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신돌석, #062 을사의병 활동

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Ⅲ

by 연결고리

청년 시절 읽기



#062 을사의병 활동



의병을 조직한 신돌석은 을미의병 당시 일본군에 크게 패했던 경험을 거울삼아 먼저 의병들을 훈련시킵니다. 열악한 무기와 부족한 전투 경험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명분’만을 내세워 과거장의 선비 복장으로 싸움에 나섰던 일부 유생 의병장과 달리, 그는 평민답게 현실적이고 계획적인 자세로 의병을 이끌었습니다.


신돌석이 의병을 일으켜 군사훈련을 시작했다는 소식은 그 지역의 지방관에게 전해졌는데, 지방관은 이 상황을 매우 곤혹스러워했고 그에게 군사행동 중지를 요청합니다. 하지만 청년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오히려 지방관을 설득하려 했는데, 지방관은 그런 신돌석의 ‘의로움’ 때문에 당시의 상황을 눈감아 준 것으로 보입니다.1)


그러나 곧 시련이 닥칩니다. 일제의 강압에 못 이긴 고종은 전국에 의병 활동을 그만두라는 권고를 내렸고, 통감부는 대한제국의 지방군인 진위대를 동원하여 탄압을 시작합니다. 얼마 전까지 고종의 밀지를 받고 의병을 일으킨 사람들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의병들은 정부가 이미 일제의 통제하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들과 전투를 벌입니다. 이때 신돌석은 지역을 돌아다니며 군자금을 모금하고, 인근 지역의 관아를 습격하여 무기를 획득합니다. 그 때문에 중앙정부는 해당 지역의 지방관들에게 책임을 물어 그들을 면직시키려고 했습니다.2)


이때 그 지방관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위로부터의 부당한 명령과 민중들의 의로운 행동이 충돌할 때 지방관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까요?


그들의 생각은 알 수 없지만, 지극히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일제의 식민지화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의병에 의해 지역 관아가 함락되는 상황을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지 않을까요?


만약 모든 지방관이 이와 같은 마음이었다면 일제가 조선의 식민지화를 포기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합류한 순창군수 같은 훌륭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지방관은 일제가 장악한 정부의 명령을 충실히 따라 의병을 진압했습니다.3)


국권피탈 후 대한제국의 관리에서 조선총독부의 관리를 연임하거나 조선총독부의 지방 말단 관리에서 지방 최고 책임자까지 승진한 일본 추종형 관리들이 적지 않았다는 점4)을 고려할 때 공무원들은 자신들이 지녀야 할 신념에 대해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의병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돌석은 이제 자신의 활동을 모른 채 눈감아 준 고향의 지방관과 대치하게 됩니다. 그동안 자신의 고향을 정면으로 공략한 적은 없었으나 이제 피할 수 없는 일이 된 것입니다.


그가 공격을 시작하자 관아의 군사들은 도망을 갔고, 이때 영릉의병의 선봉장이 성안에 불을 지르려 하자 신돌석은 이를 막습니다. 성안의 백성들은 죄가 없고, 불의한 무리만 처단하면 된다는 것인데, 이것은 고향을 공격하는 신돌석의 고심이 드러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관아를 장악한 신돌석은 지방관에게 의병을 공격하지 말 것을 경고하지만 그를 처단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상황들을 고려할 때 신돌석의 행위는 무차별적인 폭력 행사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돌석은 인근 지역의 관아도 공격하는데 이때도 지방관을 처단하지 않고 훈계만 합니다. 하지만 공격받은 지방관은 관군의 파병을 요청하게 됩니다.5)


영릉의병을 진압하기 위한 정부군의 수가 증가하고, 본격적인 농사철도 시작되자 의병을 일으킨 지 약 4개월 만에 신돌석은 의병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자신은 강원도로 이동합니다.


잠시 몸을 숨기고 있던 신돌석은 농사철이 끝나자 흩어진 의병을 다시 불러 모았고, 영해지역을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힙니다. 이 때문에 영해군수는 결국 사직을 청하게 됩니다.


