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Ⅲ
의병은 자신들의 행위를 의롭다고 여겼지만, 공인되지 않은 무력 행사에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의병은 자신들의 활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특별한 조치가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왕의 인정, 바로 고종의 밀지를 받는 것이었습니다.1)
의병을 이끈 양반 유생들은 신분제 유지를 희망하는 지배층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행동은 근왕(勤王,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는 행동)적인 성격을 띠게 되고, 왕의 밀지는 그들에게 정통성을 부여하는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실제로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의 야욕을 파악한 한 의병장은 고종 세력에게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고종의 밀지를 내려달라고 요청하지만, 그들은 시기상조를 이유로 응하지 않다가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나서야 밀지를 얻었고, 또 다른 의병장은 을사늑약 체결 후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단신으로 상경하여 고종의 밀지를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온라인으로 뜻을 전할 수 있는 지금 시대에는 문제가 없겠지만, 그 당시 위기의 순간에서 왕의 명령을 직접 전달받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왕의 밀지를 받지 못한 채 의병을 일으키는 경우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왕의 밀지를 받지 못하고 활동했던 의병장들은 주변으로부터 비난을 받았습니다.2)
국가의 위기를 충분히 인식하면서도 그 위기의 긴급성을 자신들이 분석하고 판단하여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으로 움직이고, 나라를 빼앗기는 상황에서조차 왕의 명령이 의로움의 평가 기준이 되었다는 사실은 ‘성리학적 명분’을 중시하는 사회의 한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평민 신돌석이 의병장으로 나서 양반 가문의 후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신돌석 역시 밀지를 받은 고종 세력의 후원과 지도가 있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밀지를 받은 고종 세력에 의해 의병장의 자격을 인정받지 못했다면, 신돌석은 자신의 신분을 능가하는 다수의 인사들과 의병을 조직하는 일이 애초에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3)
고종의 밀지는 의병의 정당성을 인정해주지만, 한 편으로는 의병이 성리학적 명분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규정하는 것이고, 이것은 국권 회복을 위한 의병 활동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명분’에 얽매인 양반의 태도가 어떤 문제를 일으켰는지 양반 의병장 3명의 사례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인물은 최익현입니다. 그는 외국 문물 유입을 반대하는 대표적인 위정척사파였으며, 상소로 흥선대원군을 하야시킨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을미의병과 을사의병의 의병장으로 활약하는데 을사의병 당시 그의 나이는 74세였고, 고종의 밀지를 바탕으로 의병을 일으킵니다.
자신이 일으킨 의병을 일본 군경이 아니라 조선 군인이 진압하러 오자 동족 살상을 막기 위해 그는 설득에 나섭니다. 그런데 설득이 되지 않자 왕을 대표하는 관군과는 싸울 수 없다는 당황스러운 이유로 의병 활동의 취지에 맞지 않게 의병 해산을 명령합니다.
관군에 붙잡힌 최익현은 일본 헌병사령부에 의해 쓰시마에 끌려갔는데, 그곳에서 단식을 하다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런데, 이때도 최익현의 식사비를 고종이 보낸다는 일본군 수비대장의 말을 듣고 마음의 약해지기도 합니다. 양반 유생이 어떤 태도를 갖고 의병 활동에 임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4)
두 번째 인물은 유인석입니다. 그 역시 위적청사파로 강화도조약 체결을 반대한 인물입니다. 을미의병장으로 활동한 그는 의병운동의 전 시기에 걸쳐 모든 문서에 청에 의해 멸망한 명의 연호를 사용한 인물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대한제국의 국권이 강탈될 때까지 일관되게 나타납니다. 그는 자신 스스로 명나라 황제를 섬긴다고 말했으며 명나라 신하였던 조선을 ‘패륜을 행하는 오랑캐’와 같은 등급으로 만들었다며 개화 세력을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는 중화의 회복을 가장 우선하였기 때문에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가 되자 이를 반대했습니다.5) 그에게는 국권의 회복보다 중국에 대한 사대관계 회복이 더욱 중요했던 것입니다. 한국사 교과서에서 유인석은 을미의병장으로 이름만 간단히 언급되어 있는데, 그가 이런 생각을 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학생들이 알게 된다면 많이 놀랄 것입니다.
