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신돌석, #066 부대의 해산과 청년의 최후

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Ⅲ

by 연결고리

청년 시절 읽기


#066 부대의 해산과 청년의 최후



아내를 돌려보낸 신돌석은 계속해서 항쟁을 이어 갑니다. 식량, 인력, 군자금 확보를 위한 고된 활동도 계속됩니다. 하지만 일본 경찰은 이제 변장한 경찰인 ‘변장대’까지 활용하여 의병에 접근했고, 일본군의 계속된 탄압과 회유에 의병 세력은 점차 약화되기 시작합니다.


신돌석은 1906년 4월 영릉의진을 처음 일으킨 후 2년 6개월을 견뎠지만 결국 10명 정도의 인원만 남기고 부하들에게 해산을 명한 것으로 짐작됩니다.1) 31세인 청년 신돌석은 이제 또 다른 도전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부하들이 떠난 후 신돌석은 더 이상 항전을 이어가기 어려웠습니다. 그는 서당 시절 자신과 함께 공부했던 스승의 아들을 찾아가 일본군이 현상금을 걸어 놓은 상황이기에 여기서 생명을 잃기보다는 만주로 떠나서 투쟁을 이어갈 뜻을 비칩니다. 그리고 비밀스럽게 만주로 이주할 자금을 모금합니다.2)


이런 상황에서 비극은 갑작스럽게 찾아옵니다. 신돌석은 부대를 해산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부하였던 김상렬 형제의 집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신돌석은 처음에 이들이 자신의 이름을 팔아 민폐를 끼친 죄를 물어 그들을 처단하려 했다고 합니다. 의병 중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참가했기 때문에 의로움을 좇은 사람들이 있는 반면, 이익을 노린 김상렬 형제 같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체포된 신돌석 부하의 심문 기록에 의하면 양민이나 무뢰한을 포섭 또는 납치하여 의병을 만들기도 하고, 군자금 징발을 위해 5-6인을 파견했다고 하는데, 이런 과정 중에 신돌석의 의도와는 다르게 불법이 자행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3)


의병의 불법 행위는 의병을 도왔던 지역민에게 나쁜 영향을 끼쳤을 것이고, 일본은 이런 행위를 의병을 폭도로 규정할 수 있는 좋은 명분으로 삼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 의병장은 김상렬 형제의 행동에 분노한 것입니다.


신돌석이 김상렬 형제의 집을 방문할 당시 신돌석에게는 1,000근의 금과 1만 호의 고을을 준다는 현상금이 붙어 있었습니다. 현상금의 크기를 고려할 때 평민 의병장 신돌석은 어떤 양반 의병장보다도 일본군에게 위협적이었고 골칫거리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부하였던 김상렬 형제가 일본군에 포섭된 것입니다.


김상렬 형제는 그런 민족의 지도자를 자기 집으로 유인하고 술에 취해 잠들게 한 다음, 도끼 등으로 난타하여 죽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피신해 있던 신돌석의 3살 된 아들도 살해했다고 합니다. 당시 신돌석은 만주 쪽으로 길을 떠나는 중에 김상렬 형제의 집에 들렸던 것 같다고 하는데 참으로 비참하고 허망한 죽음이었습니다.4)


신돌석과 같이 13도 연합의병에서 제외된 평민 의병장 홍범도는 국권을 빼앗긴 후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 양성에 힘씁니다. 그리고 1920년 일본군을 상대로 봉오동전투에서 대승을 거둡니다. 이 승리는 이때까지 독립군이 올린 전과 중 최대의 승전 기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청산리 전투에도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웁니다. 청산리 전투는 봉오동전투보다 더 큰 규모의 항일 투쟁이었고, 무장 독립운동 사상 가장 빛나는 전과로 기록된 전투였습니다.5)


신돌석이 만약 만주 이주에 성공했다면 분명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신자의 악행에 더욱 분노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회에는 의로움을 바라는 사람이 이익을 탐하는 자보다 많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이익을 탐하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역사에 미치는 해악이 너무 크기 때문에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의로움을 위해 앞장설 용기가 없다면 최소한 선행을 방해하지는 않아야 하는데, 오히려 악행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김상렬 형제의 배신은 쉽게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훗날 신돌석의 전적지를 조사하는 한 역사답사단이 김상렬 일가가 살았던 김씨 집성촌을 찾아 신돌석에 대해 물은 일이 있었는데, 그때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낯빛을 바꾸며 김상렬 일가를 모른다고 둘러댔다고 합니다. 그 상황에 대해 당시 역사 답사자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신돌석을 죽였다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반응을 보였다고 추측했습니다.6) 배신자의 악행은 이렇게 역사에 기록되어 대대로 전해진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일본 경찰은 신돌석이 순국한 지 6일 만에 그의 시신을 가족에게 인도합니다. 가족들은 그 시신을 마음대로 장례 치르지 못하고, 헌병과 경찰의 합의 아래 매장합니다.7) 31세의 신돌석은 이렇게 자신의 청년 시절을 마감합니다.


격동의 시대에 신분적 차별과 일제의 강압적 탄압 속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잃지 않고, 민족의 생존을 위해 끝까지 싸운 청년 신돌석. 자신의 확고한 신념을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았고 지역민의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으로 그는 막대한 현상금이 걸릴 정도로 일본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 더 살아야 했음에도 신돌석은 배신자에 의해 꿈을 다 이루지 못하고 청년의 시절을 완결하지 못한 채 허무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여기서도 청년의 시절은 미완의 시기였고, 부족한 점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청년의 도전은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그의 뜻은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항일 투쟁으로 계승되었고, 그의 이야기는 역사를 통해 지금을 살아가는 청년들의 마음을 건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청년 신돌석과는 다릅니다. 그처럼 타고난 신체적 재능이나 인솔 능력, 의로움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나 주변 사람들의 지지가 부족합니다. 하지만 그 역시 평민이라는 약점을 계속 지니고 있었으며, 19세에 처음 의병에 나설 때 다른 의병장을 보고 배웠으며, 의병의 실패를 경험한 후에는 의로운 사람을 좇아 조언을 들으며 청년 의병장으로서 성장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신돌석을 따르며 성장했던 당시의 의병 청년들뿐 아니라 불의한 상황에 놓인 지금의 청년들에게도 적용됩니다. 그의 삶을 통해 작은 부분이라도 더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의(義)를 품게 되었다면, 그것을 청년의 신념으로 삼아 언젠가는 세상의 역경에 굴복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이 시대의 신돌석이 되기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1) 강윤정, 『신돌석』, 역사공간, 2016, 146·153-154쪽
2) 강윤정, 『신돌석』, 역사공간, 2016, 146·155-156쪽
3) 역사문제연구소 민중생활사연구모임, 「역사기행 평민의병장 신돌석의 전적지를 찾아서」, 『역사비평』, 역사비평사, 1988.9, 307쪽
4) 강윤정, 『신돌석』, 역사공간, 2016, 146·158쪽
역사문제연구소 민중생활사연구모임, 「역사기행 평민의병장 신돌석의 전적지를 찾아서」, 『역사비평』, 역사비평사, 1988.9, 308쪽
5) 「홍범도」·「청산리전투」,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6) 역사문제연구소 민중생활사연구모임, 「역사기행 평민의병장 신돌석의 전적지를 찾아서」, 『역사비평』, 역사비평사, 1988.9, 308쪽
7) 강윤정, 『신돌석』, 역사공간, 2016, 159쪽


"역경에 굴복하지 않는 나는 청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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