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Ⅲ
#064 서울진공작전에서의 배제
한편 1907년 11월, 이인영은 전국의 의병장들에게 의병부대를 통합하고 서울을 향해 진군하자는 격문을 보냅니다. 그리고 12월 의병장들이 모여 13도 연합의병부대를 결성하고, 여기서 경상도를 대표하는 대장으로 30세 청년 평민 신돌석이 추천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통감부는 “의병을 계속하면 법에 따라 처벌하되, 성심으로 귀순하는 자는 죄를 묻지 않고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도록 하겠다.”는 황제 명의의 칙령을 내려 의병을 회유하였고, 일진회를 중심으로 자위단을 구성하여 더욱 교묘한 탄압을 이어갑니다.1)
국권피탈의 순간이 다가올수록 의병은 더욱 어려운 처지에 내몰리게 되고, 이런 어려운 국면을 타개할 방안 중 하나는 13도 연합의병부대가 추진한 서울진공작전을 성공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대장 추대 한 달 만에 신돌석은 양반 출신 의병장으로 교체됩니다. 그리고 신돌석과 함께 다른 평민 의병장도 서울진공작전 부대 편성에서 제외됩니다. 그리고 다음 해 1월 서울진공작전은 총대장 이인영이 이탈한 가운데 실패로 막을 내립니다.
신돌석이 교체된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가 평민이라는 신분 때문에 교체되었다는 의견입니다. 그 때문에 13도 연합의병으로서 강원도 양구에 집결은 했으나 대장 교체 후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자신의 지역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견해는 신돌석이 강원도 양구에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장에서 교체되었다는 의견입니다. 그가 강원도 양구로 이동했는지는 증거가 명확하지 않고, 가진 재산이 없고 신분도 낮은 그가 자신의 근거지를 벗어나 활동하기는 쉽지 않았기 때문에 의병 집결지에 다다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2)
두 의견 중 어느 것이 신빙성이 있을까요? 지금껏 일본군의 탄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의로운 목적을 갖고 활동했던 신돌석이 군자금이 없다고 참여를 거절했을까요?
그는 지난해 혹독한 겨울을 거치면서 더 많은 자금을 확보하여 더 큰 세력의 의병을 조직한 인물입니다. 의병연합 세력으로부터 나라를 구하는 절박한 일에 참여 요청을 받은 신돌석이라면 주변의 양반 가문들에게 도움을 구하거나 관아를 공격해서라도 필요한 자금을 확보해서 반드시 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11월까지 신돌석과 함께 연합하여 지역에서 활동한 양반 의병장은 13도 연합의병부대의 대장으로 신돌석과 같이 이름을 올렸으면서도 신돌석만 대장에서 제외되고, 이후 대장들은 모두 양반 유생이 차지하게 되며, 신돌석 이외에 다른 평민 의병장도 부대 편성에서 제외됩니다. 이런 정황을 고려할 때 단순히 그가 양구에 도착하지 못해 교체되었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나라가 위태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동료로부터 실력이 아닌 신분으로 평가받은 상황에서 신돌석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사회에는 세상을 바꾸려는 여러 가지 멋진 모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좋은 뜻으로 그 모임에 들어갔더니 사람들은 모임의 목적을 망각하고, 출신·학벌·지위 등을 따져 사람들을 편 가르고, 예산을 배정하며, 책임 있는 자리에 특정 세력의 사람들만 반복적으로 추천한다면, 부패한 사회를 바꾸려는 모임 그 자체가 부패했다는 인식으로 얼마나 큰 좌절감을 느끼게 될까요?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만약 신돌석을 배제한 연합의병부대가 서울진공작전을 성공시켜 일본이 조선의 식민지화를 포기했다면 청년 신돌석이 맞이하는 세상은 과연 청년이 원하는 세상이 되었을까요? 혹시 그 세상은 여전히 신분제도를 강화하는 사회로 회귀하지는 않았을까요? 만약 그런 상황이라면 신돌석 자신은 지금까지 목숨을 내놓고 견뎌왔던 순수한 의로움에 상처를 입게 되지 않았을까요?
위기의 상황에서 아직도 성리학적 사고를 버리지 못한 양반 의병장들에게 청년은 분명 크게 실망했을 것입니다.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무려 1,000여 명을 이끄는 의병장의 자리에서 공개적인 망신을 당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쉽게 잊기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일본이라는 외부의 적보다 양반이라는 내부의 사람이 더 큰 좌절감을 안겨주었습니다. 하지만 청년 신돌석은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현실에 고통받는 지역민을 위해 의로움을 지켜갑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를 스승으로 받아준 양반, 의병 활동에 아낌없는 지원을 해 준 양반, 자신의 부하로 들어와 활약한 양반, 그리고 그 활동 중에 목숨을 잃은 양반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제로 신돌석의 의병부대에 도움을 주었다는 이유로 퇴계 이황의 종택은 불탔고, 안동의 명문가 출신이자 후에 망명 독립운동가가 되는 이상룡은 검거되었으며, 한 양반은 마을 앞에 거꾸로 매달려 고문을 당했습니다.3)
고통을 함께한 양반들과 자신의 동료들, 지역민들을 생각할 때 청년 신돌석은 자신이 당한 신분적 차별보다는 민족의 위기를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3도 연합의병부대에서 양반 의병장들에 의해 배척은 되었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지역에서 더욱 치열한 저항을 이어갔고, 일본군을 곤경에 빠뜨립니다.
나이 많고, 지위도 높았던 당시의 양반 기성세대들이 보인 잘못된 행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로움을 지켰던 청년의 성숙한 태도가 현재에도 옳은 일을 추구하지만 같은 이유로 좌절감을 느끼는 청년들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희망이 되길 바랍니다.
1) 강윤정, 『신돌석』, 역사공간, 2016, 123-124·130쪽
2) 강윤정, 『신돌석』, 역사공간, 2016, 130-131쪽
3) 홍윤호, 「시험 볼 때 달달 외운 신돌석, 우리가 몰랐던 드라마」, 오마이뉴스, 2018.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