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Ⅲ
정미년 봄부터 재개된 신돌석의 의병 활동은 그해 여름이 되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고종이 황제 자리에서 강제 퇴위 된 후 대한제국의 군대도 강제 해산된 것입니다. 해산된 군인 중 의병에 합류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 시기의 의병을 정미의병이라고 합니다.
신돌석은 이런 상황에서 그해 8월, 영릉의진을 이끌고 영양군으로 진격하여 일본군 분파소와 관아를 공격하였고, 일본군 수비대의 추격을 받으며 영덕, 삼척 일대로 끊임없이 이동하며 자신의 영역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의병들은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부대를 나누어 이동하다가 합류하는 일을 반복해야 했고, 새벽에 일본군 수비대의 기습을 받아 피해를 입었으며, 이동 중에 군자금을 계속 모금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1)
그런데 상황은 더욱 악화됩니다. 해산 군인의 합류로 의병 전력이 개선되었지만, 일본은 고종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 해산을 대비하여 이미 대규모 부대를 한반도에 파견한 상황이었고, 대한제국 군대 해산이 마무리는 9월이 되자 토벌대를 편성하여 본격적인 의병 탄압을 전개한 것입니다.2)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그해 9월 신돌석이 무려 170여 명의 의병을 이끌었으나 일본 토벌대와 벌인 첫 전투에서 일본군 화력에 밀려 20명 전사, 30명 부상이라는 큰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고 합니다.3)
이때 어려움을 겪었던 것은 의병만이 아닙니다. 전투가 치열해지면 치열해질수록 지역민의 피해도 그에 비례하여 증가하게 됩니다. 다음은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양민 피해 기사의 일부입니다.
▫의병에게 해를 입은 일본인의 복수를 위해 일본 순사 수십 명이 포를 쏴서 무고한 양민 피해자가 20명이 되었고 동네는 어육이 되었다고 언급. (날짜 1907-12-7)
▫의병이 주둔했던 지역에 일본군이 들어와서 양민 19명을 총살하였다는 내용. (날짜 1907-12-7)
▫일본군 소위와 경시총감이 각각 의병의 귀화를 설명하고 또 양민가를 조사하고 길을 사람에게 질문하는 것이 가혹하여 주민들이 무서워하였다는 내용. (날짜 1908-1-30)
▫의병과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무고양민이 일본군에게 피살되었는데 향후에는 흉기를 가지고 교전한 사람이 아닌 경우에는 지방관에게 보내어 조사한 후 처리하게 하였다는 내용 (날짜 1908-2-25)
▫ 각 지방에서 토벌대가 도착한 곳에서 반상노소부녀를 불문하고 모두 때려서 의병을 찾으라고 하여 지역이 소요하더라는 내용. (날짜 1908-8-27)4)
‘대한매일신보’는 의병에 우호적이면서 반일적인 시각을 보였지만, ‘황성신문’은 의병을 ‘폭도’로 인식하여 비판했습니다. 다음은 ‘황성신문’에 실린 양민 피해 기사의 일부입니다.
▫의병 100여 명이 수원 등지에 침입하여 양민을 겁박하고 재산을 약탈한다는 내용. (날짜 1907-9-29)
▫의병과 일본군이 교전하는 중에 양민들의 가옥이 불타고 재산을 빼앗겼다는 내용. (날짜 1907-10-4)
▫대한협회의 연설을 보도하며 의병의 폭력성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도. (날짜 1907-11-27)
▫의병으로 인해 폐허가 된 지역에 대한협회 관계자가 양쪽을 주선하여 의병을 뉘우치게 하고 백성을 귀가하게 하였다는 내용. (날짜 1908-4-15)5)
황성신문의 ‘의병도 나쁘고 일본군도 나쁘다’는 양비론의 태도에 대해서는 그 옳고 그름을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라의 행정권을 빼앗기고, 군대까지 해산된 상황에서 저항하지 말라는 것은 식민지화를 받아들이라는 말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훗날 역사는 ‘조선은 저항 없이 일제의 식민지화에 동참했다’라고 기록될 것입니다. 따라서 언론의 논조는 격동의 시대일수록 시대 상황을 더 정확하게 반영해야 합니다.
