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Ⅲ
영해의병이 해산된 때부터 6년간 신돌석의 행적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는 6년의 기간 동안 무엇을 했을까요?
『경국대전』의 규정에 따르면 조선시대 혼인 허용 연령은 남자 15세, 여자 14세입니다. 그리고 1912년에 측정한 평균 혼인 연령은 남자 18.2세, 여자 19.4세입니다.1)
신돌석이 영해의병에 참여한 19세의 나이는 결혼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지만, 그가 첫째 아들을 얻은 것은 그로부터 8년이 지난 27세입니다. 그가 언제 결혼했는지 알 수 없으나 이 기간에 ‘집안의 생업을 돌보지 않은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신돌석과 함께 공부했던 스승의 아들은 신돌석을 “세상이 어려운 때이니 나라를 두루 다니며, 왜적을 청소하겠다는 의지를 가졌으며, 집안의 생업을 돌보지 않고 뛰어난 인물을 찾아 동맹을 맺고 마땅한 전략을 세우는 데 힘썼다.”고 평가합니다. 신돌석의 행적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그는 이 고민의 6년을 ‘뛰어난 인물을 찾아’ 나라를 구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기간으로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가 이 시기에 박상진을 비롯한 항일운동가를 만났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것도 그 한 예입니다.2)
박상진은 그가 형제처럼 친하게 지낸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신돌석보다 6살 어렸지만, 학식과 덕망이 높았던 경북의 양반 가문 출신으로 그 역시 반외세 의식을 지닌 인물입니다. 박상진은 자신의 스승과 달리 위정척사 사상에 물들지 않고 신학문을 수용합니다. 그리하여 판사 시험에 합격하여 1910년 판사로 발령받습니다. 하지만 그해 8월 일제에 의해 국권이 강탈당하자 식민지의 관리는 되지 않겠다며 판사직을 사임합니다. 이후 대구에 곡물상회를 개설하여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삼고, 국내에서 ‘대한광복회’라는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합니다.
대한광복회는 고종을 옹호하는 유생들과 달리 ‘공화정’을 추구하는 근대적 단체였으며, 친일 부호를 습격하거나 일본이 불법으로 징수한 세금을 압수하여 이를 독립운동 자금으로 활용했습니다. 하지만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탄로 나자 박상진은 체포되어 순국합니다.3)
격동의 시기에 자신의 앞길을 함께 고민할 수 있었던 동료가 있었다는 점에서 신돌석은 복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청년 신돌석이 배신자의 간교에 휘말려 먼저 목숨을 잃지 않았다면 아마 청년 박상진과 함께 더 큰 일을 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보통의 청년들에게 6년의 시간은 생계와 결혼 등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기 위해 힘써야 할 시간으로 간주됩니다. 이 기준에 의하면 의를 좇은 신돌석의 6년은 인생을 ‘허비’한 시간으로 평가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민족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치려는 청년에게 6년의 시간은 오히려 부족하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자신이 하려는 것은 혼자 이룰 수 없는 일이기에 치밀한 계획과 확고한 신념을 다졌더라도 반드시 때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 기다림의 시간은 두려움과 걱정으로 신념이 희미해지는 불안한 시간일 수도 있고, 의로움을 실현 시킬 현실적인 방안을 모색하면서 경험 있는 사람들의 조언을 통해 신념을 확고히 다지는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6년의 침묵 후 보인 신돌석의 변함없는 투쟁 의지를 고려할 때, 그에게 있어서 이 기간은 아마도 평민 의병장이 되기 위해 겪어야 했던 인내의 시간, 성숙의 시간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1) 한국고문서학회, 『조선시대 생활사』, 역사비평사, 2002년, 40쪽
2) 강윤정, 『신돌석』, 역사공간, 2016, 44-45쪽
3) 대한광복회」,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박상진」, 『독립운동가』, 국가보훈처, 2011.08.11., 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