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Ⅲ
1903년, 26세의 청년 신돌석은 6년간의 침묵을 깨고 항일 활동을 재개합니다.
이때가 바로 고종의 즉위 40주년, 50회 생일이었던 해입니다. 백성들이 열강의 이권 침탈 속에 신음하고, 가뭄으로 고통받고 있을 때, 3,000명의 중앙 관리들이 놀고먹는 상황을 청년 신돌석이 목격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나라가 위기라고 생각해서 범죄자가 될 것을 각오하고 밥을 굶어가며 무력투쟁을 벌이려는 큰 각오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배신감이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왕이나 중앙관리가 아닌, 주변의 고통 받는 사람들 때문에 자신의 행동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중앙에서 이렇게 무기력하고 부패한 모습을 보일 때 지방에서는 신분적 차별을 겪는 평민 청년이 정부가 손쓰지 못하는 일을 시작합니다. 청년 신돌석은 경북 청도지역을 지나다가 전신주를 세우고 있던 일본 공병 5~6명을 마주치게 되었는데, 신돌석은 그 전신주를 뽑아 그것으로 일본 공병을 쳐 죽였다고 전합니다. 또 부산항에서는 일본 배를 전복시키고, 일본인들을 바위로 끌고 가 밀어서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당시 그는 일본인들에게 일본 군선의 배 수리를 어떻게 하는지 물었는데 그때 그들이 화를 내며 먼저 발포하려고 하자 그런 행동을 했다고 합니다.1)
이런 무력 행동은 중앙정부나 실력 양성을 추구하는 개화 세력에게 불편하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김구가 을미사변을 복수하기 위해 일본인을 맨손으로 처단한 사건은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이 일로 사형이 확정되었는데 다행히 형 집행 직전 고종이 전화하여 목숨을 건집니다. 하지만 김구는 석방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탈옥을 감행합니다.2)
정부의 입장에서 사적 무력 행사는 어떤 상황에서도 용인되지 않는 것입니다. 게다가 정부는 정권의 안녕을 추구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외교적으로 불미스러운 사안이 발생하는 것을 꺼렸을지도 모릅니다.
러일전쟁 발발 전 당시의 상황에 대해 한 언론은 일본인이 많이 이주하여 철도, 전보, 석탄광, 금광, 고래잡이, 우체국 설치, 은행소 설치, 학교 설치 등을 통해 일본인이 막대한 이익을 얻어가는 형편이라며 비판했습니다.3) 그렇다 하더라도 개화된 지식인의 관점에서 일본인에 대한 폭력 행사를 독려할 수는 없었습니다. 근대는 폭력이 아니라 ‘법’에 의해 문제를 개선해야 하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일본의 약탈적인 이권 착취는 그 고통을 당하는 민중들에게는 폭력적으로 느껴졌을 것이지만 정부는 외국에게 이권을 넘기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비판하는 단체를 해산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부조리를 개선하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결국 신돌석의 입장에서는 무력투쟁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신돌석이 경북에서 의병 활동을 하지 않고 서울에서 개최된 만민공동회에 참석했다면 어떤 방식으로 항일 운동을 했을지 궁금합니다.
일본의 식민지적 지배가 확실한 상황에서 실력을 양성하여 저항하는 개화 운동 세력과 무력으로 일본에 저항하려는 의병 세력은 서로의 단점을 상호보완하면서 일본에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국권피탈이 되는 상황까지 두 세력의 연합이 이뤄지지 못했기에, 이것은 당시의 시대적 한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드디어 발발합니다. 그리고 이 해 가을, 27세의 신돌석은 한 정자에 올라 나라를 걱정하는 시를 짓습니다. 이 시는 그의 생각을 알려주는 유일한 글이라고 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누각에 오른 나그네, 갈 길을 잊고서
폐허가 된 단군의 터전을 한탄하노라.
남아 27세 무엇을 이루었는가.
잠시 추풍에 기대니 감개만 이는구나.4)
그는 아마도 이 시에서 을사의병으로 활동하게 될 자신의 심정을 드러낸 듯합니다.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나고, 그해 11월 일제는 대한제국에 을사늑약을 강제합니다. 지금껏 일제는 교묘한 작업으로 조선의 이권을 빼앗아 왔는데, 을사늑약에는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일본의 노골적인 침략 의지가 드러납니다.
이 조약으로 민중은 거세게 저항하지만, 조선에 주재하던 외국공사관은 발 빠르게 철수합니다. 이때 어느 나라 공사관이 가장 빨리 철수했을까요? 바로 미국입니다. 서양 국가 중 조선과 가장 먼저 근대적 조약을 체결했던 미국이 가장 먼저 대한제국과 단교한 상황은 국제 외교의 냉혹한 현실을 보여줍니다.5)
조약체결의 여파로 매국노를 처단하라는 상소가 빗발쳤고, 그들을 습격하는 사람도 생깁니다. 전국에서 의병이 잇달아 일어날 때 경북에서도 의병이 활발하게 조직됩니다.
고종은 자신이 신임했던 경북 출신의 관리에게 의병을 일으키라는 밀지를 주었는데, 이 관리는 고향에 있던 아들을 서울로 불러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킬 것을 논의합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1906년 4월, 경북 영해로 가서 청년 신돌석을 만납니다.
그가 신돌석을 만났다는 것은 영해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킬 인물로 이미 신돌석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만남을 통해 청년 신돌석은 고종의 밀지라는 의병 활동의 정당성을 확보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곧바로 영해에서 의병을 조직합니다. 이렇게 29세의 청년은 최초의 평민 의병장으로서 을사의병에 뛰어들게 됩니다.6)
1) 강윤정, 『신돌석』, 역사공간, 2016, 45-46쪽
2) 「김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3) 최혜주, 「대한제국기 帝國新聞의 일본 인식」, 『숭실사학』35, 숭실사학회, 2015, 160쪽
4) 강윤정, 『신돌석』, 역사공간, 2016, 47-48쪽
5) 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4, 인물과 사상사, 2007, 160쪽
6) 강윤정, 『신돌석』, 역사공간, 2016, 52-5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