세 번째 인물은 이인영입니다.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후 해산군인들이 의병에 가담하자 의병의 성격과 화력은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이들 정미의병은 13도 연합의병대를 조직하고 서울진공작전을 계획하는데, 서울진공작전을 이끈 13도 연합의병대의 총대장이 이인영이었습니다.
당시 전국 1만여 명의 의병은 서울진격을 앞둔 시점이었고, 이때 이인영은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듣습니다. 나라의 운명과 부친의 사망 사이에서 여러분이라면 어떤 결정을 내리시겠습니까?
이인영은 “나라에 불충하는 것은 부모에 불효하는 것과 같고 부모에게 불효하는 것은 나라에 불충하는 것과 같다. 그 도(道)는 하나며, 둘이 아닌 것이니 나는 나라의 풍속을 지켜 3년 상을 치루어 효도를 마친 후 재기하겠다.”라고 말합니다.6)
그런데 그는 총대장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간 것으로 그치지 않고, 각 의병 부대에 의병 활동을 ‘중단’하라는 황당한 통문을 내립니다. 국권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전국 의병의 총대장이라는 자리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아무리 성리학적 사회라고 해도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입니다. 또한 자신만 의병장을 내려놓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나머지 의병들에게도 의병활동을 중단하라는 통보를 내린 행위를 납득할 수 있을까요? 서울진공작전은 결국 다른 인물의 지도하에 시도되지만, 머뭇거린 상황에서 첩보를 입수한 일본군에 의해 작전은 실패로 끝납니다.7)
고향으로 돌아간 이인영은 이름을 이시영으로 바꾸고 노모와 두 아들을 거느리고 지역을 옮기며 숨어 살다가 일본군 헌병에 체포되어 감옥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이인영이 체포된 후 그를 심문하는 일본육군 헌병 대위는 ‘큰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부모와 형제도 돌보지 않는다’는 맹자의 말을 인용하여 총대장을 포기한 이인영의 행위를 비난합니다. 그러자 이인영은 ‘한국의 풍습에는 아버지 사망 후 상복을 입어야 하고, 이를 지키지 않으면 부모에게 불효하게 되어 짐승이 되고, 짐승은 왕의 신하가 될 수 없으니 불충하는 것’이라고 반박합니다.8)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다고 해도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대답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양반 유생 의병장들은 왕에 대한 충성, 중화의 회복, 부친에 대한 효도 등의 성리학적 명분을 내세워 활동했기 때문에 국민이 주인이 되는 근대국가 건설을 위해 싸우는 일은 어려웠고, 항일을 명분으로 하더라도 고종의 명령에 따라 언제든지 의병 활동은 중단될 수 있었습니다.
성리학적 사고에 근거한 그들은 신분을 기준으로 의병 내에서 차별을 자행했다는 점에서 문제가 컸습니다.
한 평민 의병장은 원래 문학을 하던 유명한 가문 후손이었으나 집안이 일찍 몰락해서 머슴으로 살다가 의병을 이끌게 됩니다. 그는 머슴꾼 100여 명을 모집했고, 자신의 거병 계획을 유생들에게 알려 도움을 청했지만, 유생들은 그가 무식하고 명망이 없기 때문에 함께 하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여 그 평민 의병장을 지원하지 않습니다.9)
의병의 다수는 농민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양반 유생 의병장에 의한 신분적 갈등도 존재했습니다. 유생들은 동학농민군의 잔존 세력이 을미의병에 참여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했고, 평민 의병장을 화적으로 매도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의병장은 병사들이 행진할 때 ‘양반과 상놈, 적자와 서자는 하늘이 낸 것이니 이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신분 차별적 노래를 불러 하층민의 반감을 일으켰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유인석은 의병 전투의 선봉장이었던 평민이 양반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평민 선봉장을 처형했는데, 그 때문에 의병의 사기가 크게 꺾이자 그의 부대는 결국 해체되기에 이릅니다.10)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한 13도 연합의병대의 양반 유생 의병장들은 각도 의병대장에서 신돌석, 홍범도와 같은 평민 의병장을 제외했다는 사실은 이미 언급했습니다.
