 19세기말-20세기 초 열강간이 논의를 중심으로」, 『국제정치논총』 42, 한국국제정치학회, 2002.12, 193-197
7) 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4, 인물과 사상사, 2007, 40쪽
8) 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4, 인물과 사상사, 2007, 4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