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Ⅲ
신돌석이 을사의병 당시 조직한 의병의 이름은 영릉의병입니다. 왜 영릉의병인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영릉은 신돌석의 지역인 영해와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그가 조직한 영릉의병의 참여 인원은 기록에 따라 100명~300명 사이로 알려져 있는데, 의병 조직의 권유를 받고 며칠이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이렇게 많은 인원을 끌어모읍니다.1) 이것은 그가 이미 사람들에게 평민 의병장으로서의 자격을 인정받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의미’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 불러 모으는 일은 쉬울까요? 나라를 위해 싸우자는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단숨에 사람을 모아 저항 단체를 조직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자신에게 직접 ‘나는 모든 일을 제쳐두고, 목숨의 위협까지 감수하면서 참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들이라면 의병을 조직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와 상관없이 옳은 일에 참여하여 힘을 보탤 것입니다. 하지만 주변에 그런 사람들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분 차별을 조장하거나 전투에 대해 모르는 양반 의병장도 많은 의병을 거느리고 다녔습니다. 양반 의병장을 따른 사람들에게는 양반의 신분적 지위나 의병 활동에 따른 보상이 중요한 문제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 의병 활동에 위기가 찾아오면 그 조직은 쉽게 와해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반해 신돌석은 유복한 집안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거부라고 하기에는 어려운데다 신분은 평민이었습니다. 아마도 보통의 사람들은 이왕 의병 활동에 나선다면 지역의 유명 양반 가문 밑에서 이름을 떨치거나 보상을 더 해주는 곳에서 활동하고 싶은 유혹을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 당시 신돌석이 되었다고 가정해봅시다. 우리 자신은 세상을 바꾸기 위한 일을 기획하는 ‘지도자’로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모을 수 있을까요? 의로운 일은 꼭 목숨을 내놓는 거창한 것일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우리를 따르려면 각자만의 ‘특별함’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당시에는 양반의 신분이었고, 돈이었습니다. 하지만 신돌석은 그것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신돌석을 따른 것은 그가 ‘의로움’이라는 남다른 특별함을 갖고 있었고, 이것을 평소에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돌석이 이끈 영릉의병은 비밀 유지가 잘 되었고, 지역민의 지지를 받았으며, 일본이 가장 상대하기 힘들어하는 의병 조직이 된 것입니다.
신돌석의 의로움은 단순히 옳은 일을 생각하는 태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 의로움은 신분적 지위나 돈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자기의 욕심을 희생’하고 세상을 바꾸는 일에 동참하도록 이끌 정도의 외부로부터 평가받는 행위의 의로움이었습니다. 따라서 평민 의병장으로서의 자격을 인정받았다는 것은 한순간에 얼떨결에 얻어진 것이 아니라 청년의 순수한 정의로움이 오랜 기간 발현되어 달성되었다는 값진 ‘의미’를 지닙니다.
최초의 평민 의병장을 중심으로 조직된 영릉의병이 결성된 ‘장소’도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 시대 양반이었다면 의병을 일으키는 역사적인 장면을 어디서 만들고 싶으신가요? 당시 양반들은 자신들의 지역거점이자 권력의 중심지였던 서원, 향교, 또는 서당 등에서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최익현이나 유인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신돌석은 전혀 다른 곳에서 의병을 일으킵니다. 그곳은 바로 ‘주점’입니다.2) 평민인 신돌석이 그런 양반들의 세력 거점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것은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주점에서의 의병을 일으킨 행위가 의병의 격을 떨어뜨리는 행위였을까요?
그는 형식이 아니라 본질에 충실했고, 장소에 구애됨 없이 의로운 거사를 일으켰습니다. 이런 행동은 그가 평민이자 피 끓는 청년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그곳에서 어떤 발언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알 길은 없지만, 그의 거병 의지가 사람들에게 진정성 있게 느껴졌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그의 휘하에는 20대 청년들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비록 잔반(殘班, 몰락한 양반) 계급일지라도 양반 유생 등 신돌석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그의 부하가 되어 싸웠고, 경북의 퇴계 이황 종택을 비롯한 양반가에서는 그의 의병 활동을 위해 자금을 지원했습니다.3)
신돌석이 ‘평민’ 의병장으로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은 그 ‘의로움’으로 평민이라는 신분적 한계를 뛰어넘어 유명한 양반 의병장과 어깨를 견줄 정도의 성과를 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바꾸려는 청년이라면 신돌석과 같은 ‘특별함’으로 세상에 도전하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여기에 부담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신돌석은 단번에 평민 의병장으로 세상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19세에 의병 활동을 경험한 후, 6년이란 ‘숙고’의 시간과 다시 4년간의 항일 활동이라는 10년의 의로움 끝에 역사적 인물이 된 것입니다.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가’, ‘나는 사람들의 지지를 얻는 의로운 사람인가’라는 질문으로 하루하루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면 누구라도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는 청년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1) 강윤정, 『신돌석』, 역사공간, 2016, 55쪽
2) 강윤정, 『신돌석』, 역사공간, 2016, 55쪽
3) 강윤정, 『신돌석』, 역사공간, 2016, 55·60-6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