양반 의병장들의 이러한 행동은 평민들에게 깊은 좌절감을 안겨주었고, 의병 세력 결속에 장애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명분을 중시한 지배층의 허례허식도 의병 활동의 방해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허례허식의 이해를 돕기 위해 조선의 전화 통화 과정을 예로 들겠습니다.
1890년대 말 정부 각처에 전화가 설치되자 정부의 관리는 복잡한 절차를 거쳐 통화를 합니다. 먼저 관리는 상투를 단정히 고치고, 전화기를 향해 읍(揖,두 손을 맞잡아 얼굴 앞으로 들어 올리고 허리를 앞으로 공손히 구부렸다가 몸을 펴면서 손을 내리는 인사)을 한 후 전화기를 돌립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나오면 성명 이외에 직함, 품계, 본관을 말하고, 상대 부서 고관의 안부를 물은 후 당사자 부모의 안부를 묻습니다. 본격적인 안건은 이것을 모두 마쳐야 가능했습니다. 왕실 업무를 담당하는 궁내부에 전화할 때는 절차가 더 복잡해집니다. 관복을 모두 착용한 후 전화를 향해 큰 절을 네 번하고 엎드려서 수화기에 대화를 했던 것입니다.11) 물론 이를 모두 지키지는 않았을지라도 명분을 위한 예절의 도가 지나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의병장 사이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연출됩니다. 유생들은 유건을 쓰고 도포 자락이 펄럭이는 선비 예복을 입은 상태에서 전투에 임하거나, 전장에서도 나이에 따라 격식을 차려 서로 읍을 하고 길을 비켜 절하며 주인과 손님의 예를 갖춘 진퇴의 예절을 지켰다고 합니다.12)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는 긴박한 상황에서 이런 행동을 납득할 수 있을까요? 『매천야록』에서는 최익현의 군대를 기율이 없는 오합지졸이라고 묘사했는데, 의병에 참여한 유생들은 큰 관을 쓰고 넓은 옷소매의 의복을 입어 마치 과거장에 나가는 것 같았으며 총탄이 어떤 물건인지 알지도 못했다고 기록했습니다.13)
결국 성리학적 명분에 얽매인 의병의 태도는 실제 전투에 전혀 유용하지 못했고, 의병 스스로의 활동을 제약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 오영섭, 「한말의병운동에 대한 새로운 이해」, 『군사』52,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4.8, 61쪽
2) 오영섭, 「한말의병운동에 대한 새로운 이해」, 『군사』52,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4.8, 65쪽
3) 오영섭, 「한말의병운동에 대한 새로운 이해」, 『군사』52,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4.8, 79쪽
4) 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4, 인물과 사상사, 2007, 235-236쪽
5) 김헌주, 「대한제국기 의병운동 참여주체의 지향 재인식」, 『한국사학보』78, 고려사학회, 2020.2, 164-165쪽
6) 김헌주, 「대한제국기 의병운동 참여주체의 지향 재인식」, 『한국사학보』78, 고려사학회, 2020.2, 162쪽
「서울진공작전」,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7) 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4, 인물과 사상사, 2007, 331쪽
8) 김헌주, 「대한제국기 의병운동 참여주체의 지향 재인식」, 『한국사학보』78, 고려사학회, 2020.2, 162-163쪽
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4, 인물과 사상사, 2007, 331쪽
9) 김헌주, 「대한제국기 의병운동 참여주체의 지향 재인식」, 『한국사학보』78, 고려사학회, 2020.2, 172쪽
10) 역사문제연구소 민중생활사연구모임, 「역사기행 평민의병장 신돌석의 전적지를 찾아서」, 『역사비평』, 역사비평사, 1988.9, 299쪽
11) 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3, 인물과 사상사, 2007, 129쪽
12) 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3, 인물과 사상사, 2007, 15쪽
13) 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4, 인물과 사상사, 2007, 2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