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신돌석, #065 일본의 회유작전

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Ⅲ

by 연결고리

청년 시절 읽기


#065 일본의 회유작전


서울진공작전은 실패했고, 일본의 잔인한 의병 토벌 작전은 해를 넘겨 이어졌으나 신돌석의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이미 지난 11월에 병력을 증강시켜 이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전개했지만 성과를 얻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해가 바뀐 2월이 되자 일본군과 경찰은 또 다시 의병 토벌 계획을 수립합니다.


이번에는 군대를 움직이기 전에 먼저 밀정을 파견하여 정보를 수집하는데, 신돌석을 비롯한 약 300명의 의병이 경북 영양군 일월산에 주둔하고 있음을 파악하고 신돌석을 비롯한 주요 인물을 생포한다는 목표를 세웁니다.


일본군 토벌대는 한인 순사와 통역원을 배정할 정도로 정보 수집에 정성을 기울였고, 북으로는 봉화에서 남으로는 안동 예안지역까지 길게 그물을 친 대형으로 의병들을 일월산으로 몰아넣을 6일간의 계획을 수립합니다. 하지만 2월 중순에 시작된 작전은 개시 5일째가 지나서도 신돌석의 소재를 파악하지 못했고,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신돌석이 일월산을 이미 빠져나갔다는 것을 파악합니다.



토벌대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신돌석 부대에 대한 추격을 계속했고, 무력 충돌도 일부 있었으나 의병은 일본의 공격망을 벗어났고, 결국 성과도 없이 2월 말 토벌대는 해체되어 철수합니다. 의병장 생포 작전은 사실상 실패한 것입니다.1)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일본은 정면 공격 대신 회유책을 모색합니다. 그 회유책이란 바로 신돌석의 가족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일본군은 수소문 끝에 신돌석의 아내 한씨를 찾아냅니다. 정보를 입수한 일본인은 한복으로 분장한 후 한인 3명을 앞세워 신돌석의 아내와 3살 난 아들을 붙잡아갑니다. 일본 토벌대가 철수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일어난 일입니다.


가족을 잡아간 상황이라면 그들을 잔인하게 괴롭히며 신돌석을 협박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일본은 그보다 더 교묘한 방법을 활용합니다. 바로 한씨 부인을 극진하게 대우한 것입니다.


이렇게 무려 한 달을 대우했으니 일본이 얼마나 신돌석의 회유에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 달이 지난 후 일본 관리들은 한씨 부인에게 풀로 봉한 큰 편지를 하나 건넵니다. 그들은 그 편지를 신돌석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하며, 그 목적을 ‘피차 만난 것을 좋게 여기고 삶을 즐기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으니 마치 영화에서 있을법한 교활한 회유책이었습니다.


한편 한씨 부인을 억류하고 있던 일본군은 한씨 부인을 되찾기 위해 신돌석이 공격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신돌석이 일본군에게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2)


일본군의 부탁을 받은 아내 한씨는 그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남편이 없는 상황에서 3살 아들과 함께 너무 공포스럽지 않았을까요? 결혼 후 지난 시간들이 너무 고달프다고 느끼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앞으로의 삶도 너무 무섭다고 느끼지 않았을까요? 그런 공포감 속에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돈 많고 지위가 높은 부잣집 부인만 누릴 수 있는 최고급 대우를 한 달간 받은 상황에서 한씨 마음은 복잡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한씨가 일본군에 의해 완전히 포섭된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남편의 상황을 알면서도 일본군의 회유를 거절하지 않은 행동은 옳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에게 쉽게 비난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상황은 안중근의 둘째 아들 안준생의 생애를 상기시킵니다. 잘 알려지다시피 안중근은 1909년 하얼빈에서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감옥에서 순국합니다. 당시 안중근의 둘째 아들은 3살이었고, 안준생이 태어나기 전에 안중근은 독립운동을 위해 이미 떠났기 때문에 안준생은 아버지에게 안겨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머니를 따라 만주, 시베리아 등지를 떠돌다가 일본이 점령한 상하이에 정착하고, 거기서 일본 단체에 가담합니다. 그리고 안중근 의거 30주년이 되는 해에 이토를 추모하는 사찰을 방문하여 이토의 위패에 분향하고, 죽은 아버지를 대신해 이토의 죽음에 깊이 사과한다는 담화를 발표합니다. 그리고 이토의 아들을 찾아가 다시 한번 사죄를 합니다.


