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신돌석, ​#052 의병 활동의 한계(2)

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Ⅲ

by 연결고리


시대 읽기


#052 의병 활동의 한계2 – 군자금 확보와 화력의 열세



의병 활동의 어려움은 또 있습니다. 바로 입니다. 의병 활동에서 돈은 가장 중요하지만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불의한 상황에 맞서 이해타산을 고려하지 않고 문제 해결을 위해 뛰어드는 정의로운 청년이 있기도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습니다. 의로운 행동으로 하루이틀만에 문제가 끝나면 다행이지만, 일이 년이 아니라 십이십 년이 지나도 불의에 맞서는 일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경우라면 생계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의로움을 위해 모인 의병이지만, 의병들에게는 급료라는 대가가 지급되었습니다. 그 대우는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정규군보다 좋았습니다. 일례로 총을 쏘는 포군의 경우 을미의병 당시 정부군이 받은 월급보다 대략 3배 이상, 많게는 5배에 가까운 거액을 급료로 받기도 했습니다.1) 따라서 의병장은 의병 동원을 위해 이런 거금을 마련해야 했고, 돈이 없다면 의병 운영은 바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돈을 많이 지급하면 의로운 일과 상관없는 사람도 돈을 위해 의병에 참여하게 될 것이고, 아무리 거부인 의병장이라도 자금이 금세 바닥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의병 활동이 정상적으로 지속될 수 있을까요?


을미의병 당시 한 의병장은 의병이 많이 모인 상황에서 자금이 부족해지자 급료를 감액하게 됩니다. 그러자 100여 명의 포군은 “소인 등이 부모와 처자를 버리고 의병을 따른 것이 오늘로 한 달이 넘었는데, 약간의 급료에서 남는 것으로 부모를 봉양하고 처자를 양육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급료를 감하여 소인들의 가족들이 굶어 죽게 생겼으니 소인 등은 이를 따를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의병을 떠나는 일도 있었습니다.2)


신돌석이 의병장이 된 후 그 아버지가 대부분의 재산을 의병 활동에 지원한 것도 이런 맥락이었습니다. 그래서 의병장은 부호들에게 군자금을 얻기 위해 노력했는데, 당연히 이를 명분 삼아 폭력적인 행위를 일삼는 나쁜 의병장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호들의 재산을 강제로 빼앗거나 소와 돼지 등 가축을 마구 죽이는 폭력적인 행동을 보였습니다. 또 평소에 집안끼리 원수가 졌거나 개인감정이 있을 때는 의병 봉기를 계기로 복수하는 일도 있었습니다.3)


이런 불의한 의병 활동을 반기는 세력도 있었습니다. 바로 화적입니다. 화적은 산속에 숨어 떼를 지어 재물을 빼앗는 도둑 집단인데, 이들은 의병을 계기로 활동을 재기합니다. 그래서 신문 기사에서는 이 화적들이 재물을 탈취하거나 불을 지를 때 자신들을 의병이라고 한다고 비판하기도 합니다.4) 돈을 밝히는 이런 화적들이 의병으로 가장하니 당연히 민중들은 의병에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고, 실제로 화적들에게 약탈당한 사람이라면 일본이 규정하는 방식대로 의병을 ‘폭도’로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의로운 행위로 모인 사람들이지만 지배층은 ‘명분’을 위해, 피지배층은 ‘돈’을 위해 부자연스러운 연합을 했으니, 민족을 위한 확고한 신념이 없다면 자금 부족으로 의병 활동이 위태로워질 때 사람들은 언제든지 의병을 떠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처음보다는 마지막까지 남아 의병 투쟁을 이어간 사람을 더욱 의롭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금이 마련되었다고 해도 고려해야 할 문제가 또 있습니다. 바로 전투를 벌일 수 있는 화력을 소유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침략당하는 나라는 제국주의 국가에 비해 기술문명이 뒤처져 있는 상황이었고, 의병은 열악한 무기조차 정부로부터 전혀 지원받을 수 없었습니다. 동학농민군이 일본군에 맞서 싸울 때의 상황은 둘의 화력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한 이후 동학농민군은 일본을 몰아낸다는 명분으로 2차 봉기를 감행합니다. 이들은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대를 상대로 싸워야 했는데, 농민군은 관군으로부터 노획한 근대적 화기로 일부 무장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조총으로 무장했고, 그것도 없으면 창이나 죽창으로 싸웠습니다.


조총은 탄환 발사를 위해 화약을 점화하는 노끈을 화승이라고 해서 화승총으로도 불렸습니다. 조총은 임진왜란 발발 1년 전에 쓰시마섬의 도주가 선물하여 처음 전해진 이래, 임진왜란을 거친 후 국내 제조에 성공하면서 대량 생산 되어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무기가 됩니다.


임잰왜란 당시에는 획기적인 무기였으나 그로부터 약 400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불을 붙여 총을 발사하는 무기는 속도도 느리지만 우천 시에는 사용할 수 없었고, 사거리는 100보 정도에 발사 속도는 분당 2발 정도에 불과해 전투에 극히 불리했습니다.


반면 일본군은 영국에서 수입한 스나이더 소총, 일본이 개발한 무라타 소총, 그리고 개틀링 기관총으로 무장했습니다. 일본군이 사용하는 소총의 사거리는 400~500보나 되었고, 눈이나 비에 영향을 받지 않고 분당 12발 연속 사격이 가능했습니다. 게다가 미국에서 입수한 개틀링 기관총은 분당 200발가량을 발사할 수 있는 획기적인 무기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일본군 1인이 농민군 수천 명을 당해낼 수 있고, 관군 1인은 농민군 수십 명을 상대할 수 있다는 극단적인 전력 평가가 나오기도 했는데, 우금치 전투에서 크게 패한 농민군이 최종 저항에 나설 당시 전력은 무려 8,000명인데 비해 관군은 230명, 일본군은 불과 40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최종 저항은 실패로 끝납니다.5)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의병들의 효율적인 전투 방식은 신돌석처럼 게릴라 전술이었고, 부족한 무기를 보급하기 위해서는 관군의 병기고를 습격해야만 했습니다.


공인되지 않은 무력 집단이라는 인식, 성리학적 사고에 근거한 신분 차별, 부족한 자금 사정과 열악한 화력은 의로움을 위해 뭉친 이들이 견뎌야 할 현실적인 난관이었습니다.


1) 오영섭, 「한말의병운동에 대한 새로운 이해」, 『군사』52,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4.8, 84-85쪽
2) 오영섭, 「한말의병운동에 대한 새로운 이해」, 『군사』52,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4.8, 86쪽
3) 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3, 인물과 사상사, 2007, 15쪽
4) 김헌주, 「대한제국기 의병운동 참여주체의 지향 재인식」, 『한국사학보』78, 고려사학회, 2020.2, 175쪽
5) 국사편찬위원회, 『신편한국사』39, 국사편찬위원회, 2002, 481-482쪽
「화승총」,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김병륜, 「조총」, 『무기의 세계』, 유용원의 군사세계, 네이버 지식백과
내셔널지오그래픽채널, 「기관총의 진화」, 『다큐사이언스』, 2011, 네이버 지식백과
박병진, [한국의 무기 이야기] <14>세계의 명품 소총 ③세계 첫 기관총 ‘개틀링 건’, 세계일보, 2011.8.3


"역경에 굴복하지 않는 나는 청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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