물론 의병의 거침없는 행동만큼 관군의 공격도 만만치 않아 신돌석의 집과 신씨들의 가옥 수십 채가 불태워집니다. 게다가 부하들이 체포되기 시작하고, 일부는 사형이 언도됩니다.6)


의병의 지속적인 활동은 이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짧으면 짧은 시간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 기간에 의병들은 군자금 획득에 실패하고, 동료들이 전투 중 전사하거나 관군에 붙잡혀 사형 선고를 받고, 종국에는 가족들이 고통받는 상황을 겪게 됩니다. 의병에 동참할 때부터 이런 어려움은 충분히 예상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의병의 사기를 꺾었고, 지도자의 입지를 위축시켰습니다.


만약 뚜렷한 신념이 없었다면 위기 앞에서 의병을 해산한 후 조용히 잠적하며 살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의병을 조직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신의 투쟁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물론 관군의 거센 공격으로 고향 마을이 불타고 부하들이 체포된 상황에서 신돌석은 새로운 투쟁을 모색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산중으로 피신하여 의병을 주둔시키고 소규모 전투를 이어갑니다. 이제 유격전이 시작된 것입니다.


의병이 산속으로 이동하자 순검과 일본인 보좌관이 파견되어 의병의 동향을 파악하였는데, 의병은 이들의 감시를 피하면서 산속에서 혹독한 겨울을 맞이하게 됩니다.7)


1907년 1월, 매서운 추위 속에 30세의 청년 의병장은 산속에 피신 중인 의병들을 이끌어야 했습니다. 그는 관군의 추격을 받으며 의병들에게 추위를 피할 장소를 제공해야 했고, 군자금을 확보하고 식량을 책임져야 했습니다.


신돌석은 이동 중에 관군의 기습으로 총을 맞아 부상을 입었지만, 관군과의 전투에서 그 기세는 꺾이지 않았고, 병사에 지친 군사들을 다독이기 위해 소를 잡아 위로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관군의 공격은 여전히 맹렬하여 겨울을 보내려던 장소를 결국 포기하게 됩니다. 혹한기에 의병 활동이 위축되자 의병들이 추위를 피해 집으로 돌아갔을 것으로 판단한 정부는 대대적인 검거 활동을 펼쳤고, 의병들은 체포되고 무기를 몰수당하는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8)


당시 상황에서 사람들을 다시 의병에 동참시키는 것은 주점에서 처음 거병했을 당시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의로운 생각으로 의병에 동참했겠지만, 생사를 넘나드는 고된 투쟁으로 의병 세력이 위축되고, 가족들까지 위험해진 상황에서 보통 사람이라면 의병을 그만두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1907년 4월, 봄이 되자 신돌석은 의병 100명과 수십 자루의 총기를 확보하여 의병 활동을 다시 재개합니다.9) 평민에 불과한 청년 의병장은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혹독한 겨울을 거치며 겨울 당시보다 더 큰 세력으로 무장하여 돌아왔으니, 그의 탁월한 지도력도 대단하지만, 의로움을 위해 역경 앞에 물러서지 않는 청년의 강인함을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1) 강윤정, 『신돌석』, 역사공간, 2016, 56-57쪽
2) 강윤정, 『신돌석』, 역사공간, 2016, 86·88쪽
3) 조재곤, 「러일전쟁 이후 의병탄압과 협력자들」, 『한국학논총』37,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2, 430쪽
4) 박은경, 「일제시대 조선총독부 조선인 관료에 관한 연구-충원양식을 중심으로」, 『한국정치학회보』28, 한국정치학회, 1995.5, 144-145쪽
5) 강윤정, 『신돌석』, 역사공간, 2016, 90·92쪽
6) 강윤정, 『신돌석』, 역사공간, 2016, 92-95쪽
7) 강윤정, 『신돌석』, 역사공간, 2016, 96·101쪽
8) 강윤정, 『신돌석』, 역사공간, 2016, 100-101쪽
9) 강윤정, 『신돌석』, 역사공간, 2016, 102쪽


"역경에 굴복하지 않는 나는 청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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