의병과 지역민의 피해가 증가하고, 언론과 공권력이 의병을 ‘폭도’로 규정하여 비판하고 공격하는 상황이 지속될 때, ‘과연 옳은 것은 무엇인가’라는 가치 혼란을 겪게 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는 불의한 세력이 훨씬 클 때, 옳은 일을 하면 할수록 상황이 더욱 악화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청년 지도자의 고심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본군에 비해 열악한 화력으로 의병 사상자는 늘어갔고, 심각한 피해를 입어 퇴각하며 수시로 거처를 옮겨야 했습니다. 게다가 일본 측은 교전 중에 자신들이 불태운 민가를 의병이 한 것으로 누명을 씌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신돌석은 의병 수백 명을 이끌고 일본군 주둔지를 공격하는 과감한 행동을 멈추지 않습니다. 9월 토벌대와의 첫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일본군 토벌대가 주둔하고 있는 문경 부근에서 약 300명의 의병을 이끌었고, 10월 초에는 의병 150여 명을 이끌고 영해읍내를 공격하였으며, 10월 말에는 의병 240명을 이끌고 평해군에서 군자금을 확보합니다. 11월 초에는 의병 300여 명을 이끌고 봉화군을 공략한 후 이어서 순흥으로 이동하여 재차 공격을 감행했는데, 이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민가 180호가 소각되었다고 합니다. 일본 측은 이에 대해 의병이 민가를 불태운 것처럼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로 이는 일본군의 초토화 작전으로 짐작되며 의병은 순검의 집 3채만 불태웠기 때문에 지역민이 오히려 음식을 내와 그들을 위로하고 친일 군수의 학정을 호소했다고 합니다.6)
공권력과 정보망을 활용한 의병 추격이 계속되었지만, 신돌석은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근거지를 옮기며 투쟁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군수물자, 화력 모두 열세였고, 일본군의 민간인에 대한 탄압도 계속되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의병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다고 예상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청년 신돌석은 일본군 토벌대의 예상을 깨고 오히려 더 강경한 자세로 저항하여 그들을 당황시켰습니다. 결국 11월 중순이 되자 난감한 토벌대는 신돌석을 비롯한 약 800명의 의병이 더욱 창궐하고 있다는 우려 섞인 보고를 하게 되었고, 기관총까지 동원하는 무력 증강과 더 치밀한 정보 수집 활동으로 다시 토벌작전에 나서게 됩니다.7)
전력을 고려할 때 절대 가망이 없다는 이성적인 판단을 무너뜨린 것은 청년의 끈질긴 의로움입니다. 그 의로움은 열악한 상황에서 오히려 의병 세력을 더욱 확장시키는 원동력이 되었고, 불의한 세력을 몰아세우는 힘이 되었습니다. 결국 청년의 의로움이란 불가능을 바꾸는 출발점인 것입니다.
1) 강윤정, 『신돌석』, 역사공간, 2016, 107-110쪽
2) 강윤정, 『신돌석』, 역사공간, 2016, 105-106·111쪽
김상기, 「제14연대 진중일지를 통해 본 일본군의 의병탄압」, 『한국독립운동사연구』44,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3.4, 8쪽
3) 강윤정, 『신돌석』, 역사공간, 2016, 113쪽
4) 김헌주, 「대한제국기 의병운동을 둘러싼 담론지형과 良民論의 역할-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을 중심으로」, 『사학연구』133, 한국사학회, 2019.3, 430-431쪽
5) 김헌주, 「대한제국기 의병운동을 둘러싼 담론지형과 良民論의 역할-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을 중심으로」, 『사학연구』133, 한국사학회, 2019.3, 443쪽
6) 강윤정, 『신돌석』, 역사공간, 2016, 114-122쪽
7) 강윤정, 『신돌석』, 역사공간, 2016, 1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