이런 행위에 김구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안준생의 처단을 명령하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이후 안준생은 총독의 양아들까지 되어 용돈을 받으며 살아가는 확고한 친일파가 됩니다.3)


물론 이 모든 것은 안중근을 깎아내리기 위해 일본이 기획한 정치적 이벤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지만 안준생의 행위를 옳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당시 한국인이라면 한반도 식민지화를 주도했던 일본인을 누구든 앞장서서 처단하고 해야 하고, 그 일을 위해 목숩을 바친 독립운동가를 존경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안준생이 겪은 것보다 열악한 상황을 겪은 독립운동가들이 훨씬 많았으므로, 고문도 당해보지 않은 안준생이 아버지의 숭고한 행위를 욕되게 하는 것은 절대 용납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런 행위는 옳지 못하다’라고 평가하기 전에, 자신의 의지대로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고 한 번도 아버지를 만난 적도 없는 상황에서 아버지의 행위로 일본의 탄압을 겪었던 아들의 고통과 공포를 한 번 정도는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 말은 ‘내가 그 상황에 처했을 때, 나는 당당할 수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먼저 물어봐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옳지 못하다’는 평가가 단순한 비난이 아닌 진정성의 의미를 담을 수 있습니다.


한 나라를 이루는 사람들은 모두 독립운동가들과 같은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아프고, 힘들고, 배고프고, 무섭다는 핑계로 누구든 쉽게 민족을 배신을 해버리면 그 사회는 희망도 신뢰도 없는 기회주의자들의 무리가 될 뿐입니다. 적극적으로 저항할 수 없다면 소극적으로라도 저항해야 합니다. 그것이 독립운동가들이 노력한 행위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일 것입니다.


한씨가 안준생과 같은 배신을 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한씨의 행동을 평가하기 전에 그 시대에 여성의 몸으로 겪었을 심적 고통과 공포가 결코 작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씨는 3살 난 아들을 업고 화매리라는 곳에서 일월산 인근까지, 직선거리만으로 무려 40km 가까이 되는 거리를 걸어 강원도 경계에서 신돌석을 드디어 만납니다. 한씨에게 그 길은 정신적·육체적으로 매우 고되고 힘든 길이었을 것입니다.


이때 아들과 함께 찾아온 아내에게 신돌석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어렵게 남편을 만난 아내는 일본군이 보낸 편지를 보여줍니다. 그때 청년 신돌석은 성난 목소리로 어찌 죽지 않고 왜놈들의 편지까지 가지고 왔느냐며 아내를 윽박지르고 편지는 읽어보지도 않고 불 속에 던져버립니다. 아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것은 당연했고, 자신을 ‘이익’으로 유혹하려 했다며 아내에게 빨리 사라지라고 합니다.


신돌석의 행동은 참 매정하게 느껴지지만, 목숨을 내놓은 의병들 앞에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은 훨씬 냉혹했습니다. 서로에 대한 그간의 사정을 묻고 서로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표현하기는커녕, 의병들 앞에서 청년 의병장과 그의 아내는 서로 상처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었으니 아마도 둘은 아무도 모르게 속으로 서로에 대한 애절한 마음을 삭여야 했을 것입니다. 이후 신돌석은 가족에 대한 깊은 배려와 걱정으로 그의 부모, 아내, 아들을 더 깊숙한 곳으로 이주시킵니다.4)


의로움을 위해 대외적으로 가족에게 매정하게 행동해야 했던 청년 지도자의 고뇌와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인내해야 했던 가족들의 고통을 생각하니 사람들이 흔히 하는 ‘독립운동가는 비참하게 살고, 친일 행위자는 떵떵거리며 산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신돌석, 신돌석의 부모, 신돌석의 아내, 그리고 그의 아들. 누구 하나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을 텐데 이를 어떻게 보상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독립유공자와 남겨진 유족에 대한 대우는 너무 과할 정도로 특별해야 합니다. 그들의 후손이 대대로 잘 되고, 그런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야 한 나라가 공동체로서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독립유공자와 그 가족들의 생애를 구체적으로 알기 전까지는 나의 고달픈 상황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이 받는 대우에 불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라를 구하는 일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고, 그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를 우리는 정확히 알고, 그 행위를 오래도록 기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 그런 의로운 자들이 많아지도록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청년 신돌석의 의로운 신념을 아내 한씨는 묵묵히 따랐고, 결국 일본의 회유책은 실패로 끝납니다.


1) 강윤정, 『신돌석』, 역사공간, 2016, 137-141쪽
2) 강윤정, 『신돌석』, 역사공간, 2016, 142-143쪽
3) 황기현, 「안중근 의사의 둘째 아들은 '영웅'이 아닌 '친일파'의 길을 택했다」, 인사이트, 2019.2.23
4) 강윤정, 『신돌석』, 역사공간, 2016, 144-145쪽


"역경에 굴복하지 않는 나는 청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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